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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중해 문명기 5권-- 모자이크로 읽는 그리스 로마 문명 --고대의 삶과 사랑--
2.이탈리아
1,2,3)로마(Rome) 1,2,3 4,5,6,7)바티칸(Vatican) 8,9,10,11)오스티아(Ostia)1,2,3,4 12)폼페이(Pompeii)--오늘 이야기 13)에르콜라노(Ercolano) 14,15,16,17)나폴리(Napoli) 18,19)팔레르모(Palermo) 20,21,22,23)피아짜 아르메리나(Piazza Armerina)
12)폼페이(Pompe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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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중해 연안 로마 도시 가운데 가장 인상적인 모습으로 기억되는 폼페이(Pompeii). 로마시대 활기찬 국제 무역항에서 79년 베수비오 화산의 대폭발로 한순간에 화산재로 뒤덮인 비극의 도시다. 죽음의 도시로 전락해 버린 지 천 7백년 만에 제 모습을 되찾기 시작한 폼페이는 인류의 역사가 지속되는 한 이집트의 피라미드와 함께 지구촌민들이 가장 찾고 싶어하는 유적지로 기억될 것이다. 신화와 전설, 역사가 뒤엉켜 현실과 가상을 넘나드는 공간으로 탐방객을 이끄는 묘한 마력의 유적지 폼페이는 정녕 살아 숨쉬는 로마의 역사교과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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폼페이. 뒤에 보이는 산이 폼페이를 삼켰던 베수비오. 필자가 서있는 곳은 로마시대 공공행사가 펼쳐지던 포룸. 이탈리아를 방분하는 전세계 탐방객들이 가장 많이 멈춰서 사진을 촬영하는 장소다. ⓒ김문환 |
폼페이는 원래 로마인의 땅이 아니었다. 로마가 티베르강 유역에 처음 모습을 드러내던 B.C 753년 무렵 오스크인들이 폼페이에 살았다. 이어 B.C 6c 그리스인들이 이탈리아 반도 남부에 도시를 만들면서 그리스 문명권에 포함됐다. 그리스 신앙이 도입되고, 그리스식 도시개발이 이뤄졌다. 이어 에트루리아가 잠시 세력을 떨친 뒤 B.C 424년 산악부족인 삼니움족의 지배로 넘어갔다. 삼니움 시절 로마의 동맹도시로 발전하다 반란을 일으킨다. 그러나, B.C 89년 결국, 욱일승천(旭日昇天)하던 로마의 영토로 편입되고 만다. 이탈리아 반도가 처음부터 로마제국이 아니었음을 폼페이의 역사를 통해서도 읽을 수 있다. 로마가 주변의 이민족을 하나하나 정복한 것이다.
로마 아래서 번영을 누리던 폼페이는 79년 비극적인 베수비오 분화(噴火)로 화산재 아래 묻혔다. 폼페이는 물론 주변도시들이 완전히 죽음의 도시로 변했다. 로마시대 손꼽히는 학자로 박물지(博物誌)를 쓴 大플리니우스의 조카이자 양자 小플리니우스는 자신이 목격한 베수비오 분화 과정을 생생한 기록으로 남겼다. 그 덕에 아비규환(阿鼻叫喚)이었던 당시 상황을 짐작해 볼 수 있다. 땅 위의 모든 것을 용암과 화산재가 삼켜버린 이 사건으로 폼페이 인구 2만 여명 가운데 10% 정도가 숨졌을 것으로 고고학자들은 추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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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모자이크--파우노의 집 타블리눔 옆 복도 바닥을 장식하는 새모자이크. 폼페이 ⓒ김문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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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푸스 섹타일--파우노의 집을 오푸스 섹타일. 오푸스 섹타일 너머로 알렉산더와 다리우스 사이에 벌어진 이수스 전투화가 설치돼 있었다. 그 모자이크는 지금 나폴리 박물관에 전시중이다. 폼페이 ⓒ김문환 |
