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 씨를 범인으로 몰고 간 것은 그토록 잡고 싶어 했던 이들의 잘못된 집착 때문이었을까?
2일 방송된 SBS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는 '치밀한 조작인가? 살인범의 게임인가? - 화성 8차 사건의 진실'이라는 부제로 화성 8차 사건에 대해 조명했다.
지난 10월 1일 화성 연쇄살인사건의 범인 이춘재는 그동안의 여죄를 자백했다. 그중 하나는 22세 농기계 수리공 윤 씨를 범인으로 체포했던 화성 8차 사건이었다.
이에 윤 씨는 30년 전 사건이 당시 가혹 행위와 강압에 의해 허위 자백을 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당시 수사 관계자들은 이에 대해 강력하게 부인했다. 그들은 윤 씨가 스스로 자백을 했다고 했다.
당시 윤 씨를 범인으로 체포한 결정적인 단서는 현장에서 발견된 체모에 대한 중성자 방사화 분석법에 의해 드러난 범인의 혈액형과 직업 때문이었다. 특히 경찰은 현장에서 발견된 체모와 윤 씨의 체모가 동일인이 아닐 확률은 3600만 분의 1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20년형의 억울한 옥살이를 한 윤경식 씨는 "이춘재가 자백을 했다고 연락이 왔더라. 사실 나는 고맙게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밥을 먹고 있는데 최 형사가 잡아갔다. 당시 형사들이 7명 정도 와서 차에 태운 다음에 수갑을 채웠다. 차에 태워서 바로 경찰서에 가지 않고 산으로 갔는데 그건 겁을 주려고 했던 거 같다. 그 시대에는 누구 하나 죽어도 된다는 생각을 했던 거 같다. 나 하나 죽어도 된다고 생각했을 거다"라고 당시를 떠올렸다.
이어 그는 "3일 밤낮을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했다. 쪼그려 앉으라고 해서 앉았는데 뒤에서 갑자기 발로 차고 주먹으로 때렸다. 그러면서 계속 자백을 하라고 했다. 거의 3일을 계속 지냈다. 어디서는 5시간 반? 4시간 반이 걸려서 자백을 했다는데 절대 아니었다"라며 "자백을 하면 7년, 10년 정도라면서 사형보다 낫다고 하더라. 내가 죄가 없는데 왜 7년형을 살아야 하냐 물었는데 네가 죄를 지었으니까 자백을 해야 한다고 했다. 난 간강 살인을 하지 않았다"라고 설명했다.
또한 그는 당시 증거로 채택된 체모에 대해 "그건 조작이다. 왜 거기서 내 체모가 나왔다는 건지 모르겠다. 그리고 내가 체모만 6번을 뽑아줬다"라고 했다.
그러나 당시 수사 관계자는 이춘재는 왜 안 했던 짓을 했다고 하냐 라며 윤 씨에 대한 가혹 행위는 없었다고 일관되게 주장했다. 또한 그는 당시 범인의 혈액형과 이춘재의 혈액형은 맞지 않다며 이춘재의 자백을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방송은 당시 10여 장에 이르는 윤 씨의 자필 진술서를 입수했다. 그리고 진술서에는 초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윤 씨보다 경찰이 쓸 법한 어휘들이 다량 발견되었다. 이에 윤 씨는 형사가 쓰라고 하는 대로 썼다고 주장했다.
당시 윤 씨가 일했던 농기계 수리점 사장. 그는 윤 씨의 조서 작성에 입회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사장의 이야기는 달랐다. 사장은 "형사들이 윤 씨를 잡아가기 한 달 전부터 지켜봤다고 하더라. 너무 섬뜩했다"라며 "조서 작성이 다 끝나고 다음 날 오라고 해서 갔다. 내가 가서 윤 씨를 부르는데 날 몰라보더라. 그런데 그때 느낌에 쟤가 매를 맞은 건가, 잠을 못 자서 그런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라며 "네가 했냐고 물었는데 아무 말도 하지 않더라. 그런데 그때 경찰이 녹음된 내용을 들려줬다. 끝부분에 제가 했습니다 하는 말이 나왔다. 다른 말은 듣지 못했다. 그게 전부다. 조서 작성에 입회하지 않았다"라고 했다.
