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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브스夜] '꼬꼬무2' 국가를 사랑했지만 국가에 버림받은 오소리…영화 '실미도'의 진실

[스브스夜] '꼬꼬무2' 국가를 사랑했지만 국가에 버림받은 오소리…영화 '실미도'의 진실
약속을 지키지 못한 그곳에 국가는 없었다.

18일에 방송된 SBS '꼬리에 꼬리는 무는 그날 이야기 시즌2'(이하 '꼬꼬무2')에서는 오소리 작전에 대해 조명했다.

이날 방송에는 김여운, 이이경, 황제성이 이야기 친구로 등장해 이야기꾼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1971년 8월 23일 인천 25세 광순 씨는 10개월 아기와 버스에 올라 친정으로 향했다.

평범했던 일상은 버스가 갑자기 멈추면서 시작됐다. 갑자기 멈춘 버스의 문이 벌컥 열리더니 20여 명의 군복 입은 남성들이 총을 들고 등장했다. 그리고 이들은 버스 기사의 머리에 총구를 겨누며 청와대로 향하라고 명령했다.

군복을 입은 이들은 모두 총을 들고 있었고, 몇몇은 피까지 흘리고 있었다. 이들은 승객 한 명씩을 맡아 감시했고, 광순 씨와 아기도 한 남성에게 감시당했다. 그런데 이 남성은 아무 말 없이 광순 씨가 안고 있는 아기를 말없이 보다가 아기를 얼러주며 귀엽다는 말을 건넸다. 그리고 이때 광순 씨는 피를 흘리고 있는 남성을 위해 기저귀 가방에서 기저귀를 빼서 지혈을 하라고 건넸다.

잠시 후 버스 옆으로 경찰차들이 등장했고, 이에 남성들은 경찰들을 저격해다. 그리고 얼마 가지 않아 이 버스는 매복한 경찰들과 바리케이드로 사방이 가로막혔다. 이에 버스 안의 남성들은 흥분하기 시작했고 경찰들과 총격전을 펼쳤다.

그리고 이때 광순 씨 곁에 있던 남성은 자신의 손에 들린 수류탄을 보이며 "이거 터지기 전에 얼른 아기 앉고 의자 밑으로 숨으세요"라는 말을 남기고 동료들과 수류탄을 터뜨려 자폭했다. 아수라장이 된 버스 내부, 그러나 광순 씨는 남자의 조언 덕분에 아기와 무사히 목숨을 건졌다. 남성이 수류탄을 자신의 몸으로 덮친 덕분에 별로 다치지 않고 생존할 수 있었던 것. 그리고 이 남성은 수류탄을 터뜨리기 직전 광순 씨에게 주소 하나를 적은 쪽지를 건넸다.

그는 "제 이름은 박기수입니다. 열아홉에 집을 나와. 집에선 제 소식도 몰라요. 이 주소로 편지 좀 보내주세요"라는 이야기를 남겼다. 그러나 경황이 없었던 광순 씨는 그의 바람을 들어주지 못했다. 대신 이야기는 한 기자의 기사를 통해 신문에 실렸고 이를 본 박기수의 가족들이 신문사를 찾아 박기수가 죽은 이유에 대해 물었다. 이에 기자들은 1급 비밀이라 절대 알려줄 수 없다며 어떤 말도 해주지 않았다.

3년 전 홀연히 사라진 박기수, 그리고 그와 한날한시에 똑같이 사라진 것은 6명이 더 있었다. 초등학교 선후배 사이였던 이들은 배우지 못하고 넉넉하지 못했던 이들이었다. 이들은 먹고살기 위해 박 부장이라는 이를 소개받았다.

그리고 박 부장은 옥천 7인방을 향해 당시 최고급 담배였던 신탄진을 건네며 하나의 제안을 했다. 그는 "국가를 위해서 일해 볼 마음 있냐"라며 특수 훈련을 받고 임무를 완수하면 원하는 곳에 취직 보장은 물론 특별 대우를 약속했다. 그가 약속한 특별 대우란 공무원 1년 치 월급을 한 달 월급으로 주겠다는 것.

이에 7인방은 그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러나 국가 기밀이라는 이유로 가족들에게는 자세한 사정을 설명할 수 없었다. 고깃배로 어딘가로 향한 7인방은 무인도에 도착했다. 그리고 그곳에는 공군 소속의 군인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보름 전에 도착한 공군들은 군복이며 장비의 공군 마크를 모두 지우고 계급장도 바꿔 달았다. 또한 실제보다 높은 계급으로 바꾸고 이름도 모두 바꿨다. 그리고 무인도에 도착한 7인방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공군뿐만 아니라 자신들과 비슷한 처지의 수십 명의 남성들이었다.

