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중해 문명기 4권-- 도자기로 읽는 트로이 전쟁과 로마의 건국 ---글 싣는 순서-- 3장. 트로이 전쟁의 전개 1(아카이아 연합군)
1. 헬레네 송환 협상 2,3,4,5,6,7. 아킬레스 1.성장, 2.참전,3.사랑,4.브리세이스,5.헥토르와 대결,6.죽음 8. 고대 그리스의 애정사 9. 파트로클로스 10,11,12,13. 올림픽 1,2,3,4 14. 大아이아스 15. 그리스, 직접 민주주의 16,17,18 민주주의를 이끈 사람들 1,2,3 19. 중우정치와 민주정치 20. 고대 민주주의와 현대민주주의 21. 미국 민주주의의 현실 22. 오디세우스 23. 디오메데스, 小아이아스 24,25 네오프톨레모스, 필록테테스 26, 27,28,29,30,31,32,33,34,35 알렉산더와 아킬레스 1,2,3,4,5,6,7,8,9,10--오늘 이야기 36. 테티스, 헤파이스토스, 아테나
34. 알렉산더와 아킬레스 9. 영화와 역사사이 3
◆ 1. 헬레니즘이란 말은? 영화에서는 프톨레마이오스 1세가 설명하는 대목에서 헬레니즘(Hellenism)이란 말을 사용하는 것으로 돼 있다. 헬레니즘? 정확히 무슨 뜻이고 언제부터 사용된 말일까? 알렉산더 생전에 그는 헬레니즘 세계 건설을 위해 동분서주(東奔西走)한 것인가? 프톨레마이오스는 헬레니즘이란 말을 알고 있었을까? 그리스 본토에서부터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페르시아 본토, 박트리아, 간다라에 이주해 살았던 그리스인들과 현지인들은 자신이 헬레니즘 세계에 살고 있다고 느꼈던 것인가? 간다라 미술이 헬레니즘 문화의 한 전형이라는 것을 간다라 불상 조각가들은 깨닫고 정을 쪼았을까? 알렉산드리아 시민들은 자신들이 헬레니즘 세계의 중심이라고 생각했는가?
결론은 모두 아니다. 그렇다면 영화는 거짓을 말한다는 결론이 가능해 진다. 프톨레마이오스 1세는 헬레니즘이 무엇인지 몰랐다. '헬레니즘'이란 말이 처음 등장한 것이 19c 들어서기 때문이다. 알렉산더가 죽은지 2천 200년, 헬레니즘 세계가 붕괴되고 천 9백여년 더 흘러서다. 헬레니즘 이란 말을 처음 사용한 사람은 독일인으로 기록된다. 1863년 독일의 드로이젠이란 사람이 [헬레니즘 역사]라는 책을 저술하면서 처음 사용됐다. 헬라스(Hellas)는 고대 그리스를, 헬레네스(Hellenes)는 고대 그리스 사람들을 가리킨다. 결국, 헬레니즘(Hellenism)은 쉽게 그리스의 문화나 그 정신을 가리키는 의미로 만들어 냈음을 알 수 있다.
◆ 2. 헬레니즘의 시대적, 지역적 구분 헬레니즘이 그리스 문화의 특징이나 정신을 담고 있지만, 그리스문화 자체를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약간 다르다. 그리스 역사시기는 미노아와 미케네를 거쳐 B.C 9c부터 아르카이크기(期), B.C 5c 부터는 고전기(期)라고 부른다. B.C 5c 아테네를 중심으로 화려하게 꽃핀 그리스 직접 민주주의와 학문의 발전, 문학 융성의 결과물을 합쳐서 고전기 문화라고 부르지 헬레니즘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헬레니즘은? B.C 5c의 영광을 뒤로 하고 그리스 도시국가들은 B.C 4c 쇠퇴기를 맞아 북방의 마케도니아에게 굴복당했다. 마케도니아는 그리스 도시국가들을 헬라스 동맹(코린트 동맹)으로 묶은 뒤 과가멜라 전투에서 페르시아를 B.C 331년 붕괴시켜 그리스인 세상을 만든다. 이때 부터를 헬레니즘 시기라 부른다. 종말은? 이집트의 클레오파트라 여왕이 죽어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무너지던 B.C 30년이다. 그러니까 헬레니즘 기간은 300년인 셈이다.
