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달 프랑스의 한 방산전시회에서 인터뷰하고 있는 석종건 방사청장
석종건 방사청장이 지난 22일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차기 한국형 이지스 구축함 KDDX 사업추진 방향에 대한 의견을 개진했습니다. KDDX 상세설계 및 선도함 건조의 사업을 수의계약으로 하느냐, 경쟁입찰로 하느냐 논란이 많은 가운데 사업관리 책임자가 처음으로 입장을 공개한 터라 세간의 관심이 많았습니다.
석종건 청장은 인터뷰에서 수의계약과 경쟁입찰 중 어떤 방식으로 추진할지 결정된 바 없다고 밝혔습니다. 만약 경쟁입찰로 가도 HD현대중공업과 한화오션 중 어느 한쪽이 유리해지는 상황은 되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최종 사업자가 선정됐을 때 KDDX 적기 전력화를 위해 업체들의 승복과 페어플레이를 당부했습니다.
공정하게 사업을 이끌어야 하는 방사청장의 발언으로 흠잡을 데 없는 것 같지만 다소 아쉬운 점이 있었습니다. 석 청장은 역대급 기밀탈취로 인한 HD현중의 도덕성 이슈가 있다고 지적했지만 정작 방사청이 도덕성 이슈에서 자유롭지 못한 사실은 건드리지 않았습니다. 방사청은 KDDX 사업관리에 불공정했다는 의혹의 복판에 서 있습니다. 시중의 여론이 HD현중의 비리에 집중하느라 방사청의 불공정 의혹이 소홀히 다뤄졌을 뿐입니다. KDDX 논란의 뿌리 중 한 자리를 차지한 방사청의 향후 처신을 많은 이들이 주목하고 있습니다.
2012년 청렴서약 위반에 눈 감은 방사청
방위사업청 주관의 무기체계 개발 및 도입 사업에 참가하는 업체들은 대표(또는 임원) 명의의 청렴서약서를 작성합니다. △입찰 중 불공정행위를 안 한다 △입찰, 계약 체결 및 이행 과정에서 관계 공무원에게 뇌물을 주지 않고, 그런 약속도 안 한다 △방위사업 관련 특정정보의 제공을 관계 공무원에게 요구하거나 제공받지 않는다 등이 주요 내용입니다. 어기면 정부 사업 참여 자체가 금지되는 부정당제재 등을 받습니다.
HD현중은 2012년 KDDX 개념설계 사업 입찰 때 청렴서약서를 썼습니다. 수주에 실패했지만 HD현중 직원들은 2013년과 2014년 KDDX 개념설계 기밀을 훔치는 등 4년 간 해군의 함정 기밀들을 지속적으로 탈취했습니다. "방위사업 관련 특정정보의 제공을 관계 공무원에게 요구하거나 제공받지 않는다"는 청렴서약서 조항 위반입니다.
HD현중의 KDDX 개념설계 청렴서약 위반은 지금까지 공개적으로 거론된 적조차 없습니다. 물론 방사청과 HD현중은 파악했던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그럼에도 방사청은 문제 삼지 않았습니다. 왜 알면서도 넘어갔는지 반드시 짚어봐야 할 사안입니다.
2020년 청렴서약 위반에 눈 감은 방사청
기밀탈취에 협조한 해군 대령 A 씨를 주목해야 합니다. HD현중의 KDDX 개념설계 기밀탈취가 끝난 뒤 HD현중에 입사했습니다. 취업해서 받은 임금은 기밀탈취 협조의 대가 아니냐는 의심을 받기에 충분합니다. 5년 이상 HD현중에서 근무하다가 군사기밀법 위반 확정판결로 복역한 이후 퇴사했습니다. "입찰, 계약 체결 및 이행 과정에서 관계 공무원에게 뇌물을 주지 않고, 그런 약속도 안 한다"는 청렴서약서 조항의 위반 소지가 큽니다. KDDX 개념설계 청렴서약 위반 때와 마찬가지로 방사청은 외면했습니다.
방사청은 딱 한번 HD현중의 청렴서약 위반 사항을 들여다봤습니다. KDDX, 장보고 잠수함, 특수전 함정 등과 관련된 기밀들을 훔친 행위 자체의 청렴서약 위반 여부를 살핀 것입니다. 지난 2월 내린 방사청의 결론은 "청렴서약 위반이 아니다"입니다. 방사청의 논리는 "청렴서약서에 서명한 대표 등 임원이 직접적으로 불법 행위를 하거나, 인지해야만 서약서 위반"이라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대표이사 등 임원이 기밀탈취를 주도적으로 공모하지 않는 한 청렴서약 위반이 될 수 없다는 것이 방사청의 주장입니다.
방사청의 주장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대표 등 임원의 청렴서약은 사업에 참여하는 다수의 직원들을 대표하고 대리해서 대표 등 임원이 서약하는 행위입니다. 수많은 직원들이 일일이 서명하는 것은 불합리하기 때문에 대표가 도맡아서 서약하는 것입니다. 직원이 위반하면 회사가 응당 대가를 치르겠다는 대표자의 약속입니다. 업계는 물론 방사청 내부에서도 "'청렴서약은 대표의 직접적 행위만 규제한다'며 HD현중에 면죄부를 준 방사청 유권해석이 어이없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습니다. 즉, "HD현중은 여러 번 청렴서약을 어겼지만 어떤 제재도 받지 않았다"는 의견들입니다. 방사청의 한 고위직은 "'특정 업체 봐주기는 아니'라고 항변하고 있지만 솔직히 부끄럽다"고 토로했습니다.
13명 송치됐는데 몰랐다?
방첩사령부는 2019년 KDDX 기밀탈취 사건 관련 피의자 25명을 검찰에 송치했습니다. 방첩사 역사상 단일 사건 최대 송치 기록입니다. 이중 13명은 군인 또는 군 관계자입니다. 군인은 방사청 소속입니다. 군 관계자들이라고 해봐야 방사청, 그리고 예하의 국방과학연구소, 국방기술품질원 직원입니다. 13명 대부분이 방사청과 직접적으로 연결됩니다.
13명이나 송치됐으니 방사청은 발칵 뒤집혔을 만 한데 2019년과 2020년의 방사청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행동했습니다. 방사청은 2019년 9월 복수의 벌점 조항을 삭제 또는 수정했습니다. 2020년 5월 시작된 KDDX 기본설계 입찰에서 HD현중에 결정적 이점으로 작용한 조치입니다. 당시 방사청장이었던 왕정홍 씨는 국회 국방위 국감에서 "KDDX가 아니라, 잠수함 관련 기밀유출 사건이 있는 줄 알았다"는 엉뚱한 발언을 하기도 했습니다. 언론의 기밀탈취 사건 대서특필에도 아랑곳 않고 방사청은 2020년 12월 HD현중과 KDDX 기본설계 사업 계약을 체결했습니다.
방사청은 HD현중 못지않게 도덕성 이슈에 얽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공공기관이기 때문에 HD현중보다 오히려 도덕적 책임이 더 무겁습니다. KDDX를 잘 짓기 위해, 또 요즘 잘 나가는 K-방산의 발목을 걸지 않기 위해 방사청은 자신들이 눈 감은 것이 무엇인지 먼저 돌아봐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