섬에 도착하자마자 삭발을 하고 군복을 입고 연병장에 집합한 이들에게 누군가가 소리쳤다. 귀관들은 이 순간부터 명예로운 군인이며 오소리 작전에 도착한 것을 환영한다는 것.

무인도에 모인 총 31명의 훈련병은 청와대를 급습했던 북한 124부대에 대항해 김일성에 대한 보복을 목표로 만들어진 정예부대였다. 당시 죽을 위기를 넘긴 박정희는 중앙정보부에 북의 청와대 급습에 대한 응징과 보복을 명령했고 이에 중앙정보부 부장은 육해공군 참모 총장을 소집해 김일성의 거처인 주석궁을 습격하자는 결론을 내렸다.

이에 김신조 부대와 똑같이 맞춘 인원인 31명의 부대를 만들었고 이들을 훈련하는 것은 1급 비밀로 중정부와 최고위층만이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들은 오소리 작전이라는 이름 하에 실미도에 모여 훈련을 시작했다.

김일성 주석궁 습격이 목표인 오소리 작전, 이 작전에 내보낼 요원의 조건은 까다로웠다. 정전협정을 위반할 수 없어 군인의 신분은 무리였고, 이에 민간인들을 파견하려 했다. 이에 사형수와 무기수를 모을 계획이었으나 이 또한 무산됐다. 교도소의 재소자는 국가의 관리하에 있으므로 이들의 정체가 탄로 나면 국가에 책임이 돌아오는 것.

여러 가지 이유로 중정부가 물색한 인물들은 증발해도 흔적이 남지 않고, 돌아오지 않아도 상관없는 이들로 바로 힘없고 가난한 청년들이었다. 이에 당시 매혈을 하며 생계를 이어갔던 쪼록 군, 전쟁고아, 구두닦이, 넝마주이 등 입에 풀칠하기도 힘든 청춘들을 국가가 노렸던 것이다.

실미도 입소 첫날 아침, 이들은 눈이 휘둥그레 해질 밥상을 받았다. 고깃국에 고기반찬, 달걀, 흰쌀밥이 이들을 맞았다. 또한 이전에 약속했던 신탄진 담배도 이틀에 한 갑씩 지급됐다.

그러나 당근이 단 만큼 채찍은 가혹했다. 훈련관들은 섬의 유골을 파내어 뼈를 빻고 이를 오소리들에게 나눠 먹으라 지시했다. 그리고 남은 해골과 뼈로 부대 마크를 만들어 이를 항상 보도록 했다. 정신 무장을 위한 하나의 행위였던 것.

그리고 이들은 단 3개월 만에 북한 124군 부대를 능가하기 위해 맹훈련을 펼쳤다. 행군 중 뒤처지는 훈련병을 막기 위해 교관들은 뒤를 따르며 발 뒤꿈치에 총을 쐈고, 제한 시간 내에 도착하지 못하면 기관총을 발사하기도 했다. 이에 실제 훈련 도중 옆구리 관통상을 당하는 훈련병도 나왔다.

또한 지상 11미터 높이에서 외줄 타기 훈련을 펼쳤고, 이때 안전장치는 전무했다. 그리고 외줄 아래는 화강암이 있었고 훈련 도중 추락한 이들은 머리와 다리 부상을 당하며 부상 이후에는 부대 청소와 취사를 담당했다. 또 고된 해상 침투 훈련 중 탈진한 훈련병이 결국 사망하는 사건도 발생했다. 그러나 이렇게 죽은 훈련병의 생사는 가족들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그들의 죽음 또한 국가의 기밀이었기에. 당시 사망한 이의 묘는 아직도 실미도에 존재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3개월 만에 인간 병기가 된 오소리들. 그들은 실미도 입성 18개월 후 1969년 10월 드디어 작전을 준비했다. 작전 실행 직전 백령도로 향한 이들은 은밀한 침투를 위해 열기구를 이용한 공중 침투를 결정했다. 그러나 기다리고 기다리던 남서풍이 불던 날 돌연 작전은 취소되었고 즉시 실미도로 전원 복귀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베트남 전쟁이 한창이던 당시, 전쟁이 길어지며 미국은 피로를 호소했고 특히 닉슨 독트린 대통령은 "너희 나라 일은 너희가 알아서 하라. 우리는 빠지겠다"라며 주한미군 감축을 예고했던 것. 이에 오소리 작전의 실패 이후의 상황을 두려워한 박정희가 작전을 급하게 취소했던 것이었다.

