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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 알렉산더의 자취를 따라 2

지중해 문명기 4권BR 도자기로 읽는 트로이 전쟁과 로마의 건국BR 글 싣는 순서 3장. 트로이 전쟁의 전개 1(아카이아 연합군)&nsp; 1. 헬레네 송환 협상 2,3,4,5,6,7. 아킬레

- 지중해 문명기 4권--


도자기로 읽는
트로이 전쟁과 로마의 건국

---글 싣는 순서--


3장. 트로이 전쟁의 전개 1(
아카이아 연합군)
 

1. 헬레네 송환 협상

2,3,4,5,6,7. 아킬레스 1.성장, 2.참전,3.사랑,4.브리세이스,5.헥토르와 대결,6.죽음

8. 고대 그리스의 애정사

9. 파트로클로스

10,11,12,13. 올림픽 1,2,3,4

14. 大아이아스

15. 그리스, 직접 민주주의

16,17,18 민주주의를 이끈 사람들 1,2,3

19. 중우정치와 민주정치

20. 고대 민주주의와 현대민주주의

21. 미국 민주주의의 현실

22. 오디세우스

23. 디오메데스, 小아이아스

24,25 네오프톨레모스, 필록테테스

26, 27,28,29,30,31,32,33,34,35,36 알렉산더와 아킬레스 1,2,3,4,5,6,7,8,9,10,11

37,38,39.알렉산더의 자취를 따라 1,2,3--오늘 이야기

40. 테티스, 헤파이스토스, 아테나

 

38. 알렉산더의 자취를 따라 2

 

지도. B.C 334년 그리스 본토 펠라에서 페르시아 원정을 시작한 알렉산더의 궤적을 직접 지도로 그려봤다. 손작업이다 보니 도시의 위치가 다소 정밀하지 않을 수 있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알렉산더는 흑해와 지중해를 가르는 헬레스폰트(다다넬즈)해협을 건넌 뒤 트로이에 들러 제를 올렸다. 이어 페르가몬, 에페스등 이오니아 지방과 할리카르나소스, 이수스를 거쳐 티레, 아코등 옛 페니키아 지역의 도시들을 점령했다. 나일강의 멤피스, 알렉산드리아등 이집트를 손에 넣은 뒤 다시 북으로 올라와 과가멜라 전투를 치르고, 바빌론, 수사, 페르세폴리스등 페르시아 제국의 심장부들을 접수했다. 이어 페르시아의 동쪽 변방 소그디아나, 박트리아, 간다라 지방을 공략한 뒤 인더스 강 건너 강력한 인도의 코끼리 부대와 격전을 치렀다. 이후 퇴각을 결정해 인더스강을 따라 남하해 인도양에 닿았다. 서쪽 게드로시아 사막을 가로질러 파사르가드에 돌아온 때가 B.C 324년. 무려 10년이 넘는 대장정이었다. 수사에서 B.C 324년 합동 결혼식을 치르고 이듬해 B.C 323년 아라비아와 카르타고, 로마의 원정을 앞두고 제국의 중심부이자 수도 바빌론에서 숨을 거뒀다.


◆ 8. 밀레토스, 프리에네, --B.C 334년

 

밀레토스. 서양학문의 태두로 꼽히는 탈레스의 고향. 알렉산더는 혈전을 치르고 밀레토스를 점령했다. ⓒ김문환

 

에페스 남쪽에 위치한 밀레토스. 알렉산더가 차지할 때는 항구 도시였지만 지금은 해안선이 9km 밖으로

프리에네. 알렉산더는 밀레토스를 함락시킬 때 프리에네를 병영으로 삼았다. 이오니아 양식의 프리에네 신전 잔해. 프리에네에는 직사각형으로 생긴 의사당 보울레오테리온이 원형대로 남아있다. ⓒ김문환

밀려나 육지로 변했다. 밀레토스는 미케네 문명을 멸망시킨 도리아인들이 내습해 왔을 때 그리스 본토에서 쫓겨난 사람들이 건설한 도시로 추정된다. 에페스등과 마찬가지로 B.C 8-B.C 7c 무역기지로 크게 번영했다. 밀레토스 사람들은 흑해나 지중해 각지로 퍼져 식민도시를 여러 군데 만든 것으로 유명하다. 그리스 고전에 등장하는 나일강 삼각주의 나우크라티스 역시 이때 밀레토스인들이 건설한 무역도시다. 경제가 번성하니 학문도 크게 발전할 수 밖에.

