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지중해 문명기 4권-- --글 싣는 순서--
1. 트로이 연합군 2. 고대 그리스의 전투 3. 헥토르 1--삶과 죽음 4. 헥토르 2--시신훼손과 신들의 분노 5. 헥토르 3--시신송환과 장례 6. 아에네아스 7. 파리스 1 8. 파리스 2 9. 트로이로스 10. 펜테질레아와 아마존 11. 멤논과 이디오피아 12. 에오스 13. 사르페돈 14. 돌론--오늘 이야기 15. 제우스, 아프로디테, 아레스, 아폴론
14. 돌론
◆1. 007과 이언 플레밍 007 영화 시리즈. 숀 코네리에서 로저 무어, 피어스 브로스넌으로 이어지며 활약하는 영국 해외 정보국 M16의 가상 스파이 제임스 본드에게 붙인 이름 [007]. [00]은 해외 정부국 요원에게 부여하는 살인면허요, 7은 1부터 9까지 요원 가운데 한명을 가리킨다. 이언 플레밍 원작의 소설에서는 나머지 요원이 모두 암살 당하고 7과 9 두명만이 살아 남은 것으로 그려진다. 아무튼, 뛰어난 머리와 기민한 판단력, 빼어난 무술 솜씨, 나아가 각종 첨단 장비를 마음대로 다루며 정보를 모아오고 공작 임무를 수행하는 제임스 본드 007은 한 시대를 풍미했다. 할리우드 영화가 화끈한 섹스, 대형 폭력, 대량 살상의 초대형 스펙타클로 치닫기 전 소박한 차원의 성애와 폭력, 살상을 담으면서도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탄탄한 구성으로 최고의 인기를 누렸던 영화다.
1962년 숀코네리 주연으로 처음 시작돼 2002년 피어스 브로스넌 작품까지 20편이 이어지지만, 80년대까지의 작품은 지금 와서 보면 액션의 차원이 좀 유치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역동성과 긴박한 스릴이 떨어져 보인다. 그러나, 왠지 그 정도의 액션만으로도 숨막히며 극장 객석을 땀으로 적시던 7,80년대. 그 시절이 훨씬 그리운 것은 필자만의 생각일까? 1977년 디스코 열기를 가져온 죤 트라볼타의 [토요일 밤의 열기]속 비지스의 감미롭고 열정적인 리듬이 아니어도 콧수염 배철수가 진행하는 토요일 심야방송 [7080 콘서트]의 노래에서 추억의 한 페이지로 빠져드는 세대 대부분의 감정이 아닐까 싶다. 실제 영국 해외 정보국 소속 장교로 일하다 1950년대 소설을 통해 제임스 본드 007이라는 캐릭터를 창조해 낸 뒤 1968년 숨을 거둔 원작자 이언 플레밍 역시 살아 있다면 같은 생각일 것이다.
트로이 전쟁에도 첩보전이 있었다. 트로이 측 주인공은 돌론. 아카이아측 주인공은 오디세우스와 디오메데스다. 결론부터 말하면 아카이아측 첩보요원 오디세우스는 007 시리즈에서 위기일발의 위험을 겪으면서도 언제나 모든 난관을 기발하게 극복해 승리를 거머쥐는 제임스 본드다. 그렇다면 돌론은? 나름대로 머리를 굴려 세계를 손에 넣겠다며 완전 범죄를 노리지만, 언제나 제임스 본드에게 당해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는 악당일수 밖에 없다. 제임스 본드를 영웅화 하는 작가가 이언 플레밍 이라면 오디세우스를 미화하는 작가는 호메로스다. 그러니, 호메로스 원작의 [일리아드]에서 돌론의 운명은 이미 정해진 것이나 다름 없다.
◆2. 돌론과 호메로스 첩보전의 시작은 헥토르가 이끄는 트로이 진영의 작전회의. 헥토르가 입을 열었다. "전차 1대와 트로이 진영에서 가장 빠른 말 2필을 내어 줄 것이다. 두마리 말이 끄는 전차를 타고 적진 아카이아 연합군에 잠입하라. 그래서 아카이아 연합군이 우리진영을 감시하며 계속 공격을 준비하는지, 아니면 오랜 전쟁에 지쳐 고국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는지 염탐해 오너라. 이 임무를 잘 수행해 내는 자에게 큰 상을 내리는 것은 물론 자손 대대로 광영을 누리도록 하겠다. 누구 용감한 자 없는가? 트로이와 트로이를 돕기 위해 각국에서 모인 동지들의 생명을 구할 이 첩보전에 자진해 나설 용사?" 조용히 시작된 헥토르의 목청이 갑자기 높아지며 급정거 하는 순간.