지역적으로 헬레니즘은? 서쪽으로 이탈리아 반도의 그리스 식민국가들, 시칠리아, 그리스 본토, 에게해 도시국가들, 오늘날 터키인 아나톨리아, 오리엔트 지중해안(오늘날 시리아, 레바논, 이스라엘, 요르단), 메소포타미아, 페르세폴리스 중심의 페르시아 본토, 박트리아, 간다라, 이집트, 리비아 해안을 아우를 만큼 거대하다. 이들 지역에서는 크게 마케도니아(안티고노스 왕조), 시리아(셀레우코스 왕조), 이집트(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3왕조에 그리스 본토나 시칠리아의 자치적인 도시국가들이 세를 겨뤘다. 이 다양한 국가들이 앞서 언급한 300년간 그리스어와 그리스 문화를 바탕으로 과거 페르시아 제국내의 현지 문물을 접합시켜 새롭게 일궈 낸 문화적, 학문적, 예술적 성과를 헬레니즘 문명이라 말한다. 헬레니즘 문명은 이후 로마문명에 그대로 이식됐을 뿐 아니라 중세의 기독교 세상의 퇴보와 잠행기(潛行期)를 거쳐 근대의 르네상스로 다시 태어났다.
◆ 3. 헬레니즘 문명의 특징 헬레니즘 문명의 구체적인 내용을 간략히 정리하는 일은 무리가 있지만, 이해를 돕기 위해 단순화 시켜 본다. 먼저 정치체제. 고전기 그리스 도시국가들은 민주공화정이었다. 마케도니아 처럼 왕정이라 해도 왕권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헬레니즘 시대에는 그리스 본토의 자치적인 도시국가들을 제외하고 나머지 왕조국가에서 왕권은 신에 버금가는 절대성을 가졌다. 수메르 문명 이래 메소포타미아 각국이나 이집트, 페르시아의 전제군주제를 그대로 받아들인 탓이다. 평등한 시민들의 나라에서 절대 왕정이 국토와 국민을 지배하는 정치체제로의 변화가 그 특징이다. 언어는 변형 그리스어(코이네)가 동지중해에서 인더스강 유역까지 퍼져 행정이나 무역의 공용어로 쓰였다. 특정 언어는 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세계관, 종교관, 학문과 예술을 담는 그릇이다. 그리스어가 제국 전체에 퍼져 사용됐다는 것은 헬레니즘 전 지역에서 그리스적인 문화요소가 밑바탕에 깔렸음을 말해준다.
헬레니즘의 문화적인 특징 가운데 하나는 융합(融合)이다. 지배계층이 그리스인이고 그리스어를 사용해 그리스 문화가 근간을 이뤘지만, 현지의 문화, 학문적 성과, 예술 양식도 그리스적 요소와 어울려 새로운 동서융합 현상을 빚어 냈다. 그리고 이는 두드러진 성과로 이어졌다. 일례로, 사변적인 이론이 주를 이루던 그리스 학문이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의 전래 학문과 합쳐져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자연과학 융성이란 열매를 맺었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고대 그리스의 과학은 대부분 헬레니즘기 산물이었다고 생각하면 쉽다. 이는 뒤에서 다시 자세히 살핀다.
컬러 테세라 모자이크 같은 예술도 강력해진 왕실의 부를 바탕으로 화려하게 꽃을 피웠다. 동양적 영감을 구체화한 간다라 미술도 대표적이다. 인종, 민족적인 경계도 넓어져 이집트에서 그리스인과 이집트인의 결혼 금지를 제외하면 자연스럽게 그리스인과 현지인의 결혼으로 세계시민사회라는 개념이 싹텄다. 헬레니즘은 한마디로 학문과 문화, 예술 측면에서 유럽과 아시아, 북아프리카를 아우르는 열린 국제 교류사회, 즉 코즈모폴리터니즘(Cosmopolitanism)을 구현해 냈다는 점에서 그 위대성을 찾을 수 있다. 오늘날 개념으로 비춰 봐도 손색없는 국제교류 문화였다.