또한 그는 조서에 나와있는 윤 씨가 범행을 저지른 시각 윤 씨가 외출을 나가는 것을 전혀 몰랐다고 말했다. 당시 그의 집 구조상 누군가의 외출을 모르는 것은 어려운 상황. 이에 사장은 진술의 석연찮음을 다시 강조했다. 그리고 그는 "손으로 경운기를 돌려서 항상 손에 기름때가 범벅이다. 그런데 현장에는 기름때가 전혀 없었다"라고 말했다. 실제로 당시 현장이나 범인이 벗긴 것으로 드러난 피해자의 옷에는 기름때는 일체 발견되지 않았다.
그리고 당시 담을 넘은 것으로 진술한 윤 씨. 그러나 윤 씨는 소아마비로 담을 넘는 것은 불가능한 상황. 이에 당시 수사관들은 "담 넘는 것을 봤다. 담을 넘어 착지까지 제대로 했다"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현장 검증을 지켜본 이웃들의 이야기는 달랐다. 이웃들은 "담에 올라가라고 하니까 애가 못 올라가니까 옆에 있는 벽돌을 놓으면서 올라가라고 하더라. 다리가 후들거리는데 형사들이 옆에서 붙잡고 다리를 올리게 했다. 그 모습을 차마 볼 수 없었다"라고 했다. 이 부분에 대해 이춘재는 담을 넘지 않고 문을 통해서 침입했다고 자백했다. 특히 그의 집은 피해자이 집 인근. 범행 후 도주에도 용이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범죄 심리학자는 윤 씨의 진술에 대해 "윤 씨가 말하는 범행 동기를 보면 지나치게 길고 장황해서 마치 윤 씨가 범인이라는 것을 믿게끔 만들기 위한 누군가가 설명하는 것 같다"라고 분석했다. 또한 "강간 사건의 동기라는 것은 달리 없다. 그렇게 자세하게 진술할 필요가 없다"라고 덧붙였다.
또한 법의학자는 피해자의 목에 드러난 상처에 대해 "주택 내에서 일어난 사건이라 소음에 신경을 썼을 거다. 입안에 뭔가 가격 후 집어넣고 목을 졸랐을 가능성이 있다. 그런데 굉장히 노련한 범죄자 스타일이다"라며 "부검 사진을 보면서 목에 있는 상처가 낯설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당히 화성 연쇄 살인 사건 2차 사건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라고 설명했다. 그리고 맨손으로 꾹 눌러서만 나올 수 없는 상처다. 충동적이 아니라 계획된 범행으로 보인다"라고 분석했다.
8차 사건 이전 이춘재가 저지른 강도 예비 사건. 당시 이춘재는 과도와 면장갑을 준비해서 범행을 시도한 바 있다. 이에 8차 사건 당시 이웃은 "밤에 지름길로 집에 가는데 누군가가 저를 넘어뜨리고 한 손으로 막고 목을 누르다가 지나가던 행인 때문에 그가 달아났다. 얼굴을 0.1초라도 봤을 텐데 그것보다 입을 막던 가죽장갑의 느낌만 기억난다"라고 했다. 혹시 이는 이춘재가 아니었을까?
또한 범행의 결정적인 증거로 나타난 체모의 진실은 무엇일까? 당시 지역 주민은 "8차 사건 후에 B형의 남자들은 거의 다 체모를 뽑아갔다. 학생들도 잡아갔다"라고 했다.
그리고 이전 사건에서는 결정적인 단서가 되지 못한 체모와 모발. 그러나 8차 때 체모가 결정적인 증거가 되었다. 당시 국과수 생물학 과장인 최상규 박사는 "피해자의 몸에서 음모 10여 개가 발견됐다"라고 진술했다. 그리고 제작진을 만난 최상규 박사는 "경찰이 증거물을 가지고 왔는데 음모가 발견되었다고 하더라. 모양도 특이했다. 파상모로 파도 물결이 있는 음모였다. 그리고 혈액형 검사를 여러 차례 검사를 했고 오류일 가능성은 전혀 없다"라고 단언했다.
