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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중해 문명기 4권-- 도자기로 읽는 트로이 전쟁과 로마의 건국 --글 싣는 순서-- 6장. 오디세이아와 귀환 1. 텔레마코스 2. 목욕 문화 3. 키클로페스 4. 세이렌 5. 스킬라, 칼립소, 키르케 6. 페니키아--오늘 이야기 7. 페넬로페 8. 상봉과 최후 6. 페니키아
◆1. 오디세이아에서 페니키아
미녀들 틈바구니에서 고생(?)하던 오디세우스. 천신만고(千辛萬苦) 끝에 고향 이타카에 도착했다. 그러나, 이타카는 더이상 오디세우스의 터전이 아니었다. 자신이 살던 궁정은 무법자들의 놀이터가 됐다. 자신의 아내 페넬로페와 결혼하기 위해 각지에서 몰려든 한량들이 궁정을 접수한 것. 쿠데타 계엄군도 아니고... 이들은 오디세우스의 재산을 마음대로 꺼내서 먹고 마시며 페넬로페의 관심을 살만한 발림말만 늘어놓기에 바빴다. 일부는 결혼을 피하려는 페넬로페에게 노골적으로 불만을 드러내며 빨리 한사람을 고르라고 압력까지 넣고 있었다. 아! 파렴치한(破廉恥漢)은 어디든지 있기 마련. 페넬로페에게 구혼하러 왔다면서 페넬로페의 하녀들과 놀아나는 축도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오디세우스는 신변에 위협을 느껴 자신의 집에 들어가지 못했다. 대신 멀리 떨어진 산중의 목장에 신분을 숨긴 채 기거하게 된다. 오디세우스의 목장이건만 목장지기는 20년 만에 돌아온 주인이 누군지도 몰라본다. 오디세우스가 목장 돼지치기와 대화를 나누는데... 여기서 페니키아(Phoenicia)가 언급된다. 돼지치기의 회상 속에 등장하는 페니키아. B.C 8c 호메로스라고 하는 작가, 혹은 그리스인들이 페니키아라는 나라를 어떤 시각으로 바라 보았는지 알 수 있도록 해주는 대목이다. 우선 페니키아를 '바다의 왕자'라고 표현한다. 동시에 비싼 물건을 팔아 돈을 많이 버는 상인들로 그린다. 그러나, 돈벌이에만 눈이 멀었을 뿐 도덕과 신의가 없는 장사치로 비하한다. 일례. 페니키아 상인들은 노예로 팔려 온 같은 고향 출신 여인을 꾀어내 정을 통하고, 그녀를 고국 페니키아(시돈)로 데려가 줄 것처럼 약속한다. 대가로 비싼 배삯을 챙긴 뒤에는 여인을 바다에 밀어 넣어 죽이는 해적같은 사람들. 한마디로 부정적인 이미지다. 페니키아가 과연 그런 나라일까?
◆2. 페니키아는?
한때 서양 고대사를 주름잡던 세력들. 쉽게 이집트나 그리스, 로마라고 하면 지금도 구체적인 영상이 손에 잡힌다. 이집트는 피라미드와 함께 아직도 같은 이름으로 존재하며 가끔 우리랑 공도 차고, 그리스 는 파르테논 신전 아래서 올림픽도 열고, 로마 역시 뒤를 이은 이탈리아가 거대한 콜로세움 옆에서 세계 최고수준의 축구리그를 운영한다. 실체가 존재한다. 그러나, 페니키아는 조금 다르다. 상인들의 나라, 알파벳을 만든 창시자, 카르타고를 세운 민족... 역사 속에 화려한 궤적을 남기지만, 더 이상 잔상(殘像)이 없다. 후예들이 역사적인 실체로 국가를 이어주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16c 부터 20c 초까지 중국과 동아시아를 지배했던 3백년 강대국. 만주족의 청나라 역시 비슷한 맥락이다. 지금은 만주어를 쓰는 사람조차 없으니...