헥토르의 음성이 메아리가 돼 울려퍼지기도 전에 한 남자가 손을 번쩍 들었다. 트로이에 살고 있는 유메데스의 아들 돌론이 분명했다. "돌론이라고 합니다. 부족하지만 제가 임무를 맡아 보겠습니다. 트로이 시민과 당신 헥토르 그리고 트로이 동맹군을 실망시키지 않도록 최선을 다 할테니 맡겨 주십시오. 대신 약속을 하나 해 주셨으면 합니다. 청동으로 장식한 전차 1대와 나중에 펠레우스의 아들 아킬레스가 타고 다니는 말을 저에게 상으로 준다고 말입니다. 그러면 신명을 다 바쳐 임무를 마치겠습니다." 헥토르는 왕을 상징하는 신성한 홀을 들어 그 자리에서 맹세의 말로 답했다. "약속하지." 제우스의 이름을 걸고 그렇게 해주겠노라고... 그러나, 지킬 수 있을 지는 누구도 확신하지 못했다. 아킬레스를 과연 죽일 수 있을지 아무도 자신있게 말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또 죽인다 해도 그의 말을 탐내는 자가 많아 약조가 뒤집힐 것이라는 점에 대해서도 누구 하나 의심의 눈길을 보내지 않았다. 하지만, 일단 일은 그렇게 시작됐다.
돌론이 출발했다. 염탐꾼 그러니까 첩보원으로 활약하기 위해 떠나는 그의 차림을 들여다 보자. 먼저 늑대 가죽으로 만든 회색 외투를 푹 뒤집어 썼다. 족제비 가죽으로 만든 위장용 모자도 깊게 눌러 얼굴을 가렸다. 길에서 적에게 들키지 않기 위한 은폐용 보호장치였다. 은폐만으로 첩보전을 수행할 수는 없는 법. 위기가 닥쳤을 때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무기도 필요했다. 우선 큰 활을 어깨에 메고, 화살통을 둘렀다. 날이 잘 선 적당한 크기의 칼을 허리춤에 차고, 번쩍이는 창도 하나 집어 들었다. 그리고는 헥토르가 내려 준 전차에 올랐다. 전차는 빠른 말 2마리가 몰았다. 기세등등. 돌론은 트로이를 떠나 아카이아 진영으로 달려갔다. 달려나가는 폼새로는 제법 큰 성과를 얻어올 듯이 보였다. 그러나 그의 운명은 이언 플레밍 원작의 007 시리즈에서 악당의 모습이라 했다. 나름대로 잘 모의해 작전을 펴지만 결국은 제임스 본드에게 당하고 마는...
돌론이 아카이아 진영으로 들어올 무렵. 아카이아 진영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었을까? 방비를 소홀히 한채 쉬고 있었을까? 아니면 철통같은 대비를 하고 있었을까? 아카이아 진영에서도 똑같은 회의가 열렸다. 그리고, 트로이 진영에서 돌론이 맡은 역할을 아카이아 진영에서는 오디세우스와 기민한 디오메데스가 맡았다. 둘 역시 트로이 진영을 향해 달려 오고 있던 참이다. 같은 임무를 띤 돌론과 오디세우스, 디오메데스. 세사람은 곧 만날 운명이었고, 두팀 가운데 어느 한쪽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는 시나리오가 이미 신들의 세계에서는 짜여져 있었다.
007에서 언제나 그렇듯이 악당은 자신만이 작전을 수행하는 줄 착각하고 앞뒤를 돌아 보지 않는다. 그러나, 007은 늘 자신의 주변을 경계하며 새로운 돌발상황에 대비한다. 돌론은 힘차게 전차를 몰아 아카이아 진영에 빨리 당도할 생각에만 젖어 있었다. 아카이아 진영에서도 첩보전을 위해 스파이가 나온다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했다. 그러나, 오디세우스와 디오메데스는 달랐다. 트로이 진영으로 오는 도중 경계를 게을리 하지 않고 있었다. 한밤중 앞에서 누군가 전차를 몰고 달려오는 장면에 긴장했다. 오디세우스와 디오메데스는 일단 길에 숨어 돌론이 지나가도록 내버려 둔 다음 뒤에서 돌론을 덮쳐 잡았다. 처음 돌론은 오디세우스와 디오메데스가 같은 편 트로이 연합군 군사인줄 알고 방심하다 뒤늦게 아카이아 연합군 군사임을 알고 전속력을 내 도망갔으나, 결국 잡히고 말았다.