일확천금을 노리는 사람들의 도굴을 떠나 폼페이에 대한 체계적인 발굴은 1748년 시작됐다. 이후 조금씩 검은 화산재를 털고 일어난 폼페이는 전설로만 전해지고, 문헌 속에만 기록돼 있던 자신의 모습을 눈앞의 현실로 되살려 놓았다. 폼페이가 새 생명을 얻으면서 로마제국의 문명상도 더불어 제 모습을 되찾았다. 폼페이를 통해 로마의 도시구조, 생활상을 한눈에 들여다볼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아직도 폼페이 성곽 안의 25% 정도가 미발굴 상태로 남아있다. 발굴은 지금도 현재 진행형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나온 유적과 유물 만으로도 폼페이는 로마문명과 관련해 독보적인 존재가치를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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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푸스 무세움--폼페이 유적 입구에 바로 자리하는 교외목욕탕 분수대에 설치돼 있다. 폼페이 ⓒ김문환 |
우리의 관심사인 모자이크는 그리 많지 않다. 폼페이에서 컬러 테세라 모자이크가 출토된 집은 3군데에 불과하다. 그나마, 발굴한 바닥 모자이크를 박물관으로 옮긴 탓에 현장에서는 주요 작품을 찾을 수 없다. 모자이크의 대명사로 꼽히기도 하는 [알렉산더와 다리우스의 이수스 전투] 모자이크가 나폴리 박물관으로 옮겨진 사례는 대표적이다. 따라서, 로마시대 현장에 설치된 모습 그대로의 바닥 모자이크를 즐기려는 탐방객은 다소 실망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교외 목욕탕등의 분수 모자이크(오푸스 무세움)는 황홀경을 자아낸다. 폼페이를 통해 당시 이탈리아 반도에서 컬러 테세라 모자이크(오푸스 테셀라툼)가 널리 보급된 것은 아닐 것이라는 추론도 가능해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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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 폼페이 비극시인의 집 입구에 그려져 있다. 낯선 사람을 경계하는 날카로운 눈초리가 살아있는 개보다 실감난다. 익살스러우면서도 함부로 넘볼수 없는 분위기다. 여느 가정집에서 언제라도 마주할수 있는 풍경이다. 쇠밧줄로 목을 맨 모습도 눈에 익다. 폼페이 ⓒ김문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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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현관입구 복도인 파우케와 실내정원 아트리움 전체가 흑백 모자이크로 뒤덮여 있다. 앞부분에 쇠줄에 목을 맨 개가 앉아 집을 지킨다. 폼페이 파쿠이오 프로쿨로의 집. ⓒ김문환 |
흑백 모자이크는 곳곳에서 볼 수 있다. 특히, 카베 카넴(CAVE CANEM, 개조심)이라는 문구와 함께 대문 앞에 만든 해학(諧謔)적인 모습의 개 모자이크는 아직도 그 자리에서 아직도 낯선 이방인을 경계한다. 동시에 탐방객을 타임머신에 태운다. 시끌벅적했을 로마 시대 골목으로 안내하며 당시를 떠올릴 수 있도록 상상의 나래를 달아 준다. 로마 생활상의 일면을 가감없이 들여다볼 수 있는 모자이크란 점에서 후한 점수를 줘도 아깝지 않다. 폼페이에 컬러 테세라 모자이크가 드문 것과 달리 흑백 모자이크가 비교적 곳곳에서 발견된 점을 보면 역시 이탈리아 반도가 흑백 모자이크의 고향이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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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로--아테네의 테세우스가 크레타 미노스왕의 미궁으로 잡혀와 반인반우(半人反牛) 미노타우로스를 처치한 미로를 흑백모자이크로 나타냈다. 그리스 로마시대 미로는 즐겨 사용하던 예술소재였다. 폼페이 모자이크의 집. ⓒ김문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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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고래와 삼지창--돌고래와 노는 바다와 항해를 상징한다. 폼페이 카에지 블란디의 집. ⓒ김문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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멧돼지 사냥의 집--기하학 무늬가 정교하게 수놓아져 있다. 그림 가운데, 멧돼지 한마리를 사냥개들이 공격하는 장면을 묘사했다. 폼페이 멧돼지 사냥의 집 ⓒ김문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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