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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채식주의자'가 유해한 걸까? '채식주의자 논란'이 유해한 걸까? [사실은]

작품성 인정받았지만, 청소년 유해 논란에 휩싸인 '채식주의자'…성교육 전문가 판단은?

[취재파일] '채식주의자'가 유해한 걸까? '채식주의자 논란'이 유해한 걸까? [사실은]

지난 10일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은 모두에게 충격이었습니다. 당사자인 한 씨도 "매우 놀랍고 영광스럽다"라며 수상 소감을 밝혔고, 이런 호재를 예상치 못했던 출판계도 이른바 '한강 신드롬'에 행복한 비명을 지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교육 현장도 큰 충격에 휩싸였습니다. 지난해 경기도의 한 고등학교에서 "청소년 성교육에 유해하다"며 한 씨의 대표작 중 하나인 채식주의자를 폐기했는데, 정작 한 씨에게 노벨문학상을 준 노벨위원회는 채식주의자를 극찬했기 때문입니다.
 

"가부장 사회 날카롭게 묘사" vs "부적절한 관계 선정적 묘사"

채식주의자는 평범했던 중년 여성이 어느 날 육식을 거부하면서 벌어지는 일입니다. 주인공은 고기를 억지로 먹이려는 가족과 대립하기도 하고, 점점 변해가는 주인공의 모습에 매력을 느낀 형부와 부적절한 관계를 갖기도 합니다. 육식이란 관행을 거부하자 가족들은 혐오와 성적 매혹, 질투심 등 반응을 보인 건데, 노벨위원회는 이를 통해 출세주의와 경직되고 때로는 독재적인 사회 규범과 관습에 매몰된 가부장 사회를 날카롭게 묘사했다고 평가했습니다.

안상우 취재파일용
하지만, 채식주의자를 폐기한 학교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학교 측은 한 씨가 지난 2016년 부커상을 받자 학교 측은 교내 도서관에 채식주의자를 비치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막상 책 내용을 읽어보니 형부와 처제의 부적절한 성관계가 묘사돼 있었고, 재학생들이 보기에는 지나치게 선정적이라고 보고 학생들이 볼 수 없도록 '금서' 조치했습니다. 그리고 지난해 말에는 폐기하기로 결정했습니다.

학교 측은 형부와 처제의 부적절한 성관계가 묘사된 사실 자체에 주목해 청소년에게 유해하다고 판단했다면, 노벨위원회는 그러한 성관계가 표상하는 바에 주목하며 작품성이 높다고 본 것입니다.
 

청소년 유해 도서

물론, 노벨문학상을 받은 작가의 소설이라고 해서 모두에게 권장할 필요는 없습니다. 학교 측도 같은 이유에서 책을 폐기한 것입니다 : 한강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받은 것은 매우 축하할일이나, 그렇다고 해서 부적절한 성관계가 선정적으로 묘사된 이 책을 반드시 청소년이 읽어야 하는 것인가?

충분히 일리가 있는 지적입니다만, 조금 다른 관점에서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 부적절한 성관계가 묘사됐다고 해서 반드시 청소년에게 유해한 것인가?

우리나라에서 도서 등 출판물이 청소년에게 유해한 것인지를 심의하는 곳은 바로 간행물윤리위원회입니다. 그런데 이 위원회에서는 채식주의자를 유해 도서로 지정한 바 없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심의는 청소년보호법에 근거해 청소년에게 성적인 욕구를 자극하는 선정적이거나 음란한 것인지 등을 기준으로 이뤄집니다. 이때 문학적 가치 등도 함께 고려해야 합니다. 즉, 채식주의자는 부적절한 성관계가 묘사돼 있지만 그 내용이 작품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중과 작품이 갖는 문학적 가치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했을 때 유해 도서로 지정되지 않는 것입니다.
 

불안함, 그 이면

그렇다면, 이제 논란은 해결된 걸까요? 여전히 상당수의 학부모와 교사는 이에 동의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형부와 처제의 부적절한 성관계가 적나라하게 묘사된 이 책을 학생들이 읽어도 괜찮을지에 대한 의문이 여전히 남기 때문입니다.

같은 이유로 채식주의자를 폐기한 고등학교는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 이후에도 폐기 결정을 유지하기로 했습니다. 또한, 최근 국정감사에서도 연일 '채식주의자는 청소년 유해도서가 맞다'는 반응들이 잇따르고 있습니다.

이런 반응 이면에는 '불안'이 잠재해 있습니다. 아직 성 가치관 형성이 온전하게 이뤄지지 않은 청소년에게 성 표현물을 노출해도 되는 것인지, 그렇다면 어디까지 노출해도 괜찮은 것인지에 대한 기준과 확신이 없기에 우려가 앞서는 것입니다.
 