◆3. 첩보전의 희생양 돌론 디오메데스와 오디세우스의 당당한 위용과 쩌렁 울리는 협박에 돌론은 이미 얼어 붙은지 오래였다. 트로이 진영을 떠나올 때 보였던 호기는 언제 있기라도 했냐는 듯 사라졌다. 그런 돌론 앞에서 오디세우스가 천둥같은 소리로 입을 열었다. "여봐라. 너는 대체 누구냐. 한밤중에 왜 네 진영을 나와 우리진영으로 오느냐. 염탐꾼이냐, 시체 도둑이냐. 바른대로 대렸다. 그렇지 않으면 목숨을 보전치 못 할 것이다." 겁먹은 돌론이 간신히 입을 열었다. "살려 주십시오. 저는 재물이 많답니다. 저를 돌려 보내 주시면 금은 보화를 보상금으로 드리겠습니다. 우리 아버지가 저를 위해 엄청난 돈을 내실 것이니 죽이지만 말아 주십시오. 헥트로가 아킬레스의 말을 준다는 말에 속아 잠시 생각을 잘못했으니 용서해 주십시오" 호메로스가 일리아드에 적은 내용은 대략 이런 말이다.
오디세우스가 말을 받았다. "이런 아둔한 자. 헥토르의 말을 믿다니. 그래 헥토르의 말을 듣고 아카이아 진영을 염탐하러 왔다는 말이지? 우리가 철수할지 아니면 공격할지 알아내러. 네 이몸. 죽어 마땅한지고. 네놈이 살 방도는 딱 하나다. 헥토르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이실직고 하거라. 아카이아 진영을 추가로 공격할 심산인지 아니면 성 안으로 퇴각해 들어갈 것인지. 바르게 아뢰면 목숨만은 살려 줄 것이다." 어리석은 돌론. 사실대로 말한다. "헥토르는 작전 회의 중이구요. 지금 바다쪽으로 카리아, 펠라스기 병사들이 진을 치고 있습니다. 미시아와 프리기아 병사들은 가장자리에 진을 쳤구요. 이민족들은 보초를 서지 않고 잠을 잡니다. 보초는 트로이 병사들이 서 주지요. 가장 최근에 온 트라키아 병사들은 레수스 왕이 지휘하고 있는데, 레수스는 빛처럼 빠른 말을 가지고 있답니다. 트로이 진영으로 가보시면 모두 확인하실 수 있는 내용입니다." 염탐하러 왔다가 거꾸로 정보를 다 토해 놓고 만 돌론. 그에게 신은 더 살아갈 기회를 줄 것인가?
전쟁이란 참 잔혹한 짓이다. 살고자 모든 것을 털어놨던 돌론의 운명은 그의 희망과 정 반대로 돌아갔다. 잔혹하기로 소문난 디오메데스가 그를 살려둘 리 없었다. "돌론. 멍청한 놈. 네가 준 정보는 고맙다만, 네목숨을 구해주지는 못할 것이다. 돈을 받고 너를 풀어 줄 수도 있지만, 그렇다면 너같이 약빠른 놈은 헥토르에게 충성하기 위해 다시 염탐꾼이 돼 아카이아 진영을 노릴 것이다. 그러니 너를 살려둘 수 없구나. 이만 생을 마감하거라." 깜짝 놀라 다시 생명의 구원을 읍소하려는 돌론의 목에 디오메데스의 날카로운 칼이 떨어졌다. 돌론은 그자리에 널부러졌다. 힘줄이 남아 목이 덜렁거리자 디오메데스는 다시 한번 칼을 내리쳤다. 그러자 돌론의 머리가 툭 떨어져 나가 흙먼지 속으로 굴렀다. 그렇게 돌론과 디오메데스, 오디세우스의 첩보전. 아니 트로이와 아카이아 연합군의 첩보전은 그렇게 끝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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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 돌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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