페니키아는 오늘날 레바논과 시리아의 지중해 연안에 퍼져 살았던 도시국가 연합체를 가리킨다. 연합체라는 말도 적절하지 않다. 정치적인 단일 조직으로 통일된 적 없이 오늘날 시리아의 우가리트, 레바논의 비블로스, 시돈, 티레 같은 항구에 각자의 정치조직인 도시국가를 이루며 살았다. 마치 그리스와 같았다. 고대 그리스 역시 지금과 같은 단일국가가 존재해 본적이 단 한 번도 없다. 오늘날 그리스 영토와 에게해, 지중해 연안 각지에 아테네와 스파르타, 테베, 시라쿠사등 수백개의 도시국가가 들어서 서로 경쟁하거나 협력하면서 살았다. 공통점이 있다면 같은 말을 사용하며 같은 신앙과 민속을 가진 문화적인 공동체였을 뿐이다. 페니키아 역시 혈연의 뿌리가 같은 도시국가들이 같은 말과 종교를 떠받들며 문화적 공동체를 이뤘을 뿐 정치적으로는 별개의 운명체였다.
인종적으로 셈족인 페니키아는 B.C 3천년 전부터 이집트와 교역을 가졌다고 기록된다. B.C 2천년 민족이동의 영향으로 혼란이 생겼지만, B.C 15c-B.C 13c 우가리트를 중심으로 번영을 누리며 알파벳을 고안해 낸 것으로 여겨진다. 이후 이집트와 히타이트의 세력 아래 놓이기도 하고 B.C 13c에는 이른바 지중해 문명의 수수께끼, '바다 민족(Sea People)'의 손에 파괴되는등 시련을 겪는다. 그러나, 시돈, 티레를 중심으로 지중해와 북아프리카 각지에 식민도시를 만들며 교역을 벌여 번영을 되찾았다. 그러다가 쇠퇴의 시기가 찾아오는데... B.C 9c 이후 메소포타미아의 강자 앗시리아에 복속되면서 페니키아는 세력을 잃고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오늘날 레바논에 가보면 비옥한 해안가 바로 옆에 깍아지르듯 솟은 거대한 산악지대를 만나 적잖이 놀란다. 속초 해변에서 설악산을 바라보는 것 같다. 자동차로 숨을 헐떡이며 구비구비 돌아 험준한 산을 넘으면, 이번에는 설악산과 달리 중동 특유의 황량한 사막지대가 펼쳐진다. 이런 지역을 터전 삼고 있던 페니키아인들은 무엇을 생계수단으로 삼았을까? 먹고 살게 마땅치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일찍부터 나라 밖으로 나가 장사를 할 수 밖에. 페니키아에는 이 위대한 모험에 나서도 좋은 2가지 조건이 있었다. 먼저, 험준한 산맥에 무성하게 자라는 양질의 삼나무(Cedar). 튼튼한 배를 만들어 바다로 나갈 수 있는 천혜의 자원이었다. 배를 타고 나가면 그만인가? 그렇지 않다. 배에 삼나무를 싣고 외국으로 나가 신전이나 궁궐용 목재로 팔았다. 페니키아를 있게 만들어준 조건은 삼나무였던 것이다. 페니키아가 존재했던 지역 레바논은 오늘날도 국기의 바탕에 삼나무를 그려 넣어 자연이 준 선물을 기린다.
물론 해상강국이 되기까지는 지중해안 특유의 온화한 기후에 항구입지가 좋았다는 점도 무시할 수 없다. 메소포타미아, 히타이트, 이집트를 연결하며 바다 건너 지중해 전역 어디든 갈 수 있는 중계무역지로서 탁월한 조건을 갖췄던 것이다. 그렇지만, 무엇보다 모험을 두려워하지 않는 진취적인 기상이 없었다면 불가능 했을 게 틀림없다. 지리적으로 페니키아인들이 다닌 지역은 유적과 유물을 통해 확인할 때 지중해 전역은 물론 지브롤터 해협 건너 대서양 연안 이베리아 반도와 영국은 물론 서아프리카 일원까지 갔던 것으로 추정된다. 쉽지 않은 거리다. 선박 제조술, 특히 항해술에는 천문 지식이 필수적인데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성과물을 흡수한 덕분으로 추정된다.