 

아직 그리스 본토에서 소크라테스도 나오기 훨씬 전, 그리스 문명권 학문의 중심지는 밀레토스였다. 알렉산더가 대군을 이끌고 도착하기 2백90여년 전 태어난 탈레스는 이집트 유학에서 얻은 이집트와 바빌로니아의 수학, 천문학 지식을 바탕으로 B.C 585년 일식을 예언할 정도였다. 만물의 근원이 물이라고 설파했던 탈레스가 사색에 잠겨 거닐었을 밀레토스에는 탈레스 외에도 그의 제자 아낙시만드로스, 아낙시메네스등 우주만물의 근본원리를 설명하려는 학자들이 넘쳐났다. 밀레토스 학파라고 불리는 사람들이다. 후대 아테네에서 발전한 사변철학과 구분되는 이런 자연철학적 전통은 나중에 헬레니즘 시대 이집트로 전해져 학문 발전에 크게 이바지했다.

 

사진은 연극 공연이 펼쳐졌을 웅장한 극장이다. 극장은 로마시대 원형경기장으로 개조됐는데, 검투 경기를 조각해 놓은 유물을 경기장에서 아직도 확인할 수 있다. 그리스 시절 배가 들어와 떠들썩 했을 항구 근처 시장터를 포함한 아고라도 그대로 남아있다. 길고 곧게 뻗은 포장도로등은 밀레토스가 번영을 누렸던 도시임을 웅변해 준다. 알렉산더는 당시 페르시아 지배아래 있던 밀레토스를 치열한 전투 끝에 함락시켰다. 밀레토스가 농성하면서 저항하자 알렉산더는 잠시 프리에네를 병영으로 삼았다. 오래전부터 번영하던 프리에네는 B.C 545년 페르시아 키루스 대왕때 페르시아의 손에 철저히 불탔다. B.C 500년 이오니아 도시들이 단합해 페르시아에 반란을 일으킬 때 가담했지만, 다시 정복돼 더 큰 피해를 입어야 했다. 이후 할리카르나소스에 본부를 둔 페르시아 총독 마우솔로스의 통치아래 있다, 그가 죽고 얼마 안 있어 알렉산더의 헬레니즘 세계에 편입됐다.

 

◆ 9. 할리카르나소스(보드룸)--B.C 334년

 

오늘날 보드룸으로 불리는 할리카르나소스. 7대 불가사의 가운데 하나인 마우솔레움의 폐허. 여기서 발굴된 유물은 런던 브리티시 뮤지엄에 보관중이다.ⓒ김문환

 

이오니아 지방(오늘날 터키 서부 해안 도시들)을 차례로 점령한 알렉산더는 페르시아 해군의 굳건한 기지인 철옹성 할리카르나소스로 향했다. 페르시아의 사트라프(총독) 마우솔로스가 통치했던 카리아 지방의 중심도시 할리카르나소스는 마우솔로스의 영묘, 즉 7대 불가사의 의 하나인 마우솔레움이 자리한 도시다. 마우솔레움은 마우솔로스가 B.C 351년 죽고, 그 아내 아르테미시아가 건설을 지속하다 역시 B.C 350년 죽은 뒤에도 공사가 진행됐다는 기록이 있다. 따라서, B.C 340년대 완공됐을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알렉산더가 도착한 B.C 334년에는 마우솔레움이 새물내를 물씬 풍기며 거대하고 압도적인 위용을 뽐냈을 것이다. 할리카르나소스는 그리스 역사학의 태두(泰斗)로 독보적인 역사학자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헤로도토스(B.C 1c 로마의 아버지로 칭송되던 키케로는 헤로도토스를 역사학의 아버지라고 명명)의 고향이다. B.C 484년 경 태어난 것으로 추정되는 헤로도토스는 사모스섬으로 옮겨 살다 B.C 445년 역사상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던 아테네로 가서 실권자 페리클레스와 교유하며 페르시아 전쟁을 그린 역작 [역사]를 저술했다.

