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여행 때는 "비포 선셋"에서 제시와 셀린느가 재회한 서점 셰익스피어앤컴퍼니에 가보지 않을 수 없었고, "비포 미드나잇"의 배경인 그리스의 바닷마을 카르다밀리는 여전히 버킷 리스트에 있습니다.
특히 지역의 풍광이('풍경' 아닙니다) 아름답거나, 로컬리티가 강하게 묻어있는 영화일수록 끌립니다. 미국 인디애나주의 소도시 콜럼버스("콜럼버스")와 핀란드 헬싱키("카모메 식당")에 가보고 싶은 이유입니다.
꼭 해외로 가야 하는 건 아닙니다. 이준익 감독의 "변산"을 본 뒤, 그해 여름 휴가지는 전북 변산이었고, 어느 봄에는 군산으로 여행가서 "8월의 크리스마스"를 찍은 사진관에 들렀습니다. 서촌에 살 때는 "건축학개론"에서 수지와 이제훈이 추억을 만들던 한옥을 지나가기 위해 큰길을 놔두고 일부러 골목길로 둘러가곤 했습니다.
그런데 지난해 겨울, 어떤 영화를 보고 나서부터 진해에 가보고 싶어졌습니다. "창밖은 겨울"이라는 독립영화입니다. 벚꽃 철이면 전국에서 온 인파로 북적이는 진해지만, 이 영화에 나오는 늦가을의 진해는 약간은 퇴색한 채로, 근대적 풍경을 간직한 한적한 도시였습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이 영화에 눈길이 갔던 건 오래된 동네와 골목길이 살아 있는 소도시의 풍경 외에도 매표원을 연기한 한선화 배우와 그의 자연스러운 의상과 단발, 그리고 사투리 연기 때문이었습니다.
"혹시 저↘ 좋아↗하세요↘?"
바빠 죽겠는데 맨날 매표소에 와서 자신이 맡긴 분실물을 찾으러 온 사람이 있냐고 묻는 남자 주인공에게 퉁명스럽게 쏘아붙이는 경상도 사투리 인토내이션과 단도직입적인 솔직함이 어찌나 매력적이던지요.
지난 주 개봉한 독립영화 "교토에서 온 편지"에도 한선화 배우가 주연으로 나옵니다. 어릴 적 고향인 교토를 떠나온 뒤 한 번도 만나지 못한 일본인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엄마를 바라보는 세 자매의 시선을 따라가는 영화입니다.
한국말도 배우지 못한 채로 한국인 아버지를 따라 부산 영도에 정착한 엄마는 남편 사후에 억척같이 세 딸을 키웠습니다. 반은 일본인이지만 엄마는 일본인 티를 내서는 안되는 시절을 버텨야 했습니다.
- 엄마: 아가(둘째가) 서울서 고생이 많은 모양이더라.
- 첫째 딸: 서울살이가 무슨 벼슬이가?
- 엄마: 고향 떠나면 다 글타…
작가가 꿈인 둘째는(한선화) 서울에서 방송 작가로 일하며 등단을 꿈꾸지만 실패를 거듭하며 약간은 지친 상태로 고향에 내려옵니다. 지역에서 풀타임으로 일해줄 수 없느냐는 지역 방송국의 제안을 받지만 서울에 살아야 꿈을 이룰 수 있다는 생각에 망설입니다.
한선화는 이 영화에서 한층 안정된 (사투리)연기로 젊은 세대가 바라보는 지역과 서울의 간극을 잘 보여주고, 과장되거나 희화화되지 않은 실생활 사투리로 영화의 현실감을 높입니다. 엄마 역의 차미경 배우와 첫째 딸 역의 한채아 배우 등 다른 주연 배우들과 감독 또한 부산 출신이라 자연스러운 사투리 연기는 물론, 여행자의 눈으로 포장되지 않은, 생활인/지역민의 눈에서 본 부산 영도라는 공간의 진짜 풍경이 잘 드러납니다.
"창 밖은 겨울(2022)"과 "교토에서 온 편지(2023)"를 보고 나서 한선화의 장편 영화 데뷔작인 "영화의 거리(2021)"까지 찾아보게 됐습니다. 이 영화 역시 부산이라는 '로컬'이 배경인 독립영화이고, 한선화 배우가 바로 이 영화에서부터 사투리를 구사하는 젊은 부산 여성 배역을 맡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영화의 거리"는 영화 감독을 하겠다며 서울로 떠나버린 구 남친(이완)과 부산에서도 충분히 영화 일을 하며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로케이션 매니저 구 여친(한선화)이 우연히 영화 제작 과정에서 다시 만나 티격태격하며 다시 감정을 만들어가는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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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귄있다'라는 표현을 아시는지요?