◆3. 문자의 발달
페니키아인이 인류 역사에 남긴 가장 위대한 업적은 아무래도 알파벳(Alphabet)의 발명. 그러나, 페니키아 문자가 문자의 시원(始源)은 아니다. 페니키아 문자를 있게 만들어 준 문자 발달사를 간단히 정리해 보자. 문자의 발명으로 치면 지금까지 발굴된 유물을 근거로 할 때 기원전 3천 5백년 쯤 메소포타미아가 남상(濫觴)이다. 유프라테스와 티그리스강 사이 메소포타미아 남부 우룩(Uruk)에 도시를 만들었던 수메르인들이 그 주인공. 이들은 진흙 점토판에 끝이 뾰족한 도구로 그림을 새겨 의사를 표시하는 그림문자(Pictograph)를 고안해 냈다. 그림문자는 원통으로 생긴 도장(圓筒印章, Cylinder seal)에 새겨 사용됐다. 신전을 중심으로 강력한 왕권을 행사하던 도시국가의 창조물 그림문자와 인장은 왕의 신성한 권위를 상징하는 한 수단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그림문자를 거쳐 문자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는 기호 형태의 설형문자(Cuneiform, 쐐기를 뜻하는 라틴어 'Cuneus'에서 따와 '쐐기문자'라고도 부름)가 나왔다. 설형문자의 출현은 새로운 문명(Civilization)의 탄생 그자체였다. 1956년 '역사는 수메르에서 시작됐다'(History Begins at Sumer)는 책을 펴낸 미국의 고고학자 새무얼 크래머의 말처럼 전세계 박물관에 소장돼 있는 메소포타미아 점토판 문서들을 조사한 결과 인류문명(특히 서양문명)의 다양한 특징들이 대부분 수메르에 기원을 두고 있음이 밝혀졌다. 낙원, 창조, 대홍수 등에 관련된 기독교적 신화는 물론, 학교, 의회, 법전 등 서양 고대 문명을 특징 지우는 사회제도들이 이미 수메르의 설형문자 점토판에 담겨 있다. 그러니 수메르, 더 정확히 수메르의 설형문자가 인류문명의 중요한 근간이 됐음을 이해하기는 어렵지 않다.
수메르의 설형문자는 아카드에 이어 바빌로니아, 앗시리아를 거쳐 히타이트와 페르시아까지 전해져 3천년 넘게 오리엔트, 오늘날 개념으로 중동 지역의 공용문자로 확고한 자리를 지켰다. 그러나, 알렉산더의 원정으로 설형문자의 마지막 수호세력인 페르시아 제국이 무너지면서 그리스 문자에 밀리다 마침내 1c 자취를 감췄다. B.C 10c 고대 그리스 문자에서 시작되는 오늘날 서양 언어의 알파벳이 지금 21c 까지를 합쳐 봐야 겨우 3천년이다. 그러니까, 호메로스부터 지금까지의 엄청난 시간. 그 기간만큼 중동의 설형문자는 문명의 주요 핵으로 사용된 것이다. 이점을 직시해야 잠시 힘을 얻어 우쭐대는 영어권 아메리카 연합국의 준동을 바르게 이해하는데 도움을 얻는다.
사라졌던 설형문자는 유럽에서 고고학의 시기이던 17c-18c를 거치면서 서서히 서유럽 사회에 알려지고 이를 해석하기 위한 다양한 시도들이 줄을 이었다. 서유럽에 설형문자를 처음 소개한 이는 이탈리아의 델라 발레. 1621년 페르시아의 수도였던 페르세폴리스를 방문해 글자를 스케치로 남겨 전했다. 덴마크의 니버는 1760년 세 종류의 형태로 적힌 페르세폴리스의 설형문자를 체계적으로 옮겨 적고 탁본도 떴다. 독일의 그로테펜트는 니버의 연구결과를 바탕으로 비문을 해독하면서 42개의 기본글자를 확인해 냈다. 쐐기문자 연구는 19c 들면서 더욱 활기를 띠는데... 영국 장교 롤린슨은 이란땅에 파견됐다가 1835년 '베히스툰'이라는 지역의 절벽에 있는 거대한 비문에 눈길을 돌렸다. 높이 5백m의 절벽 한가운데. 밑에서부터 1백m 올라간 지점에 높이 7m,너비 18m 규모로 B.C 520년 새겨진 다리우스 대왕 전승비문이었다. 다리우스 대왕 아래로 1천 2백 줄이 넘게 새겨진 글자는 마침내 1850년 해석돼 쐐기문자의 비밀을 캐는 중요한 전기를 마련했다. 이어 1857년 영국 왕립 아시아 학회가 4명의 다른 학자들에게 '라쌈 실린더'라고 부르는 쐐기문자 원본을 보내 해석을 의뢰한 결과 롤린슨을 비롯한 4명의 학자가 같은 답을 냄으로써 쐐기문자가 신비에서 일상으로 다시 돌아오는 계기를 만들었다.