무기한 보류된 오소리 작전, 이에 오소리들에 대한 관심과 대우도 확연히 달라졌다. 쌀밥에서 보리밥으로 바뀌었고 반찬 중 고기는 찾아볼 수 없었다. 또한 월급도 안 나온 지 오래였다.

박정희 대통령의 관심이 사라지며 오소리 부대에 대한 관리 감독도 허술해졌고 이에 오소리들에게 돌아가야 할 것들을 모두 누군가가 착복하고 있었던 것. 이러한 상황에 길어지는 고립은 곧 무슨 일이 터져도 이상하지 않은 분위기를 만들었다.

이에 당시 교육대장은 상부에 "이대로 두면 폭동 일어날 것"이라고 보고하며 오소리들을 하사관으로 임관하는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상부에서는 어떤 답도 주지 않았다. 대통령의 관심이 사라지니 중정부를 비롯해 군대에서도 오소리 작전에 발을 빼려 했던 것.

그러던 어느 날, 오소리 중 한 명이 기간병을 폭행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하극상을 벌인 오소리는 동료들에 의하 즉결 처리되었다. 사고 친 오소리를 연병장에 묶어 놓고 동료들이 몽둥이를 들고 죽을 때까지 때리는 방식이 실미도에서의 처리 방식이었고 이는 누구도 거부할 수 없었다. 이렇게 즉결 처분당한 이는 총 5명이었고 이런 룰은 서로가 서로에게 공포가 되도록 했다.

실미도에 고립된 지 3년, 처음 31명이었던 오소리는 이제 24명 만이 남았다. 당시 오소리들은 극한의 상황에 처했다. 국가는 어떤 약속도 지키지 않았고, 급식도 제대로 나오지 않아 뱀을 잡고 개밥까지 빼앗아 먹어 굶주린 배를 채워야 하는 상황이 됐다.

오소리 한 명이 숨겨둔 소주로 인해 작은 소동이 벌어졌고, 이를 시발점으로 오소리들은 터져버렸다. 그들은 청와대로 가 자신들의 억울함을 풀자며 폭동을 일으킬 계획을 세웠다.

1971년 8월 23일 월요일 새벽 6시, 오소리 하나가 교육대장실로 숨어서 잠든 교육대장을 제압하고 나머지 오소리들은 총과 실탄을 나눠갖고 흩어져 총격을 시작했다. 북한군의 침입이라 생각한 기간병들은 서둘러 총을 들고 대응 사격에 나섰다.

그러나 이미 상황은 역부족이었다. 20분간의 총격전으로 기간병 18명, 오소리 2명이 사망했다. 그리고 남은 오소리 22명은 실미도에 고립된 지 3년 4개월 만에 인천에 상륙했다. 지나가던 버스를 세우고 올라탄 이들은 무전을 받고 출동한 육군들과 총격전을 벌였다.

그리고 이들이 탄 버스는 타이어가 터지며 멈췄고, 이에 오소리들은 뒤이어 오던 버스로 갈아탔다. 이 버스가 바로 광순 씨가 탔던 버스였던 것. 그리고 이들은 경찰들의 포위에 전원 수류탄의 안전핀을 뽑아 자폭했다. 이는 실미도에서 나온 지 2시간 반 만에 벌어진 일이었다.

민간인 6명, 경찰 2명, 오소리 20명, 기간병 18명이 사망했고 서울 한복판에서 벌어진 총격전으로 정부는 긴급 기자회견을 열어 무장공비가 민간 버스를 탈취, 서울로 진출하다 저지당한 것이라며 비상계엄령을 발동했다.

그러나 얼마 후 국방부는 다시 기자회견을 열어 인천 앞바다 실미도에 공군이 관리 수용하던 군 특수범 24명이 격리 수용에 불만을 품고 난동, 관리 인원을 사살한 사건이라 밝혔다. 실미도에 끌려간 오소리들은 군에 있는 흉악범이라는 뜻의 군 특수범으로 정의했고, 이에 대해 일제히 보도했다.