지난 해 베스트셀러 "아버지의 해방 일지"에 나오는 전라도 방언입니다. 전남 구례 출신 정지아 작가의 이 소설 덕분에 저는 '귄있다'라는 사투리 말을 알게 됐습니다.
'귄있다'는 거칠게 요약하면 '보면 볼수록 정이 가고 매력이 있다' 정도의 뜻이라고 합니다. 이 밖에도 '말투나 행동이 싹싹하고 붙임성이 있다, 귀염성 있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고 하네요. 나이지긋한 전라도 사람들은 물론이고 전라도 출신의 30대 이상이면 모두 알고 있는 말인 것 같은데, 저는 금시초문이라는 사실이 저 스스로도 놀라웠습니다. 처음 들었을 때부터 한국 사람이면 누구나 써 볼만한 멋진 뉘앙스와 어감을 가진 표현이라고 생각했지만, 저는 아직 이 단어를 적재적소에 정확한 뉘앙스로 사용할 자신은 없습니다.
저 역시 표준어로 균질화된 언어 환경 속에서 살아오다 보니 제대로 알지 못합니다만 사투리만이 표현할 수 있는 로컬리티, 뉘앙스, 정서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 말들이 사어(死語)가 되지 않고 제자리를 지켜서, 점점 더 두루뭉술하고 뭉뚱그려지고 있는 대중의 언어(이를테면 뭐든 '대박'하나로 다 통하는)습관에 자극이 됐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이달 초 타계한 6,70년대 '문예영화의 대부' 김수용 감독의 필모그래피엔 "갯마을", "산불", "토지" 등 명작 소설을 영화화하면서 방언과 토속어를 살린 작품들이 많았습니다. 또 8,90년대까지도 각 지역의 방언과 토속어 냄새가 물씬 나는 소설이며 TV드라마, 영화가 적지 않았지만 근래에는 비속어와 욕설에 가까운 희화화된 사투리만 오로지 흥미거리를 위해 동원된다는 인상이 없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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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그룹 출신의 젊은 여배우가 부산 사투리를 쓰는 젊은 여성 배역을 맡아 3년 동안 매해 한 편씩의 독립영화, 그것도 로컬리티가 분명한 영화를 내놓기는 쉽지 않아 보입니다. 이미지가 고착화될 수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그 선택의 결과물은 꽤 좋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보기에는 "영화의 거리"보다는 "창밖은 겨울"이, "창밖은 겨울"보다는 "교토에서 온 편지"에서 한선화 배우의 연기가 뛰어납니다. (부산 사투리) 연기도 날로 자연스러워지는 게 눈에 보일 정도라고 할까요.
한선화 배우처럼 현대물에도 사투리로 자연스러운 연기를 할 수 있는 젊은 배우들이 많아졌으면 합니다. 그러러면 로컬리티가 살아 있는 영화들이 꾸준히 나와야 하겠죠. 한선화가 연기한 세 편의 '지역 영화'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모두 30대 초반 젊은 감독들의 데뷔작이라는 점, 감독들이 자전적 이야기로 자신들의 고향에서 영화를 찍었다는 점, 그리고 고향에 뿌리를 내리고 사는 청년들과 서울로 떠난 청년들의 이야기가 함께 등장한다는 점입니다. 이 영화들을 보면서 지역 젊은이들의 미래에 대한 고민과 고뇌를 피상적으로나마 느낄 수 있었습니다.
다양한 지역의 사투리로 연기하는 배우, 다양한 로컬의 풍광뿐 아니라 현실도 반영하고 보여주는 영화를 보고 싶습니다. 지역 문화와 사투리는 다양하다는 그 자체로도 존재의 의미가 있습니다.
가끔 부산에 갈 때면 거의 부산역과 해운대 근처만 오갔습니다. 그게 부산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교토에서 온 편지"와 "영화의 거리"에서 보는 부산은 사뭇 달랐습니다. 이 영화들 속 부산은 관광지일 뿐만 아니라 사람 사는 공간이었습니다. 게다가 "영화의 거리" 속 주인공 선화는(실제 배우와 배역의 이름이 같습니다) 직업이 로케이션 매니저이니 얼마나 멋진 곳들이 영화에 나오던지요. 언젠가 부산에 가거나 진해에 가면 변산에서 그랬던 것처럼 영화 속 장소들을 한번 찾아가 보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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