고대 오리엔트에서 아프리카로 내려오면 설형문자 외에 또다른 신비의 문자, 이집트의 히에로글리프(Hieroglyph)가 기다린다. 설형문자와 함께 고대 문자사의 쌍벽(雙壁)을 이루는 히에로글리프는 그리스어로 '신성하다,(Hieros)'와 '새기다(Gluphein)'가 합쳐진 말이다. 히에로글리프를 다른 말로 '신성문자(神聖文字)'라고 부르는 이유는 이집트인들이 이 문자를 새의 머리를 가진 신 '토트'가 전해준 것으로 여기며 그를 지식과 학예의 신으로 떠받든 데 기인한다. 히에로글리프의 등장시기는 B.C 3천5백년전 쯤으로 설형문자가 태어난 시기와 비슷하다. 고대 이집트인은 점토판이 아닌 돌에 문자를 새기다 파피루스 종이에 잉크로 썼다. 사물의 모양을 본 뜬 상형문자 히에로글리프 역시 알렉산더의 원정이후 그리스어와 병용되며 세를 잃다가 로마시대 1c 종말을 고했다. 미지의 영역으로 남아있던 히에로글리프는 1799년 나폴레옹 원정대가 이집트의 지중해 연안 로제타에서 발견한 비석 '로제타 스톤'을 1822년 상뽈리옹이 해독해 냄으로써 고대의 신비를 푸는 열쇠로 역사무대에 다시 화려하게 등장했다. 3천년 이상 사용되는 문자, 그것도 아직 사용되는 문자는 그리스어에서 시작되는 알파벳과 중국의 한자(漢子)다. 한자는 B.C 천 4백년전 상(商)나라 흔히 은(殷)나라 시대 고안된 것으로 보인다. 당시 갑골(甲骨), 즉 거북의 등껍질이나 소의 뼈에 새겨진 문자인데 고대 그리스 문자가 형성된 B.C 천년 경 보다 4백여년 앞선다. 대단한 일이다.
◆4. 페니키아 문자
페니키아 문자를 얘기하려면 페니키아 계열의 우가리트인을 먼저 봐야 한다. 시리아의 시골마을 우가리트(Ugarit). 택시를 대절해 시리아의 지중해 연안 고대 유적지들을 날아다니듯 주마간산식으로 훑고 다니다 저녁 무렵 도착한 우가리트. 황량한 유적지 우가리트는 1929년 프랑스 고고학자 클로드 셰페르가 발굴한 결과 B.C 4천년경부터 유물이 나오는데... B.C 15c 쯤으로 추정되는 시기의 지층에서 전혀 새로운 문자가 나왔다. 여기서 잠깐. 우가리트 문자를 알파벳의 기원으로 삼는다고 해서 기존의 알파벳을 생각하면 안된다. 우가리트 문자는 형태상 쐐기문자다. 그러나, 새로운 방법. 즉, 기존의 쐐기 문자나 신성문자가 소리를 내려면 여러 부호를 합쳐야 하는 것과 달리 글자 하나하나에 음가(音價)를 부여한 표음문자라는 점에서 전혀 새로운 진보였다.