 

아테네가 중심이 돼 페르시아의 침략에 맞서 수비군으로 싸웠던 그리스군은 이제 150여년 지나 마케도니아가 중심이 돼 침략군으로 할리카르나소스에서 수비군인 페르시아와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사실 이 전투는 페르시아군이라고 규정하기 어려운 대목도 있다. 페르시아에 용병으로 고용된 그리스 출신 병사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지휘 장군은 로도스 출신의 그리스인 용병대장 멤논이 맡았다. 할리카르나소스는 페르시아 함대의 기항지로 두터운 성벽에 둘러싸인 요새도시였다. 명장으로 소문 났던 멤논이 거세게 저항하는 바람에 알렉산더는 큰 곤욕을 치렀다. 알렉산더는 성을 파괴하기 위해 성 높이로 쌓아올린 탑모양의 공성기(攻城機)를 동원해 간신히 함락시킬 수 있었다. 이런 전투방법은 중세 널리 이용됐다. 결국, 멤논은 할리카르나소스를 포기하고 철수결정을 내려야 했다. 오늘날 보드룸으로 불리는 할리카르나소스는 바다 멀리 그리스의 코스섬이 손에 잡힐 듯 바라다 보인다. 코스섬에서도 마찬가지다. 코스섬에서 의술의 신 아스클레피오스를 기리는 유적지 산중턱에서 멀리 바다안개 너머로 눈에 들어오던 보드룸의 모습이 아련하다. 사진은 마우솔레움이 자리했던 폐허.

 

◆ 10. 페르게, 아스펜도스, 시데--B.C 333년

 

페르게. 트로이 전쟁 직후 만들어졌다는 페르게는 도시유적 특히 로마식 포럼과 상수도 시스템이 잘 남아있는 훌륭한 유적지다.알렉산더는 파셀리스를 거쳐 이곳 페르게를 점령했다.ⓒ김문환

아스펜도스. 감탄이 절로 나오는 유적지 아스펜도스는 알렉산더에게 저항했다가 곤욕을 치른다. 웅장한 규모의 극장이 완벽한 형태로 남아있다. 잘 보존된 관중석. 무대 배경... 시리아의 보스라 극장과 함께 원형이 가장 잘 남아있는 그리스 로마 극장이다. 지금도 각종 공연이 열린다. 사진에도 무대에 악단이 자리하고 있다. ⓒ김문환


시데. 팜필리아 지방 최대의 항구도시 시데. 바닷가에 그림처럼 남아있는 아폴론신전의 잔해다. 시데는 알렉산더에게 순순히 문을 열어줬다. ⓒ김문환

할리카르나소스를 성공적으로 쟁취한 알렉산더는 남동진해 팜필리아 지방으로 나갔다. 오늘날 터키 남부의 최대 관광도시 안탈랴가 자리한 지역이다. 오늘날 최대 도시는 안탈랴지만, 알렉산더 시절에는 안탈랴가 없었다. 안탈랴가 생긴 것은 헬레니즘 시절이던 B.C 2c 페르가몬 왕국 아탈로스왕 때이다. 알렉산더는 할리카르나소스를 떠나 파셀리스를 차지하고 이어 미래의 안탈랴를 거쳐 페르게로 진출했다. 페르게는 트로이 전쟁이 끝나고, 아르고스 출신 몹소스와 칼카스가 세웠다고 전해지는 도시다. 육지에서 해안으로 12km 들어간 내륙도시 페르게는 페르시아의 지배 아래 있다가 B.C 333년 알렉산더군이 오자 스스로 문을 열고 알렉산더를 맞았다. 할리카르나소스의 비극을 전해 들은 것이다. 페르게에는 오늘날 까지 대형 극장과 스타디움 유적이 잘 남아 있다.

 

페르게를 접수한 알렉산더는 근처 아스펜도스로 갔다. 아스펜도스는 오늘날 터키는 물론 지중해 전역을 합쳐 극장 유적이 시리아의 보스라와 함께 가장 완벽하게 장관중의 장관으로 남아있는 도시다. 아스펜도스는 처음 알렉산더에게 항복을 하는 듯 사절을 보내 알렉산더를 안심시켰다가 다시 대항하는 실수를 범했다. 이 바람에 큰 배상금을 물고서야 학살과 노예로 팔리는 운명을 간신히 벗어날 수 있었다.