이렇게 다 묻힐 것 같았던 사건은 당시 목숨을 건진 오소리 4명의 존재가 드러나며 반전을 기대케 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야당 의원들은 사건의 진상을 밝히기 위한 국회 진상 조사를 시작했고 생존한 오소리들을 증인으로 참석하게 했다. 그런데 오소리들의 대답은 예상과 달랐다. 이들은 질문에 비밀 사항이라 답할 수 없다며 답을 회피했던 것.

사실 이는 군 관계자의 회유와 협박 때문이었다. 군 관계자는 생존자들에게 모든 사실을 비밀로 하지 않으면 사형을 당할 것이니 모두 살기 위해 침묵하라고 했던 것. 또한 그들에게 생계를 위해 같이 월남으로 가자고 제안했다. 이에 생존자들은 침묵으로 약속을 지켰다. 그러나 국가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애초부터 지킬 생각이 없었던 것.

국가는 생존자 4명을 군사 재판에 넘겼고 이들은 모두 사형 선고를 받았다. 방송에서는 오소리들이 생전에 남긴 유서가 공개됐다. 한 오소리는 "살아생전 국가에 대해 말도 못 하고 죽어가는 게 아깝습니다. 제가 죽더라도 집에 알리지 말아 주세요. 바다 한 복판 섬에서 부모를 제대로 부르지 못하고 만 3년 동안 외롭게 지내고 김일성의 목을 베지 못하고 죽는 것을 유감으로 생각합니다. 애들 3남매가 제일 불쌍합니다. 보고 싶습니다"라고 억울함을 토로했다.

또 다른 오소리는 죽음의 앞에서 애국가를 부르며 "국가를 위해 싸우지 못하고 국민에 손가락질받으며 죽는 게 억울합니다"라는 한마디를 남겨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사형선고 70일 만에 사형 집행이 이뤄졌고, 이들의 사형에 대해서는 가족 누구도 알지 못했다. 그리고 누구도 말할 수 없었다. 정보부대나 중정부는 실미도에서 근무했던 기간병들이 제대할 때가 되면 그들을 찾아와 "20년 동안 함구하라. 보안 누설이 되면 군사 재판에 회부된다"라며 겁박했다.

그렇게 어느 누구도 진실을 알지 못할 것 같았던 사건은 30년 후 뜻밖의 사건을 통해 알려졌다. 2020년 월드컵 두 달 전 가스통 시위대가 등장했다. 이들은 자신이 북파공작원이라 주장했다.

사실 실미도의 오소리 부대 외에도 다른 북파공작원들이 존재했던 것. 이들은 민간인도 군인도 아닌 채 국가에 의해 투명인간이 되어 있었다. 당시 양성된 공작원이 13,000여 명이며 행방불명이 된 이들은 7,700여 명에 달했다. 그리고 이 사건으로 실미도 공작원 31명의 존재도 드러나게 됐다.

30년 만에 내 가족이 실미도 북파공작원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가족들은 억울함을 말로 다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유해라도 모시고 싶었던 가족들의 마음도 국가는 헤아리지 못했다.

한 목격자의 제보로 35년 만에 실미도 희생자들의 매장지가 발견되었고, 이 곳에서 버스에서 사망한 공작원들의 유해가 발견됐다. 집을 떠난 지 38년 만에 가족들을 유해로 다시 만나게 된 것. 그러나 그곳에는 버스 생존자이자 사형수인 4명의 유해는 없었고 이들의 유해는 지금까지도 찾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이경은 이들의 안타까운 사연에 "사실 나는 발에 문신이 있다. 내가 그린 태극기로 문신을 했다. 내가 태어난 이 나라에 내가 그린 태극기가 그려진 두 발로 딛고 자부심을 갖고 살려고 했다. 그렇게 생각했는데"라며 끝내 말을 잇지 못했다.

그리고 장항준은 "국가는 조국이라고도 부른다. 할아버지 할머니부터 우리나라 핏속에 흐르는 나라라는 뜻이다. 그리고 모국이라고도 부른다. 엄마의 나라"라며 "어느 부모가 자식들을 이렇게 대하고 사지로 몰고 모른 척할 수 있나"라고 끝까지 비겁했던 국가의 태도에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마지막으로 그는 "영화 람보에서 람보가 사지에서 돌아와 이런 대사를 한다. 우리가 국가를 사랑했던 것처럼 국가도 우리를 사랑해줬으면"이라며 약속을 지키지 않고 믿음을 저버리는 국가가 아닌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을 소중하게 여기고 사랑하는 국가가 되어주길 바라는 마음을 전했다.  

(SBS연예뉴스 김효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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