문자사에 신기원을 연 우가리트 문자. 우가리트의 문자는 이웃한 페니키아 도시로 상속됐다. 우가리트에서 시작된 독립 음가의 문자가 페니키아에서 독립적인 새로운 형태의 알파벳으로 문자혁명의 대미를 장식하게 되는데... 페니키아인들은 글자 하나마다 음가를 가지면서도 동시에 쐐기문자가 아닌 전혀 다른 표기방법을 찾아냈다. 상형문자의 두음(頭音)만을 음가(音價)로 삼는데, 쉽게 알레프(aleph, 소)에서 A, 베트(beth, 집)에서 B가 만들어졌다. 알파벳이라는 명칭도 페니키아 문자를 모방한 그리스 문자의 첫 두 글자인 알파(α)와 베타(β)를 합성해 만든 말이다.
1900년대 초 시나이 반도에서 발견된 시나이 문자는 자음만을 표기한 이집트 상형문자를 연상시키지만, 1929년 페니키아 도시 비블로스에서 발견된 76자의 페니키아 문자는 글자 모양에서 오늘날 유럽 언어의 알파벳과 비슷하다. 이를 기준으로 삼으면 대략 B.C 17c-B.C 15c 페니키아 알파벳이 고안된 것으로 추정된다. 1923년 비블로스에서 발견된 아히람왕 석관의 글자는 B.C 11c 것으로 여겨지는데, 완성된 페니키아 문자의 전형으로 꼽힌다. 22글자의 '페니키아 알파벳'을 만들어낸 페니키아 인들은 해상 상업활동을 위해 지중해 각지로 다니며 자신들의 문자도 전했다.
[오디세이아]에 언급 되듯이 페니키아인들은 지중해 전역을 누비는 과정에서 그리스인과도 접촉했다. 그리스인들은 페니키아인의 발명품을 이어받아 더욱 발전시키는 재주를 갖고 있었다. 그리스인은 페니키아 문자의 우수성에 탄복하고 이를 받아들였다. 문제는 페니키아 문자가 자음만 표기했다는 점. 그래서, 그리스인들은 한발 더 나가 자신들의 모음도 표기하는 창의성을 발휘했다. 페니키아 문자의 자음에 몇 가지 모음(α, ε, η, ι, ο)을 만들고 여기에 ν(입실론)과 ω(오메가)를 추가하여 24자의 그리스어 알파벳을 선보였다. 이렇게 만들어진 그리스어로 B.C 8c 호메로스는 [일리아드]를 비롯한 작품을 쓸 수 있었고, B.C 5c 소크라테스라고 찬란한 지식인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그리스인 역시 페니키아인처럼 지중해 전역으로 나갔다. 교역할 상품과 함께 그들의 발명품 그리스문자도 함께 싣고 갔음은 물론이다. 그리스문자는 이탈리아 반도의 에트루리아인에게 전파됐다. 에트루리아 문자는 미개 상태에 있던 이탈리아 반도 중심부 라티움 지방의 로마인들을 자극시켰다. 라틴 문자는 에트루리아 문자라는 프리즘을 거쳐 완성됐다. 로마제국의 득세와 함께 라틴어와 라틴문자는 B.C 1c 말 이후 그리스어와 그리스 문자를 몰아내고 지중해 전역 공용이 됐다. 물론 동지중해에서는 여전히 그리스어와 문자가 라틴 문자와 병존하며, 중세 천년 동로마(비잔틴) 제국을 통해 살아 남았다. 또, 동로마 제국의 영향을 받은 러시아등 동유럽 각국의 슬라브족들이 그리스 문자의 영향아래 키릴 문자(러시아)등 슬라브계 여러 문자를 만들었다. 그러나, 서유럽 각국에서는 B.C 5c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면서 각국이 로마시대 라틴문자를 근간으로 문자를 만들어 내 라틴문자가 오늘날 서유럽 각국 알파벳의 기원이 됐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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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 페니키아
BR BR 지중해 문명기 4권BR 도자기로 읽는 트로이 전쟁과 로마의 건국 글 싣는 순서 6장. 오디세이아와 귀환 BR 1. 텔레마코스 2. 목욕 문화 3. 키클로페스 4. 세이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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