◆ 4. 헬레니즘 각국의 쇠망 이렇게 B.C 5c 고전기의 그리스 본토라는 좁은 울타리에서 벗어나 헬레니즘기(B.C 4c-B.C 1c) 유럽과 아시아, 아프리카에 걸쳐 번영하던 헬레니즘 세계의 각국은 왜 쇠망했는가? 로마의 급성장과 카르타고의 패배는 중요한 외적 요인이지만, 무엇보다 헬레니즘 세계를 분할하고 있던 그리스 민족 내부의 분열 탓이다. B.C 202년 2차 포에니 전쟁에서 한니발의 카르타고를 물리치고 서(西)지중해의 패권을 차지한 로마는 자연스럽게 동(東)지중해로 관심을 돌렸다. 이때 헬레니즘 각국은 대외적으로 단합해 로마에 맞서지 못했다. 오히려 서로 분열해 이민족인 로마와 손잡고, 헬레니즘 세계내 다른 그리스 민족국가를 쓰러트리려 했다. 스스로 존립기반을 무너트린 것이다. 무슨 소리인가 하면, 현재 남북이 대치하면서 동족끼리 총칼로 못죽여 안달하고, 서로 미국이나 중국, 러시아, 일본과 손잡는 현실과 똑같다. 헬레니즘 각국은 또, 국가 내부적으로 왕족끼리 왕위 다툼을 벌이면서 상대를 제압하기 위해 신흥 강대국 로마를 끌어들여 스스로 나라 통치를 로마에 헌납하는 꼴을 연출하고 말았다. 조선 말기 민비와 흥선대원군의 경쟁이라고 할까? 그 틈바구니에서 일본과 청나라의 세력 확대만 꾀해주는 결과를 낳았으니... 건실한 민주 공화정을 운영하고 있던 로마를 당해내기는 어려운 국면이었다.
알렉산더의 유산인 헬레니즘 제국이 무너지는 순서를 보자. 3분할된 왕국 체제 가운데 마케도니아는 정작 본고장 이었으면서도 위세는 제일 약했다. 마케도니아는 B.C 168년 로마에 패해 로마에 귀속됐다. B.C 146년에는 나름대로 자치권을 누려오던 그리스 본토 각지의 도시국가들이 모두 로마에 정복돼 유럽에서 헬레니즘의 기반은 사실상 무너져 내렸다. 시리아 셀레우코스 왕조의 세력이 약해진 틈을 타 독립 왕국이 됐던 페르가몬도 B.C 133년 아탈로스 3세가 죽으면서 국가를 로마에 상속하는 기현상을 연출했다.
가장 광대한 영토를 다스렸던 시리아 역시 B.C 64년 로마의 폼페이우스에게 무너졌다. 시리아가 망하면서 광대한 영토 가운데 지중해 연안 오리엔트 지역은 로마에 귀속됐지만, 메소포타미아와 내부와 이란 본토, 박트리아, 간다라 등은 알렉산더 이전 다시 말해 헬레니즘 이전 상태대로 유럽역사에서 떨어져 나갔다. 이 지역은 B.C 246년부터 세력을 확장하던 파르티아 제국(안식국, 安息國) 판도로 넘어갔다. 가장 오래 살아 남은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프톨레마이오스 10세가 페르가몬의 본을 따 왕실을 로마에 넘긴다는 유언을 남기는 등 시련을 겪다 마침내 B.C 30년 클레오파트라 7세가 죽으면서 옥타비아누스에게 붕괴돼 로마의 수중에 떨어졌다. 알렉산더에서 시작된 헬레니즘은 그렇게 3백년 만에 역사무대에서 자취를 감췄다.
◆ 5. 헬레니즘 학문의 중심지 무세이온 헬레니즘 학문과 예술의 주역은 단연 알렉산드리아다. 소크라테스를 비롯해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로 이어지던 학문의 전통은 당시 가장 강력한 경제력과 국력을 자랑하던 아테네 덕분에 가능했다. 그러나, 알렉산더 제국이후 판도가 바뀌었다. 그리스 도시국가들은 쇠퇴했고, 알렉산더제국의 고향 마케도니아도 전체 제국의 변방에 머물렀다. 시리아의 수도 안티오크,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시리아에서 떨어져 나간 페르가몬이 전통이란 이름만 가진 아테네를 넘어 학문과 예술을 주도했다. 특히 알렉산드리아는 당시 알려진 세계의 모든 지식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이자, 이를 확대 재생산해내는 학문의 제조공장 역할을 수행했다. 알렉산드리아가 중심지로 떠오를 수 있던 비결은?
이집트 특히 알렉산드리아의 막대한 재력. 영화 [알렉산더]에서 프톨레마이오스 1세가 한마디 할 때 마다 이집트 전통의 서기 복장을 하고 따라다니며 기록하는 서기들이 보인다. 당시 궁정에서 이집트 복장을 하지는 않았겠지만, 이런 풍경 자체는 진실에 가깝다. 프톨레마이오스 1세는 당시 세계 최고의 부자였다. 이집트에서 왕은 파라오로 신의 아들이자 신이었다. 모든 국토와 인민을 소유했다. 나일강이 선물해주는 비옥한 옥토에서 기른 곡물과 파피루스는 최고의 수출품으로 왕에게 막대한 거래세를 안겼다. 그리스 민주국가에서는 상상도 하지 못할 부를 축적했다. 배부르고 등이 따듯하면 문화를 생각하는 법. 학문 자체가 돈으로 연결되는 경우는 드물지만, 막대한 부가 뒷받침 되지 않으면 학문의 발전은 기대하기 어렵다. 당시 지중해 연안 최고의 부를 축적한 프톨레마이오스 왕실의 재력 덕분에 알렉산드리아는 학문과 문화예술의 메카로 떠오를 수 있었다.
