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소름]이란 데뷔작에서 보이지 않는 공포와 분노를 소름끼치도록 오싹하게 보여줬던 윤종찬 감독은 후속작이 무엇이고 어떻게 나올까 영화계가 관심을 두는 신인 감독입니다. 일제시대 여류 비행사를 다룬 [청연]을 후속작으로 결정한지 5년 가까이 돼서 관객앞에 선보였는데 중간에 제작비 문제 등으로 당초 제작사가 손을 떼고 제작이 지연되는 등 우여곡절이 많았다고 합니다. 또 개봉을 코앞에 두고 모 인터넷 신문에서 여주인공 박경원이 친일파였다는 기사를 실어 때아닌 친일논쟁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1901년 조선의 국운이 기울 무렵 세상에 태어난 박경원(장진영)은 당시 여자로서는 야무지게 하늘을 날겠다는 꿈을 키웁니다. 혈혈단신 일본으로 건너가 고학으로 비행학교를 다니고 어렵사리 조종사 자격증을 따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부잣집 출신의 유학생 한지혁(김주혁)을 만나 사랑을 키워가는데 경원에게는 지혁에 대한 사랑보다는 하늘을 날겠다는 꿈이 더욱 큽니다. 비행실력을 뽐낼 수 있는 전일본 비행선수권 대회를 앞두고 출전이 유력시됐던 박경원은 기베(유민)에게 출전권을 뺏기고 좌절합니다...
영화에 관심을 가지면서 관심만큼 능력이 안따라 주는구나하고 느낄 때는 새로운 작품의 초기단계에서 전체적인 줄거리, 아니 그보다 더 간단한 이야기를 듣고는 영화에 대한 '감'이 좀처럼 잡히지 않다가 나중에 영화를 보고 무릎을 칠 때입니다.(처음에는 절망도 했습니다만 이제는 좀 주제파악을 하고 있습니다.)
가령 '살인의 추억'이 영구미제사건이 되가고 있는 화성 연쇄살인 사건을 다뤘다는 정보를 처음 접하고 범인이 잡히지도 않은 사건을 다뤄서 제대로 영화화가 될까하는 의구심이 컸었지만 정작 극장문을 나설때 '역시...'하는 느낌 말입니다.
3-4년전 '청연'에 대해서 '일제시대 조선인 여류 비행사를 다룬 영화'라는 정보를 접했을때도 이런 의구심이 앞섰습니다. '시대물이면 제작비가 많이 들텐데...' '비행기 나오는 장면은 어떻게 찍을까. 우리나라에는 노하우가 거의 없을텐데...' 등등.
비행기를 통해 꿈을 실현하고 하늘에서 중요한 이야기를 풀어가는 영화답게 비행 장면의 스펙터클과 긴박감은 흠잡을 데가 없을 만큼 세련되고 훌륭합니다. CG를 많이 활용했다고 하지만 어느 장면이 컴퓨터로 합성한 것이고 어느 장면이 실사인지 구분이 가지 않을 만큼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있습니다.
영화에 등장하는 프로펠러 복엽기의 생생한 사운드를 만들기 위해 미국으로 날아가 실제 비행기를 날리며 소리를 담았다고 합니다. 화면과 더불어 소리까지 공을 들인 덕분에 시각과 청각을 함께 조화롭게 만족시켜 줍니다. 그 가운데 비행대회에서 극적인 승리를 거두는 장면의 감동은 영화의 가장 큰 성과입니다.
박경원 역의 장진영은 당시 시대를 앞서 나갔던 여성 선구자 역을 잘 소화합니다. 지금에도 그렇게 예사롭지 않은 비행이라는 꿈을 실현시키기 위해 노력하지만 암울한 시대상황에서 뜻한 대로 잘 흘러가지 않는 현실속에서 고뇌하는 인간의 모습을 잘 보여줍니다. "하늘에서는 일본, 조선이니 남자, 여자 상관 없어서 좋다."거나 애인 한주혁이 경원에게 "비행기 타라. 조선이 너에게 해준 것도 없잖아."하는 대사는 이 영화의 스탠스를 잘 보여줍니다.
군국주의 상황에서 누명을 쓰거나 그토록 꿈꿔왔던 장거리 비행을 실현시킬 수 있는 방법이 일본에 기대는 방법밖에 없다는 답답한 현실속에 주인공을 신성시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연민을 느끼게 합니다.
일부에서 제기되고 있는 친일 논란에 대해 감독은 인터뷰에서 '자신의 꿈을 실현시킬수록 민족에서 멀어지는 비애를 느끼는 개인에 촛점을 맞춘 영화'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영화의 제작의도가 항일독립의식 고취나 친일파 단죄가 아닌 이상 친일행위를 한 인물을 다뤘다고 해서 친일을 옹호하는 영화이고 또 우리가 기피해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영화개봉에 맞춰 영화가 주인공으로 삼은 인물의 친일 행적이 이슈로 다뤄지고, 사실무근인 악성루머(투자 지분에 일본돈이 유입됐다는 등)까지 덧입혀져 논란이 확산되고, 또 거기에 흥분한 일부 네티즌들이 영화안보기 운동을 벌이는 모습을 보면서 영화 한편이 건전한 양식을 가진 대다수 관객들의 민족의식을 흐릴 수 있다고 정말 우려하는 것인지 의구심이 들고 이 시대의 또다른 마녀사냥이 아닌가해서 씁쓸하게 여겨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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