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분란을 겪고 있는 노동당 내부에서 블레어 진퇴 문제를 비롯해 현대 영국 정치사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1980년대 이후 지금까지 노동당과 보수당의 정권 주고 받기 그리고 이 과정에 영향을 미친 언론과의 관계를 조명해 본다.
1) '원칙'의 닐 키녹
1992년 노동당수직을 물러나고, 1995년부터 EU에서 일한 뒤, 귀족 계급이 상존하는 영국에서 종신 남작(男爵, Baron)이 되었으며 현재 영국 왕국(UK)를 구성하는 하나의 연방, 웨일즈(Wales)의 중심 도시 카디프(Cardiff University) 총장이 된 닐 키녹. 그러나 이것은 후천적인 그의 노력의 결과물이고, 출신은 그리 화려하지 않다. 그의 아버지는 영국사회의 비주류, 웨일즈의 가난한 광부였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는 그에게 정치인으로 평생 간직해야 할 좌우명을 하나 던져 준 의미있는 스승역할을 수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1970년 처음 국회의원에 당선됐을 때 그의 아버지는 정치인으로 출발하는 아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기억해라, 닐. 국회의원은 단지 MP(Member of Parliament, 영국에서 하원의원을 가리키는 말)가 아니라 MP(Man of Principle)이라는 사실을." 사실, 우리 금수강산에서나 지구촌 다른 동네에서나 흙을 파며 사는 사람들은 대개 정직하다. 농촌에서 열심히 밭을 갈고, 김을 매면 그 노력이 풍성한 수확이라는 과일로 맺힌다. 곡괭이로 부지런히 땅을 파지 않으면 석탄을 캘 수 없다. 검은 석탄은 광부가 곡괭이질 하며 흘린 땀방울과 비례해 수레에 쌓인다. 땅에서 부지런함이라는 정직, 그 이외의 다른 원칙은 찾기 힘들다. 광부이던 아버지의 가르침을 충실히 받들었음인가...
2) 80년대 노동당 닐 키녹의 정치관
닐 키녹은 자신이 생각하는 원칙을 쉽사리 바꾸지 않았다. 원칙을 고집스럽게 고수했다. 그는 자발적인 핵무장 해제(unilateral nuclear disarmament )을 추구하던 정치인이다. 과거 식민 제국주의 시절 세계 최고의 강대국으로 팍스 브리타니아(PAX BRITANIA)의 영광을 간직하고픈 영국인들에게 군비를 줄인다는 평화 정책은 그리 달가운 소재가 아니었다. 더구나, 영국국민들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과거의 동지이던 소련과 오랫동안 냉전을 벌이면서 생겨난 뿌리깊은 불신, 영국안보를 위협하는 공산주의 소련의 위협에 대한 공포를 떨치지 못한 상황이었다. 비록, 닐 키녹이 처음 이런 정책을 추진하던 70년대와 80년대 초반의 엄혹하던 냉전 상황과 달리 소련에 고르파초프라는 개혁과 개방의 평화주의자가 나타났지만, 아직 영국인들의 대소(對蘇) 불신을 떨쳐 내기에는 시기상조였다. 시대를 앞서가는 철학은 때로 시련을 겪기 마련이다. 요즘은 소련이 물러난 자리에 과포장된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만...
주요 산업 국유화도 마찬가지로 닐 키녹과 그의 노동당을 시련으로 몰고간 정책 가운데 하나다. 주요 산업 국유화는 비록 2차 세계 대전 이후 처칠의 보수당 정권은 대신해 들어선 노동당 정권에서 추진하던 '요람에서 무덤까지(from the cradle to the grave)'의 복지정책과 함께 대표적인 정책 방향이었다. 하지만, 기업가나 기득권층은 물론 중산층에게도 사회주의와 이념적으로 동질의 것으로 비치면서 거부감을 불러일으키는 정책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닐 키녹이 군비확장과 냉전, 전통적 자본주의에 충실한 보수 언론들부터 얼마나 두들겨 맡았을지 20년 전 상황을 짐작해 볼 수 있다.
