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스케키'는 아련해지는 어린 추억 가운데 하나입니다. 영화에서처럼 어깨에 짊어지고 다니며 파는 아이스케키는 본적이 없지만 동네 문방구 내지는 잡화점 앞에 직육면체의 네모난 아이스케키 통이 놓여 있고 욕조 물마개를 10배 정도 뻥튀기한 것 같은 검은 고무 뚜껑을 열고 드라이아이스가 들어있는 아주 차가운 누런 풍선을 들치면 그 아래에 아이스케키가 놓여있습니다.
거울처럼 반사되는 신기한 통속에 팔을 집어넣어 뜨겁지도 않은데 하얀 김이 펄펄 나는 아이스케키를 집어 올려 포장을 벗기고 한입 빨아보면 차갑고 달짝지근한 맛에 황홀함을 느낍니다. 그 황홀함을 조금이라도 더 느끼기 위해 아껴가며 핥아먹는다는 나름대로의 원칙이 있었기에 깨물어 먹는다는 것은 아주 몰상식(?)한 일로 치부했습니다. 하나에 2-30원 했던지라 어쩌다 엄마한테 용돈 10원 받는 처지에서 자주 맛보지는 못했고 친척 어른에게서 용돈이라도 받으면 쪼르르 달려가 사먹는 귀하디귀한 군것질 거리였습니다. 영화 '아이스케키'는 이런 아련한 추억과 소박한 행복을 다루고 있습니다.
전라도 항구마을의 10살 영래(박지빈)는 아빠없이 밀수 화장품 장사를 하는 엄마(신애라)와 단둘이 삽니다. 덩치는 작지만 또래들이 '애비 없는 호로자식'이라고 놀리기라도 하면 박치기 한방으로 물리치는 강단이 있습니다. 엄마와 오랜 친구이자 앙숙인 술집 작부 춘자 아줌마에게서 죽은 줄만 알았던 아버지가 서울에 살고 계시다는 말을 듣고 귀가 번쩍 뜨입니다. 엄마에게 얘기해봤자 펄쩍 뛸 테고 해서 영래는 서울 가는 차비를 모아 혼자 아빠를 만나러 가겠다는 결심을 합니다.
1800원이 넘는 기차표 값을 마련하는 게 급선무인지라 같은 반 고아 친구 송수가 밥벌이로 하는 아이스케키 장사에 엄마 몰래 뛰어듭니다. 팥들은 건 10원, 안들은 건 5원, 하나팔면 1원을 벌어 언제 기차 삯을 모을지 까마득하긴 하지만 기어이 아빠를 만나야겠다는 굳은 의지는 변함없습니다.
아이스케키 공장 사장은 케키 장사보다는 항구로 드나드는 밀수품 거래에 더 정신이 팔려있고 아이들에게 손찌검을 일삼는 무지막지한 성격이지만 공장주임인 인백이 아저씨(진구)는 이런 영래를 보듬고 도와주려합니다. 인백이 아저씨는 빨갱이 아버지 때문에 공부도 제대로 못하고 변변한 곳에 취직도 못하는 신세라 돌아가신 아버지에게 증오의 감정만이 남아있지만 아빠 찾아 나서겠다는 영래에게 왠지 모를 호감이 갑니다.
영화는 1960년대 말 가난한 시대를 배경으로 훈훈한 아날로그적 감성이 넘칩니다. 아폴로 11호의 달 착륙을 '코쟁이들이 요강 쓰고 달나라 갔다'고 이해하고, 땅에 떨어져 흙묻은 삶은 계란도 맛있게 먹을 정도로 배고픈 시절, 등장인물들은 생존을 위해 싸우고 지지고 볶지만 알고 보면 순박한 사람들입니다.
비쩍 마른 불쌍한 강아지를 늘 포대기로 업고 다니는 주인집 아들과 '가'로 이어지는 성적표 때문에 구박받는 그 아들의 누나인 여자아이, 큰 덩치에 어울리게 낮잠을 즐기지만 밤으로는 동네 아가씨 꼬시기에 여념 없는 극장 매표소 형이 서울말을 가르쳐주는 장면 등 주변 인물들의 에피소드는 많은 웃음을 선사하며 영화의 윤활유 이상의 역할을 해냅니다. 또 그동안 조폭영화에서 숱하게 등장해 억울하게 평가절하 돼왔던 전라도 사투리도 정감 있고 맛깔스러운 제 맛을 되찾습니다.
아이스케키를 한통 가득 담아 어깨에 피멍이 들도록 팔러 다니지만 정작 자신은 한입도 맛볼 수 없는 현실 속에서 아이들은 웃음을 잃지 않습니다. 아역배우로서 천부적인 재능을 지닌 박지빈은 화나거나 삐지는 연기까지 훌륭하게 잘 해냅니다. 고아인 송수역의 장준영(임상수 감독의 '바람난 가족'에서 문소리 집안의 입양된 아들로 나왔었는데 많이 컸더군요.)은 덩치는 크지만 눈매나 얼굴형태가 고운 여자아이 같은 묘한 불균형 때문에 더 끌리는 캐릭터입니다. 안방극장에서는 익숙하지만 스크린에는 첫 나들이를 한 신애라는 젊은 시절부터 지속돼온 톡톡 튀는 현대적인 이미지라서 시대물에 적합할까하는 의문을 가졌지만 실제 영화에서는 그동안 삶의 경륜이 자연스럽게 묻어나오는 억척스러운 엄마역할을 잘 해냅니다.
아들 얼굴이 꼬질꼬질하다고 손바닥에 침 묻혀 얼굴을 닦아주고 한밤중 우물가에서 도란도란 속삭이다 물장난하는 장면에서는 흐뭇한 추억을 일깨워주고 고아친구 송수의 불행 앞에 계산 없이 행동하고 말하는 순박한 우정 또한 가슴을 울립니다. 아버지에 대한 어린 아이의 본능적인 그리움과 그 아들을 애틋하게 여기는 엄마의 마음이라는 흔하디흔한 소재를 진부하지 않게 다양한 에피소드로 오밀조밀하게 잘 버무렸습니다.
각종 첨가물과 설탕 때문에 건강과 다이어트의 적이라며 한번 망설이게 되는 요즘 아이스크림이 아니라 천국에서나 맛볼 수 있을 것 같은 추억의 꿀맛을 선사해주는 아이스케키처럼 이 영화는 자극적인 폭력이나 현대적인 감각, CG같은 기술력 등은 없지만 지나온 시대에 현미경을 들이대듯이 디테일의 진실성을 확보하며 평범하면서 진부하지 않은 감동 코드까지 갖춰 온가족이 함께 웃고 울며 즐길 수 있는 영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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