알렉산더는 아스펜도스에 이어 팜필리아 지방 최대 항구도시 시데를 공략하는데 성공했다. 시데는 겨울에도 온화한 날씨의 아름다운 바닷가 도시다. 토착민들과 그리스인들이 새로운 세계를 일구던 도시다. 후기 히타이트의 영향에 이어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던 시데는 알렉산더가 닥쳤을 때 역시 별 저항 없이 도시문을 열었다. 사진은 해안에 지은 아폴론 신전. 신전 바로 옆에는 천혜의 방파제가 있는 아늑한 항구가 자리한다. 시데 항구는 부유한 상인들이 상단을 조직해 무역을 행하는 기지였다. 당시 지중해에는 해적이 출몰해 무역상들을 괴렵혔는데, 시데의 상인들은 해적 퇴치 용병을 고용해 상선이 안전하게 항해할 수 있도록 하므로써 번영을 누렸다. 특히 노예 무역항으로 이름이 높았다.

 

◆ 11. 카파도키아--B.C 333년

 

알렉산더는 시데에서 북으로 기수를 돌려 프리지아 왕국의 수도 고르디온으로 가서 [고르디온의 매듭]을 풀고, 겨울을 난뒤 앙카라를 거쳐 카파도키아를 옆으로 돌아 타르수스로 향했다. 기아괴석으로 유명한 카파도키아. ⓒ김문환

시데에서 기수를 북으로 돌린 알렉산더는 만지는 모든 것을 황금으로 만들 수 있었던 전설의 미다스왕이 다스리던 프리지아 왕국의 수도 고르디온으로 갔다. 고르디온은 [고르디온의 매듭]으로 유명한 도시다. 고르디온 왕국에 보관중인 이 매듭을 푸는 자만이 아시아를 지배할 수 있다는 예언이 전해져 오던 터였다. 고르디온의 매듭을 풀겠다고 자신만만 도전한 알렉산더. 못풀면 망신인데... 잘 풀었다는 설과 칼로 싹뚝 잘라 버렸다는 설이 모두 전한다. 어쨌든 고르디온의 매듭은 풀렸다. 고르디온에서 휴식을 취하며 겨울을 난 알렉산더는 오늘날 터키의 수도 앙카라를 거쳐 다시 남으로 내려왔다. 남으로 내려오는 도중 기암괴석의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카파도키아를 옆으로 돌아 타르수스로 갔다. 그러니까, 알렉산더는 자연의 침식작용이 빚어낸 기이한 카파도키아의 장관을 보고 가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 12. 타르수스--B.C 333년

 

타르수스. 알렉산더는 타르수스에서 병을 얻어 두달 정도 몸져 누워야 했다. 사진은 클레오파트라를 기념해 만든 클레오파트라의 문.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는 이곳 타르수스에서 만나 사랑을 불태웠다. 타르수스는 아나톨리아에서 메소포타미아로 이어지는 길목이었다. ⓒ김문환

 

고르디온에서 카파도키아를 돌아 타르수스로 오는 행군은 혹독했다. 타는 듯한 여름 더위 때문이다. 다행인 것은 그동안 페르시아 용병대장인 로도스 출신의 멤논이 죽은 것이다. 아테네등을 다니며 마케도니아에 대해 반기를 들 것을 설득했지만 실패한 멤논. 실의 속에 그가 죽었고 호적수가 없어진 알렉산더에게는 앞날이 더욱 밝아 보였다. 모든 조건이 알렉산더에게 유리하게 전개된 것이다. 타르수스는 지금까지 살펴본 도시들과 성격이 다르다. 앞에서 언급한 도시들은 주로 그리스 문명권에 들어있던 도시다. 그러나, 타르수스는 터키의 최남단으로 메소포타미아 지방으로 연결되는 길목이다. 지형이나 기후가 우선 다르다. 무덥고 겨울에도 춥지 않다.