알렉산드리아가 발전한 두번째 요인. 프톨레마이오스 1세의 강한 지적 호기심으로 설립된 학술 연구원이다. 프톨레마이오스 1세는 청소년기 마케도니아의 펠라 궁정에서 알렉산더와 함께 위대한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마케도니아 출신으로 아테네에서 명성을 쌓음)로부터 학문을 익혔다. 다양한 분야의 학자들을 대동하고 전장에 나선 알렉산더처럼 그 역시 싸움꾼에 머문 게 아니라 세련된 지적 교양을 쌓은 인물이었다. 아테네에 플라톤이 세운 학당 아카데미아와 아리스토텔레스가 연 리케이온도 물론 잘 알고 있었다. 이제 세계 최고의 부자가 된 이상 그는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었다. 자신의 왕국, 자신의 궁정 한가운데 세계 최고의 학문 연구기관을 만들기로 했다. 그는 B.C 300년 아테네의 학원들을 본 따 왕립 학술원격인 무세이온(Museion, 오늘날 박물관을 나타내는 뮤지엄, Museum의 어원)을 탄생시켰다.
무세이온은 그리스 신화에서 학문과 예술을 관장하는 여신들 즉 제우스의 9딸 '뮤즈(Muse)를 기리는 장소'라는 뜻의 연구소다. 이 곳에 앞서 번영을 누렸던 그리스 문명권 각지의 최고 학자들을 초빙했다. 알렉산더의 정복전쟁으로 페르시아 너머 인도까지 다녀오며 세계사에 대한 인식의 지평을 넓혔던 그는 그리스 학문에 머물지 않았다. 강력한 지적 호기심을 유발하는 모든 학문을 대상으로 학자들을 모았다. 시칠리아의 시라쿠사, 리비아의 키레네는 물론 아테네와 기타 헬레니즘 권역 전체에서 가장 뛰어나다는 학자들을 불러 평생 연구기금을 지원하거나 일시적인 장학금을 쥐어 준 덕분이다. 황우석 교수의 줄기세포 연구에 정부가 국빈급 대우를 하며 지원금을 주는 것도 이런 맥락인가?
알렉산드리아에서 학문이 발달한 세번째 이유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황들이 왕자들에게 좌정관천(坐井觀天)의 정저와(井低蛙)가 되지 않도록 다양하면서도 최고의 학문을 가르치기 위한 교육열도 한몫했다. 왕조를 창업했지만, 이를 잘 지켜 나가려면 군주가 누구보다 총명하고 현명하며 분별력을 갖고 정사를 돌봐야 한다. 또 좁은 울타리에서 벗어나 세계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열린 세계관과 다양한 지식이 뒷받침 돼야 했다. 근친 결혼으로 마케도니아 왕실의 순수성을 지켜나가려 했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결혼을 통해 다른 세계를 이해할 기회가 원천 봉쇄된 가운데 각지에서 훌륭한 선생을 초빙해 교육하는 일이 체제유지의 절대적인 과제였다. 초빙된 선생들은 무세이온에 적을 두며 왕실 자제들을 가르쳤다.
왕실 교육을 위한 최고 학문 연구기관으로서 왕립학원 무세이온 외에 다른 교육기관도 다수 생겨났다. 이곳에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최고로 훌륭한 학자들을 연구원이나 선생으로 초빙했다. 헬레니즘 문명권 각지에서는 귀족이나 부유층 자제들이 막대한 비용을 대가며 알렉산드리아로 공부하러 왔다. 알렉산드리아는 학문의 전당이 된 것이다. 국가는 왕에 대한 숭배만 잘 지키면 학과 내용을 규제하지 않았다. 학자들은 자유롭게 학문을 연구, 발전시킬 수 있었다. 종교적인 권위를 벗어나는 영역을 금지했던 중세 유럽 학문이 왜 뒤쳐졌는지 설명되는 대목이기도 하다. 정치, 종교적인 권위나 사변적인 이론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그리스 문명권과 그외 지역 학문의 성과를 총 결집하다보니 자연과학과 실용적인 응용학문이 융성했다. 이런 학풍이 다시 일어난 것은 중세를 거쳐 르네상스 이후다.