당시 경찰은 체모에서 발견된 티타늄 성분으로 용의자를 특정했고, 그 과정에서 윤 씨가 범인으로 특정했다. 윤 씨는 "4월인가 5월에 찾아왔다. 그리고 이후에도 찾아와서 몇 번이고 체모를 뽑아달라고 했다. 난 잘못이 없기 때문에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라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직업 환경 전문가들은 "희귀 물질인 브롬에 집중하지 않은 것이 의문이다. 과연 동일한 시료일 수 있을까 의심스럽다"라며 이 정도의 함량은 용접공으로 특정할 수 있는 양이 아니다. 결과를 보면 이춘재의 작업 환경과 동일할 확률이 더 높다고 볼 수 있다"라고 했다.
또 다른 전문가는 "3600만 분의 1의 확률로 동일인이라고 하지만, 같은 직업군이라면 1000분의 1일 수도 있다. 이 확률 자체를 믿을 수 없다"라고 말했다. 또한 "체모 단 몇 개만으로 범인을 특정하는 것은 굉장히 위험한 일이다. 현재 프로토콜은 최소 40수를 뽑게 되어 있다. 부위마다 다를 수 있다. 해석의 문제고 하나의 보충 증거일 수는 있는데 이걸로 딱 맞다는 이야기는 할 수 없다"라고 했다.
당시 두 번이나 체모 검사를 받았던 이춘재는 왜 수사에서 배제되었을까? 그의 체모 결과는 모두 달랐다. 1차 검사에서는 B형, 2차 검사에서는 O형으로 드러났다. 이에 전문가는 "개인 간의 차이가 있을 수 있고 증거물 자체가 오류가 날 수도 있다. 증거물이 어디에서 어떻게 수집되었냐에 따라 결과가 다를 수 있다. 모발은 하나가 증거물 하나다. 전체 8점이 수거되면 8점을 모두 분석되었는지 모두 동일한지도 살펴야 한다"라고 했다.
법의학자는 "질 내부에서 체모를 체취를 했다면 가장 중요한 증거일 텐데 부검 기록에 남아있는 증거는 없었다"라고 밝혔다.
당시 분석을 했던 박사는 "11개의 체모 중에 2개 정도 골라서 분석을 했다. 그리고 체모 중에 모두가 특이한 모양은 아니었다"라고 했다.
외국의 중성자 방사화 분석 전문가는 "원자로에서 중성자를 오랜 시간 노출시키면 훼손될 수 있다. 보고서에는 15회 노출을 한 것으로 드러나는데 여러 차례 노출해서 증거물을 훼손시키면 안 됐다. 왜 이렇게 했는지 이해할 수 없다"라고 분석했다. 그리고 당시 검사를 맡았던 국과수는 이에 대한 답변을 하지 않기로 했다는 회신만 보내왔다.
전문가는 분석 보고서에 대해 "오류가 많은 보고서다. 두 샘플이 동일인의 것이 아닐 수도 있다"라고 했다. 이에 제작진은 당시 감정서를 윤 씨에게 보여주었다. 보고서를 처음 본다는 윤 씨는 "아이고 미치고 환장하겠다. 뭐가 나왔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그런데 난 뭘 봤어야 말이지. 나같이 용접하는 사람이 한 둘이냐. 이걸 갖다 놓고 자기들끼리 짜 맞추기 한 거 아니냐. 열 받네"라며 답답해했다.
이에 당시 수사 관계자는 "판례상으로 인정을 못 받는 건데 위에서 판례상으로 인정받아보자 하는 이야기가 나왔다. 그래서 저녁에 연행하고 새벽에 자백을 받은 거다"라고 했다.
지난 10월 26일 윤 씨는 다시 경찰서를 찾았다. 변호사에게 모든 것을 일임한다는 윤 씨. 이에 변호사는 "이 사건의 재심은 수월할 거 같다. 윤 씨가 쓰지 않았는데 윤 씨가 쓴 것으로 된 자술서가 발견됐다. 수사 관계자가 대필을 한 것일 거다. 이것은 진술을 강요했다는 큰 증거다"라고 했다.