 

문화적으로는 그리스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 그리스 문명의 직간접적인 영향을 받지 않고 메소포타미아 문명권의 흥망성쇠에 영향을 받았다. 히타이트 제국의 지배를 받다가 B.C 9c 에는 앗시리아의 지배기로 들어갔다. B.C 696년에는 앗시리아 왕 세나케립이 타르수스에 새도시를 건설했다. 그러나, B.C 612년 앗시리아아 멸망하면서 북방 스키타이인의 침략을 받았다. 이어 이오니아 지방 리디아의 지배를 거쳐 B.C 6c 페르시아 세력권에 포함됐다. B.C 4c 살았던 크세노폰은 타르수스가 아주 번창하는 도시였으며 페르시아의 주권아래 현지 왕이 다스리는 정치형태였다고 기술한다.

 

마침내 B.C 333년 알렉산더가 타르수스에 입성했다. 알렉산더의 전속 역사가 아리아노스는 알렉산더가 온다는 소리에 킬리키아 관문을 지키던 페르시아의 사트라프(총독) 아르사메스는 도시를 파괴하지도 않고, 도전하지도 않고, 그냥 조용히 그러나 아주 신속하게 줄행랑을 놨다고 적는다. 알렉산더는 타르수스에서 오래 머물지 않았다. 총독을 남겨 두고, 아다나 방면으로 떠났다. 그러나, 알렉산더는 타르수스에 마무는 동안 개인적으로 크게 고생한 것으로 기록된다. 말라리아에 걸려 두어달 죽을 고비를 넘겼다는 설과, 강에서 목욕을 한 뒤 감기에 걸렸다는 설도 있다. 알렉산더가 떠난 뒤 3백여년 지나 이곳은 로마 안토니우스와 이집트 클레오파트라의 사랑의 무대가 된다.

 

◆ 13. 아다나(이수스)--B.C 333년

 

타르수스에서 동진하면 아다나가 나온다. 아다나에서 동쪽으로 알렉산더와 다리우스 3세가 붙었던 이수스 전투현장이 자리한다. 사진은 로마시대 처음 만든 아다나시의 다리. ⓒ김문환

 

오늘날 터키 최대의 남부 도시다. 터키에서는 4번째로 크다. 타르수스 동쪽에 자리한다. 이곳 아다나에서 동쪽으로 조금 더 가면 역사적인 전투 현장 이수스다. 동서 역사의 운명을 가른 몇몇 전투가 있다. 페르시아와 아테네 중심의 그리스 연합군이 맞붙은 B.C 490년의 마라톤 전투, B.C 479년의 살라미스 해전, 그리고 마케도니아 중심의 그리스 연합군과 페르시아가 붙은 B.C 333년의 이수스 전투. 뒤이어 B.C 202년의 로마와 카르타고의 전투... 이수스 전투는 당시까지 최고의 세계제국이던 페르시아 제국의 직접 원인이 됐다. 알렉산더와 다리우스 3세가 직접 맞붙은 것은 이수스 전투가 처음 이었다. 이수스 전투에서 패한 다리우스 3세는 아내와 딸, 어머니등 가족을 버리고 도주했다. 알렉산더는 다리우스 3세의 아름다운 아내와 딸들을 포로로 잡았지만 학대하지 않고, 품위를 유지하며 살수 있도록 배려했다. 그리고는 이제 자신이 페르시아의 왕이라고 선언했다. 다리우스 3세의 아내는 뒷날 알렉산더의 전투행렬을 따라가다 출산도중 숨졌다. 딸들은 알렉산더와 나머지 장군들의 아내가 됐다. 사진은 로마시대 처음 만들어진 뒤 개축된 아다나의 로마다리. ⓒ김문환

 

◆ 14. 다마스커스--B.C 333년

 

오늘날 시리아의 수도 다마스커스. 알렉산더는 이수스 전투에서 승리르 거둔뒤 다리우스 3세가 진영으로 사용했던 다마스커스에서 엄청난 전리품을 챙긴다. 이때 그리스 용병대장 멤논의 아내 바르시네를 다마스커스에서 데려온 알렉산더는 그녀와 사이에 아들도 뒀다. 사진은 다마스커스 한복판에( 마치 우리 이순신 장군 동상처럼)자리한 이슬람 시대 최대의 성군으로 칭송되는 살라딘 동상이다. 살라딘은 우리 자이툰 부대가 주둔하고 있는 지역의 주민, 즉 쿠르드족이었다. ⓒ김문환

 