◆ 6. 헬레니즘 학문은 실사구시 학문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들여다 보자. 현대인을 가장 놀라게 만드는 분야는 천문학이다. 흔히 근세 코페르니쿠스 이후에야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 태양이 아닌 지구가 돈다는 진실이 밝혀진 것으로 생각한다. 기독교적 가치관에 너무 오래 젖어있던 서양인들의 생각을 그대로 받아들인 결과다. 헬레니즘 시대 알렉산드리아에 모인 학자들은 이미 지구가 태양을 돈다는 사실을 학문적으로 규명하고 있었다. 에게해 사모스 섬에서 알렉산드리아로 초빙된 아리스타르코스. B.C 6c 수학을 발전시킨 피타고라스 역시 사모스 출신인데... 아리스타르코스는 알렉산드리아에 마련된 관측소나 천문학 연구시설에서 연구를 거듭한 끝에 지동설을 갈파하고 있었다.
지구가 둥글다는 진실은? 이미 아리스토텔레스나 플라톤도 이를 생각했지만, 둥근 지구의 둘레가 얼마나 되는지에 대한 정확한 계산은 헬레니즘 시대 실현됐다. 오늘날 리비아에 건설된 그리스 도시 키레네에서 온 에라토스테네스는 B.C 234년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장을 역임하면서 엄청난 일을 해냈다. 둥근 지구의 둘레를 잰 것이다. 참고로 이들이 길이를 잴 때 어떤 방법을 썼을까? 특수훈련을 받은 왕실 소속 전문 보행사(步行士)의 도움을 받았다. 직접 걸으며 그 발걸음 수를 헤아려 거리를 측정하는... 이런 방법으로 지도도 작성됐다. 발로 한반도를 그려낸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를 떠올려 주는 대목이다. 에라토스테네스는 당연히 서쪽으로 계속 갈 경우 인도에 도착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1492년 콜럼부스가 처음 생각한 게 아니다. 콜럼부스는 이슬람권에 비전(秘傳)으로 전해지던 헬레니즘의 학문적 성과나 지도를 참고했을지도 모른다.
기하학의 유클리드, 수학의 아폴로니오스, 응용역학의 크테시비오스등이 알렉산드리아 무세이온에서 그 업적을 낼 수 있었다. 시라쿠사의 아르키메데스도 비록 알렉산드리아에 정주하지는 않았지만, 알렉산드리아에 들러 학자들과 교류를 가졌다. 시체를 해부해 인체에 대한 정확한 연구를 시도한 헤르필로스도 알렉산드리아가 낳은 의학연구의 선두주자다. 알렉산드리아는 로마시대에도 의학교육의 본산으로 이름 높았다. 농업이나 생물학 수리학에서도 알렉산드리아는 괄목할 성과를 냈다. 이런 학문적인 성과가 계승 발전되지 못하고 단절된 게 아쉬움을 남기지만...
◆ 7. 헬레니즘 지식의 창고 대도서관 무세이온 부설로 만든 대도서관 또한 역사상 유례가 없던 지식과 학문의 보고(寶庫)였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알렉산드리아항에 들어오는 모든 배를 조사해 책이 나오면 이를 필사해 보관했다고 한다. 각지에서 온 모든 종류의 책을 파피루스에 옮겨 적어 보관하니, 파피루스 두루마리 책이 무려 50만 권을 헤아리며 도서관을 가득 메웠다. 그리스 학문이나 철학관련만이 아니라 각지의 다양한 사상이나 종교 풍물 관련 모든 종류의 서적을 망라했다. 오늘날로 치면 국립 도서관에 국립 학술원을 운영한 것인데... 당시 어느 나라도 생각하지 못한 성과다.
알렉산드리아 이외에 시리아에서 떨어져 나가 독립왕국이 된 페르가몬도 학문연구의 본고장을 자처하며 학문과 예술을 크게 진작시켰다. 헬레니즘 왕실간 학문경쟁의 열기도 헬레니즘의 학문과 문화를 살찌운 한 요인이 됐다. 그러나, 알렉산드리아 무세이온과 대도서관에는 처참한 운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B.C 48년 10월 폼페이우스를 쫓아 알렉산드리에 도착한 카이사르 군대가 이듬해 이집트 군과 전투를 벌이면서 도시와 이집트군 함대에 불을 질렀다. 이 과정에서 무세이온과 도서관도 불이 옮겨 붙어 인류의 지적 성과를 온축(蘊蓄)한 노력이 흔적 없이 사라지는데... 미국의 불망망이에 이라크 박물관이 수난을 당하듯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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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알렉산더와 아킬레스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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