성교육 전문가 "폐기 반대" 한목소리

이런 불안을 해소하기 위한 가장 쉬운 방법은 성 표현물에 대한 노출 자체를 차단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주목해야할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이미 청소년들은 SNS와 OTT, 유튜브 등을 통해 성인용(청소년 관람불가) 콘텐츠에 노출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실제로, 초등학생 10명 중 4명은 성인용 콘텐츠를 이용하고 있는 걸로 나타났습니다.(여성가족부, 2022)

특히, 전문가들은 청소년들이 다양한 채널을 통해 채식주의자에 나오는 형부와 처제의 부적절한 성관계보다 더 왜곡되고 폭력적인 방식으로 성에 접근하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더한 것에도 노출되고 있는데 왜 책 하나에 호들갑이냐?" 이런 지적은 아닙니다. 오히려 제대로 걸러지지 않은 성 표현물에 청소년들이 노출되고 있음에도 이를 비판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능력을 키워주기 보다는 금기시하기만 하면 결과적으로 더 부정적일 수 있단 뜻입니다.

실제로, SBS 팩트체크 코너 <사실은>팀이 국내외 전문가 5명에게 질의한 결과, '고교 도서관에서 채식주의자를 폐기한 것에 반대한다.'고 한목소리를 냈습니다.
 

[이명화 / 한국청소년성문화센터협의회 상임대표: 청소년들은 무분별하게 연령 구분 없이 성폭력, 성착취 영상에 고스란히 노출되고 있어서 상당한 성적 혼란을 갖고 있어요. 그럼 이걸 해소할 기회를 줘야죠. 청소년의 궁금증, 물음, 혼란을 해소할 기회를 줘야하는데, 그런 노력은 하지 않고 무조건 성에 대해서 '이건 자극적이니까 막아야 돼.' 이렇게 하기만 하면 아이들은 온실 속 화초처럼 잘 자랄 수 있을까요?]

채식주의자, 정말 청소년에 유해한가?

그렇다면, 어느 날 한 학생이 집에서 혹은 학교에서 채식주의자를 읽고 있는 모습을 봤다면. 어른으로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유네스코는 이런 상황에서 어른들의 판단을 도울 수 있도록 <국제 성교육 가이드(International technical guidance in sexuality education, 2018)>를 발표한 바 있습니다. 청소년을 4개 연령 그룹으로 구분한 다음 총 8가지 핵심 개념(관계, 폭력, 젠더, 섹슈얼리티 등)에서 각각의 그룹이 마땅히 성취해야할 교육 목표를 제시하는 것입니다.

안상우 취재파일용
가령, 만 15세 이상의 그룹에서는 건강한 성적 관계와 그렇지 못한 관계를 구별해낼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성 행위에서 비롯되는 즐거움과 책임의 요소를 분명히 이해할 수 있어야 하고, 소통과 협상, 그리고 거절 능력을 통해 원하지 않는 성적 압력에 대항하거나 보다 안전한 성관계를 유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반면, 가장 낮은 연령 그룹(만 5세~8세)은 자신의 생식기를 비롯한 신체 기관에 대해 호기심을 갖고 자연스럽게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처럼 연령별로 요구하는 교육 목표가 다릅니다. 따라서 어떤 성 표현물이 유해한 것인지 판단할 때는 연령별 교육 목표에 적합한 것인지를 따져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은>팀이 자문을 구한 국내외 성교육 전문가 5명은 이런 성교육 목표를 고려했을 때 채식주의자가 (만 15세 이상의) 학생의 성 가치관 형성에 유해하지는 않다고 봤습니다. 오히려 어른들의 적절한 지도가 있다면 오히려 긍정적 역할을 할 수 있다고 한목소리를 냈습니다.
 

[이명화 / 한국청소년성문화센터협의회 상임대표: 채식주의자는 성교육 교재는 아닙니다. 이 책을 아이들 성교육을 위해서 반드시 읽혀야 한다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임신과 출산, 피임과 같은 과학적인 지식만이 아니고 섹슈얼리티, 젠더 폭력, 성적 주체, 성적 의사결정과 같은 현대적인 성교육 개념들을 충분히 사색해볼 수 있도록 하는 좋은 텍스트라고 생각해요. 청소년들은 성에 대해 사유하고, 성적 즐거움과 만족, 폭력에 관해서 궁금했던 것을 묻고 해소할 수 있는 교육의 기회를 얻을 거라 생각합니다.]

'채식주의자'가 유해한 걸까? '채식주의자 논란'이 유해한 걸까?

"한강은 훌륭한 작가지만, 우리 아이는 성인이 되면 '채식주의자'를 읽게 하겠다."

요즘 나온 기사들에 가장 많이 달리는 댓글 중 하나입니다. 그런데, 그냥 나이가 들어 성인이 됐다고 해서 자연스럽게 성 가치관도 뚝딱 형성되는 걸까요? 전혀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중요한 건 성 표현물을 금기시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의 학생 혹은 자녀가 어떤 성적 환경에 처했는지를 직시하고, 그들이 갖는 고민에 답할 수 있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상호작용을 통해 학생들을 성적 주체로서 인정하고 존중할 때 비로소 올바른 성 가치관을 형성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채식주의자'가 청소년에게 유해한 게 아니라, "채식주의자는 절대 봐서는 안 된다!"며 어른들이 만들어낸 논란이 우리 청소년에겐 더 유해할 수 있습니다.

(
작가: 김효진 , 인턴: 배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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