'더 선'과 '더 타임즈', 독특한 경우
영국 노동당 전당대회에 참석한 블레어의 연설을 보도하는 영국신문들의 논조를 통해 민주주의 국가에서 언론과 권력과의 관계를 들여다 보고 있다. 앞서 보수당과 가깝지만 현실정치에서 친블레어 신문으로 자리매김한 머독 소유의 '더 선'과 '더 타임즈'에 대해 살펴봤다. 일방적인 찬양 논조를 제목과 기사에서 가감 없이 들여다 볼 수 있었다. '더 선'과 '더 타임즈'는 영국 언론사에서 아주 독특한 경우다. 이념적으로 보수적이지만, 사주 머독이 블레어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는 탓에 모든 면에서 블레어를 일방적으로 지지하며 대변하기 때문이다. 대언론 재벌의 언론이 민주사회에서 어떤 모습을 띨 수 있는지 잘 보여 주는 사례다.
이제는 진보언론과 보수언론으로 나눠 블레어를 어떻게 바라보는 지 들여다 본다. 반대 노선, 다시 말해 평소 개혁적인 시각을 가져 이념적으로 노동당에 가깝지만, 블레어의 전쟁정책과 미국 추종정책을 강력히 비판해 오던 인디펜던트(The Independent). 그리고, 정치적으로 중도 보수 성향을 보이며 미국의 전쟁정책과 이를 추종하는 블레어 정책을 지지하면서도 국내문제에서는 노동당과 거리를 두는 데일리 텔리그라프(The Daily Telegraph)다.
진보 언론 '인디펜던트', 냉소적인 제목에 담담하게 공과 정리
평소 블레어의 전쟁 정책에 대해 인권과 이성이란 이름으로 날카로운 비판의 잣대를 들이대는 인디펜던트. 레바논 전쟁 당시 인디펜던트는 블레어 정부에 즉각 휴전 중재를 요청했다. 아울러, 전쟁으로 피해를 입는 레바논 주민들의 참상을 전하며 이스라엘의 비합리적이며 비인도적인 무차별 폭격, 그리고 미국의 지원정책을 고발하는 태도를 견지했다. 이런 인디펜던트가 블레어의 고별 연설을 어떤 시각으로 바라봤을까. 1면 제목이 이를 잘 정리해 준다. 블레어가 아내 셰리 여사를 안고 함박웃음을 짓는 사진 아래 아주 담담하고 간결하게 "멀고 먼 작별(The long goodbye)"이란 제목을 달았다. 그리고 밑에 부제(副題)처럼 요약한 짧은 기사에서 "블레어, 고든 브라운을 '주목할만한 사람'으로 칭찬하면서도 자신에게 따듯한 환호를 보내는 노동당원들에게 9개월 더 총리직에 머무는 것을 겨냥(Blair praises Brown as 'remarkable man' but aims to stay on for nine more months after Labour accords him rapturous rece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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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디펜던트가 보도한 블레어 연설 소식. 당장 물러나라는 요구에 내년에 물러난다는 의미로 "멀고 먼 작별"이라는 냉소적인 제목을 달았다. |
여기에는 배경설명이 간략히 필요하다. 전당대회 전에 노동당원 상당수와 일부 소장파 노동당 의원들은 레바논 전쟁 등으로 인기가 날로 떨어지는 블레어 총리에게 즉시 물러나라고 강력히 요구해 왔다. 그 후임으로는 브라운 재무장관이 유력하게 거론돼 왔다. 이런 상황에서 블레어가 9개월 정도 더 총리직을 수행할 것으로 예상되는 고별 연설을 하자, "머나먼 작별"이라는 표현을 썼고, 그가 총리직에 집착하는 듯한 자세를 보인다는 의미의 제목을 단 것이다. 그렇다고 블레어에게 냉소적인 시각의 기사만 다룬 것만은 아니다. 비록 작지만, 기사 한 가운데 "블레어가 위대한 지도자인지 생각하게 해주는 연설이었다(The speech was a reminder of why Mr Blair is such a formidable leader)"는 내용도 덧붙였다. 이어 2면과 6,7면에 블레어 연설의 주요 내용과 그가 각 분야별로 남긴 업적과 과제 그리고, 각 의원들의 반응을 담담하게 실었다.