또한 변호사는 "이춘재의 자백은 영상 녹화가 되어 있고 진술 내용에는 이춘재만이 할 수 있는 연쇄 살인 사건과 연관 지어 무릎을 탁 칠 수밖에 없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고 한다. 언론에 한 번도 공개된 적 없는 현장 사진과 이춘재의 자백과 꼭 맞는 부분까지 드러났다"라고 말해 눈길을 끌었다.
윤 씨에 대한 강한 집착을 드러난 경찰. 이에 권미혁 국회의원은 "이 사건을 해결해야 한다는 사회적 압박에 의해서 죄가 없는 사람도 범인으로 만들 수 있는 확률이 있었다고 생각한다"라고 분석했다.
제작진은 윤 씨의 판결문에 적힌 판검사들을 찾아 과거의 판결에 대한 이유를 물었다. 대부분의 이들은 사건과 판결에 대해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특히 주심 판사는 "내가 주심 판사였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윤 씨가 허위자백을 했다고 억울함을 강조했다면 기억나지 않을 리 없다. 그리고 지금도 난 판결을 잘못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라고 했다.
그리고 당시 국선 변호사는 "다른 재판으로 가서 앉아있다가 별 거 아니니까 국선으로 좀 하라고 해서 사건을 맡았다. 재판부에서도 당시 사건을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1심에서 자백을 한 사건이라 전혀 신경을 안 썼다"라고 말했다.
실제로 윤 씨는 3차 재판까지 변호사와 접견을 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항소가 가능했던 건 구치소에서 만났던 운동권 학생들의 도움 덕이었다. 그리고 그가 재수사를 요청했으나 담당 검사는 그의 말을 무시해버렸던 것으로 드러났다.
하지만 당시 검사는 "수사에 최선을 다 했다. 자기 입으로 시인한 사건을 왜 그러냐. 이춘재가 자백을 한다고 하는데 머리가 아프다"라며 "윤 씨의 족적이랑 일치해서 범인을 확신했다. "억울하다고 한 마디만 했어도 그러지 않았을 거다. 그런데 전혀 기억이 안 난다"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수사 관계자는 구속 영장도 없는 상황에서 경찰은 윤 씨를 3일간 밤샘 조사하고, 검사는 사전 현장 조사를 했다는 사실을 밝혔다. 이것은 모두 불법 수사였다. 또한 강압 수사에 대해 관계자들은 최 형사의 소행이라고 입을 모았다.
윤 씨의 출소 후 그가 사회에 적응하도록 도움을 준 교화 복지회의 나호견 원장. 그는 "출소 후 내 손을 잡고 울면서 원장님만 제가 살인자가 아닌 걸 믿어주면 여한이 없겠다고 하는데, 너무 마음이 아팠다. 출소 후 10년이라는 시간을 한결같이 일했다. 얼마나 성실하게 사는지 그의 삶이 하느님을 움직였구나 하는 마음이 들었다"라고 지금이라도 밝혀진 진실에 안도했다.
체포 당시 22살이었던 윤 씨. 그는 당시 꿈에 대해 "학력도 짧고 배운 거라고는 기계 고치는 것 밖에 없어서 그걸로 그냥 먹고살고 싶었다. 농기구 가게 사장이 되는 것, 조그맣게라도 내 가게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라고 지난 세월에 안타까워했다.
재심을 앞두고 윤 씨는 체포 전 농기구점 사장 부부와 재회했다. 30년 만의 만남에 이들은 서로를 끌어안고 안타까움에 눈물을 흘리며 서로에게 미안함을 전했다. 그리고 이들은 이제라도 찾은 진실에 다시 환하게 웃었다.
억울한 30년을 보낸 윤 씨. 그는 "내 명예, 인생의 명예를 찾고 싶다. 돈은 필요 없다. 그건 벌면 된다. 나는 진실이 밝혀지길 바랄 뿐이다"라며 재심을 기다렸다.
마지막으로 방송은 8차 사건 당시 윤 씨가 아닌 이춘재의 자백을 받아냈다면 그 이후 벌어진 사건의 6명 피해자의 목숨은 구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고 안타까워했다. 또한 여러 차례 화성 사건의 취재를 진행하면서도 윤 씨의 억울함을 미쳐 알아채지 못했던 자신들의 무심함을 반성하며 앞으로는 더욱 힘없는 이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겠다 약속했다.
(SBS funE 김효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