이수스 전투에서 승리한 알렉산더는 다리우스 3세가 본부를 두고 있던 다마스커스를 차지했다. 현대 시리아의 수도요, 이슬람 아유브 왕조의 중심도시 다마스커스. 다마스커스에서 알렉산더군은 엄청난 재물을 악탈할 수 있었다. 특히 죽은 페르시아의 그리스 용병대장 멤논의 아름다운 아내 바르시네도 다마스커스에 머물다 그리스군의 포로가 됐다. 그녀는 알렉산더의 마음을 한눈에 사로 잡았다. 둘 사이에서는 아들이 한명 태어날 정도였다. 알렉산더가 바르시네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알려주는 대목. 알렉산더는 앞서 이오니아 지방에서 그라니코스 전투를 승리로 이끌고 남하하다 차지한 페르가몬의 통치권을 바르시네에게 넘겨 줬다. 둘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의 이름은 헤라클레스. 헤라클레스는 어머니 바르시네에 이어 페르가몬을 다스렸다. 그러나, 운명의 장난이란. 그만 아버지 알렉산더가 일찍 죽는 바람에 제국이 분할 되면서 페르가몬은 리시마코스 장군 손으로 넘어갔다가 다시 셀레우코스 장군의 시리아에게 넘어갔다.

 

헬레니즘의 도시 다마스커스는 7c 이슬람도시로 말을 갈아탄다. 오늘날 시리아의 수도 다마스커스 한복판에는 이슬람 세계 최고의 성군으로 꼽히며, 유럽의 십자군에 대항해 이슬람을 지켜낸 수호신으로 평가받는 살라딘의 동상이 자리한다. 말을 타고 앞으로 힘차게 나가는 살라딘의 표정에 범하기 어려운 위엄이 서려 있다. 오늘날 자이툰 부대가 주둔하는 지역은 쿠르드족 자치구인데... 오늘날 비록 나라도 없이 핍박받지만, 쿠르드족으로 가장 유명한 사람이 바로 살라딘이다. 그러니 쿠르드족을 쉽게 하대할 일이 아니다. 살라딘 시절에는 아유브 왕조를 세워 이슬람 세계를 호령하던 위세가 등등했으니 말이다. 살라딘이 활약하던 12c 말은 고려에서 정중부, 이의방의 무신난이 일어나 무신들이 정권을 담당하던 시기다. 다마스커스는 살라딘의 통치가 끝난 뒤 13c 몽골군의 침략에 폐허로 변했다. 비슷한 시기 고려도 몽골군에 초토화 되었듯이... 극동의 끝에서 시리아의 지중해 연안까지 몽골의 정복전쟁 역정은 참으로 멀고도 대단했다.

 

◆ 15. 비블로스--B.C 332년

 

비블로스. 알렉산더는 이수스 전투에서 승리한 뒤 바로 메소포타미아로 진격하지 않고 배후인 지중해 연안 도시들부터 공략한다. 페니키아시대부터 번영한 비블로스 항구는 그 첫도시였다. 아름다운 해안을 배경으로 세워진 십자군 시대 성벽. ⓒ김문환

 

이수스 전투에서 승리한 알렉산더는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 강 사이 메소포타미아 지방 즉, 페르시아 제국의 중심부로 들어가지 않았다. 먼저 지중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조성된 옛 페니키아 영토의 도시들을 하나씩 점령해 나갔다. 페르시아의 지중해 함대 기지를 모두 무력화시켜 혹시 페르시아 함대가 그리스 본토로 가 알렉산더의 배후를 공격하는 일이 없도록 사전에 막기 위한 전략이었다. 또, 이집트를 공략해 페르시아의 후방기지를 완전히 제거한다는 목표도 있었다. 알렉산더는 우선 오늘날 레바논 땅인 트리폴리를 거쳐 비블로스로 갔다.