보수 언론 데일리 텔리그라프, 블레어와 노동당에 노골적 반감
평소 중도 보수적인 성향을 보이는 데일리 텔리그라프는 아주 자극적인 제목을 달았다. 타블로이드 판형(版型)이 아니면서 우리네 신문보다도 훨씬 긴 독특한 신문 크기를 고집하고 있는 데일리 텔리그라프는 정론지(Quality Paper) 가운데 가장 많은 발행부수(88만 부)를 자랑한다. 비록 평소 노동당보다 보수당에 가깝다고 하지만 1면 제목은 다소 놀랍기까지 하다. "쇼맨십에 능한 블레어가 브라운이 받아야 할 각광을 훔치다(Showman Blair steals the spotlight from Brown)". '더 선'이나 '더 타임즈'에서 보던 블레어 찬가의 제목과는 정반대이면서 '인디펜던트'에서 보던 은유적인 냉소와도 크게 다르다. 노골적으로 블레어에 대한 반감을 드러낸 문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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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수적인 시각의 데일리 텔리그라프. "블레어가 브라운의 각광을 훔쳤다"는 노골적으로 부정적인 제목을 달아 보도했다. |
1면 제목에서만 블레어에 대해 노골적으로 불편한 심기를 드러낸 게 아니다. 8면과 9면을 할애한 추가 보도에서도 반(反)블레어 논조가 분명하다. 블레어 연설에 대해 "과장된 주장은 어리석고 성급한 것이다. 그런 주장 뒤에 숨은 진실은 무엇인가(The extravagant claims came thick and fast, but what is the reality behind them)"라는 비판적인 제목을 붙인 뒤, 블레어가 업적이라고 주장하는 것들이 사실 따져 보면 대부분이 문제점 투성이라고 지적한다.
쉽게 예를 들어보자. 블레어는 연설에서 "우리는 역사상 가장 안정적인 경제성장을 지속하고 있다" 고 주장했다. 블레어 정부 아래서 달성된 경제안정과 경제성 노동당이 보수당에 승리할 수 있던 비결은 여기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텔리그라프는 반박기사를 통해 "1950년대 이전에는 자료가 없어 알 수도 없고, 1959년에서 1973년 사이에도 지속적으로 경제가 성장했으며, 더구나 2005년의 경우 1.9% 성장에 그쳐 13년 만의 최악이었다"고 보도한다. 기사에는 없지만, 1959년부터 1973년까지는 보수당이 집권한 시기다. 은근히 노동당을 비판하면서 보수당을 강조하는 논조다.
이런 보도 태도는 두 가지로 해석해 볼 수 있겠다. 언론 본연의 자세인 비판 기능을 살려 어차피 자기 홍보에 적극적일수 밖에 없는 정당이나 정권의 주장을 냉철하게 걸러서 분석하는 기사라는 점. 이는 무척 긍정적인 언론의 기능이다. 또 하나, 이념적으로 동조하지 않는 노동당과 블레어를 흠집내기 위한 긁어 부스럼 만들기 식 논조라는 점. 이는 다음 페이지에 나온 기사에서도 그대로 읽혀진다. "셰리 여사 문제를 어떻게 풀까요.(How do you solve a problem like Cherie)". 이는 BBC의 프로그램 "How do you solve a problem like Maria(마리아 문제를 어떻게 풀까요)"를 패러디 한 제목이다. 11월 3일 개막하는 뮤지컬(오페라의 유령을 작곡한 앤드류 로이드 웨버가 새로 작곡한 작품)의 여주인공 '마리아'를 선발한 BBC의 6부작 쇼 프로그램 제목을 차용한 이 기사는 셰리가 브라운을 비난했다는 보도로 생긴 노동당 내분을 강조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이렇듯 신문의 논조에 따라 뉴스 소재를 다루는 시각이 전혀 다르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자유로운 의사 표현이 가능한 민주사회에서 신문이 갖는 특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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