3) 80년대 보수당 대처 총리의 정책
당시 시대적 상황을 들여다 보며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1979년 의회에서 불신임당한 노동당의 칼라한 총리 정권이 물러난 뒤 치러진 총선에서 1당이 돼 정권을 잡은 보수당의 마가렛 대처(Margaret Thatcher) 총리 아래서 영국은 극우의 진앙지 공화당 레이건 대통령과 밀착해 찰떡 궁합을 보이던 터였다. 요즘 부시와 블레어의 궁합 이상 가는 것이었다. 팽창 정책과 미국의 강경 정책을 지지하던 터였다. 당시 시대적 상황은 특히 영어권 국가들에서 극우적인 색채가 진한 정치인들이 정권을 잡았다. 특히 대처의 둘도 없는 소울 메이트(soulmate) 레이건 말고도, 캐나다에서 1984년 집권한 브라이언 멀루니(Brian Mulroney)역시 같은 성향이었다. 이런 시대적 상황에서 대처는 1982년 아르헨티나 군부정권과 아르헨티나 앞바다의 영국령 섬 포클랜드 영유권을 놓고, 포클랜드(Falklands War)을 치르기까지 했다.대처정부는 이 전쟁에서 레이건 정부의 강력한 지원 아래 승리를 거둬 영국국민들에게 전쟁 승리라는 안겼다. 식민주의 시절에 맛보던 기쁨을 간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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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처 총리와 레이건 대통령. 1980년대 영어권 주요국가는 보수정치인들이 정권을 장악했다. |
또, 영국병을 앓고 있던 경제에 활력을 넣는다는 명분아래 구조조정과 함께 주요 국영기업의 민영화에 나섰다. 1975년 보수당 전당대회에서 히스를 물리치고 여성 최초의 당수가 된 대처는 정치적으로 극우인 동시에 경제적으로 강력한 보수주의자였다. 한마디로 영국 경제를 시장의 자유(free-market liberalism)가 지배하는 전통적 자본주의 정신과 제도로 급격하게 변화시켜 나갔다. 긴축재정은 대표적이다. 정부가 돈을 쓰지 않는 다는 것은 경제를 민간의 손에 맡긴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나타나는 가장 대표적인 정책은 국영기업 민영화, 그리고 친 자본가적 경제정책의 상징인 감세정책.
국가가 돈을 덜 쓰니 세금을 많이 거둬들일 이유가 없다. 기업은 세금 외에 또 하나의 혜택을 얻는다. 노조의 무력화와 구조조정, 해고 사유의 완화 같은 친자본가 정책이다. 일반 국민을 향한 정책으로는 복지축소다. 국가가 세금을 적게 걷으니 복지를 실시할 돈이 없다. 사회복지의 대표적인 상징은 오늘날 영국을 제외한 서유럽 복지국가들에서 보듯이 무상교육과 무상의료다. 이를 줄여 나간 것이다.
4) 대처 총리와 언론
국민들 사이에서는 인기가 엇갈렸지만, 보수언론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1979년 5월 정부를 구성한 대처는 1990년까지 11년간 권좌를 지켜 현대 영국 역사에서 최장 총리의 영예를 누렸다. 물론 그녀에 앞서 1812년부터 1827년까지 리버풀 경(Lord Liverpool)이 15년 총 재임한 재임기간 언론의 관계를 가장 잘 보여준다. 이때 노동당으 키녹은 핵무장 해제를 총선 이슈의 공약으로 들고 나왔다. 그런데, 대처는 이런 국제평화와는 무관하게 국내 경제 성장을 들고 나섰다.
국민들이야 동서고금(東西古今)을 통해 눈앞의 진상이 최고라는 인식이 강하다. 당장 경제성장이라는 열매에 국제 평화나 정의 같은 문제는 잠시 뒷전으로 밀리기 마련이다. 거의 전부라 할 수 있을 만큼 언론이 모두가 나서 대처를 거들었다. 오직 3개의 신문만이 그래도 보수당 대처 정부의 일??니라 닐 키녹의 노동당은 그 이전부터 보수언론으로부터 줄기차게 불이익을 받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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