 

비블로스(Byblos)는 이집트에서 파피루스를 수입해오는 항구이자 레바논에서 나는 양질의 목재 삼나무를 이집트로 수출하는 페니키아의 대항구도시로 번영을 누리던 터였다. 도시 이름 비블로스 역시 파피루스(Papyrus)라는 말에서 나왔다는 설도 있다. 페니키아를 거쳐 B.C 734년부터 앗시리아의 지배를 받다가 B.C 539년부터는 페르시아의 지배아래 놓였던 비블로스. 이제 B.C 332년에는 알렉산더의 말발굽 아래 헬레니즘 세계로 편입됐다. 사진은 페니키아 시대부터 내려오던 유적을 12c 프랑스에서 온 십자군이 증축한 요새의 모습이다. ⓒ김문환

 

◆ 16. 시돈--B.C 332년

 

시돈. 알렉산더는 시돈에서 그리스 용병들의 저하을 받아야 했다. 페니키아 도시였던 시돈에서는 19c [알렉산더 석관]으로 명명된 이수스 전투장면을 묘사한 조각이 새겨진 석관이 발굴됐다. ⓒ김문환

 

알렉산더는 비블로스에서 남진해 시돈으로 들어갔다. 시돈 역시 페니키아 시절부터 발달한 유서 깊은 도시다. 알렉산더는 손쉽게 시돈을 정복하는가 했지만, 페르시아가 고용한 그리스 출신 용병들이 저항하는 바람에 일전을 치러야 했다. 이오니아 지방에서도 그랬지만, 알렉산더가 싸운 대상은 페르시아 자체의 군대 외에 그리스 동족도 많았다. 페르시아가 방대한 지역의 방어나 공략을 위해 자국 병사로는 한계를 느껴 돈을 주고 용병을 고용했는데, 그리스 출신의 중무장 보병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알렉산더가 차지한 시돈에서는 19c 말 오스만 투르크 지배아래서 '알렉산더 석관'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헬레니즘 시대 석관이 발견됐다. 알렉산더의 이수스 전투장면이 조각으로 새겨져 관심을 모았다. 사진은 폐허로 변한 바닷가 유적이다. ⓒ김문환

 

◆ 17. 티레--B.C 332년

 

티레. 페르시아의 지중해 함대가 있던 티레. 알렉산더는 티레를 공략하느라 큰 애를 먹었다. 그래서 티레 주민들을 잔혹하게 학살하고 생존자는 노예로 팔았다. ⓒ김문환

 

시돈을 손에 넣은 알렉산더는 티레로 향했다. 티레는 비블로스, 시돈과 함께 페니키아 시대부터 번영하던 항구 도시다. 일찌기 티레를 출발한 페니키아인들은 지중해 전역으로 퍼져 무역을 하면서 각지에 도시를 건설했다. 페니키아인들의 특징은 군사적인 정복에 있지 않았다. 오로지 관심은 무역기지. 이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도시가 바로 카르타고다. 페니키아인들은 B.C 720년 경 오늘날 튀니지에 카르타고를 세웠다. 카르타고는 훗날 본국 티레가 앗시리아의 공격으로 세가 약해지자 지중해 연안 페니키아 문명권의 패자로 군림했다. 물론 3차례의 포에니 전쟁 끝에 B.C 146년 로마에 멸망당하지만...

 

티레는 B.C 천 200년 경 에게해에서 온 북방 바다민족의 침입때도 피해를 면할 만큼 철옹성 같은 성을 갖고 있었다. 비록 앗시리아에 굴복당한 데 이어 신바빌로니아, 페르시아의 침략에 무릎을 꿇고 말았지만, 강대국이 들어올 때 마다 티레는 호락호락하지 않고 강력히 저항했다. 알렉산더가 왔을 때도 마찬가지다. 비블로스나 시돈과 달리 티레는 성문을 잠그고 맞섰다. 농성(籠城)기간이 무려 7개월이나 됐다. 알렉산더는 할리카르나소스를 정복할 때처럼 티레 성 옆에 공성탑을 쌓은 뒤에야 전투를 승리로 이끌 수 있었다. 알렉산더는 저항한 도시에 보여주는 본보기로 티레를 잔인하게 짓밟았다. 수많은 사람을 학살하고 살아남은 자들은 노예로 팔았다. 페르시아의 지중해 함대의 주요기지 티레가 함락되자 도망갔던 다리우스 3세가 정식으로 휴전제의를 해왔다. 물론 알렉산더가 거절했지만, 그만큼 티레가 페르시아에는 중요한 도시였음을 말해준다. 티레에는 로마시대 만든 대형 전차 경기장등 고대 유적이 다수 남아있다. ⓒ김문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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