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우는 역발산기개세(力拔山氣蓋世), '힘은 산을 뽑아내고 기운은 천지를 뒤덮는다'는 말처럼, 압도적인 기개와 무력을 자랑하는 장수였다. 그러나 홍문연에서 유방을 살려 보내는 실책을 한 뒤, 유방의 편에 선 한신이 이끄는 연합군과 결전을 벌여 패배한다.
힘은 산을 뽑고 기개는 세상 덮을 만한데
시운이 불리하니 오추마(항우의 준마 이름)도 나아가지 않네
말이 나아가지 않으니 어찌해야 좋은가
우희여! 우희여! 그대를 어찌하란 말인가
이미 죽음을 결심한 우희는 답가를 부르고, 항우에게 부담이 되지 않도록 자결한다.
한나라 병사 이미 초나라 공략해
사방에서 초나라 노래가 들려오네
대왕의 의기가 이제 다했다 하니
천첩이 어찌 살아갈 수 있으리오
'베이징 오페라'로 불리는 중국 경극의 대표작인 '패왕별희'는 바로 이 장면을 중심으로 만들어졌다. 첸 카이거가 감독한 1993년작 동명 영화는 경극 '패왕별희'를 모티브로, 중국의 현대사와 얽힌 경극 배우의 비극적인 삶과 사랑을 그려낸다. 장궈룽(장국영)이 평생 우희를 연기한 경극 배우 역을 맡아 섬세하면서도 강렬한 연기를 보여준 영화다.
국립창극단은 이 '패왕별희'를 판소리에 경극의 연기를 결합한 창극으로 새롭게 탄생시켰다. (14일까지, 국립극장 달오름극장). 50년간 경극을 수련하고 연기해온 배우이면서 경극을 바탕으로 현대극을 만들어온 타이완 출신의 연출가 우싱궈를 초빙했다.
극본을 쓴 린슈웨이는 경극 '패왕별희' 대본을 바탕으로 경극 '홍문연', 그리고 '사기'를 참조해서, 홍문연 장면과 한신 이야기를 추가했다. 의상 디자인은 영화 '와호장룡'으로 아카데미 미술상을 수상한 예진텐이 맡아서 시각적 쾌감을 더했다. 작창과 음악감독을 맡은 소리꾼 이자람은 '경극을 품은 창극'의 음악을 새롭게 만들어냈다.
경극은 동작 하나하나가 상징적인 의미를 지니며 고도로 양식화되어 있다. 딱딱 끊어지며 액센트를 주는 동작들이 많다. 그런데 우싱궈의 표현대로라면 이렇게 '포인트를 잡는 동작'들이 절절한 판소리의 흐름과 뜻밖에 잘 어울렸다. 판소리 '적벽가'와 '춘향가'를 뿌리로 삼았다는 이자람 작창의 절묘함, 그리고 낯선 경극의 어법을 수없이 연습했을 배우의 노고가 느껴졌다.
장국영도 연기했던 우희 역은 남자배우가 하는 경극의 전통에 따랐는데, '판소리 아이돌'로 불리는 국립창극단원 김준수의 우희 연기는 압도적이었다. 섬세한 손끝 연기와 고난도의 검무까지 유려하게 소화해 우싱궈에게 '한국의 매란방'이라는 찬사를 들었다. 중국의 전설적인 경극 배우 매란방에 비교하며 타이완 관객들에게도 보여주고 싶다고 했으니, 이는 아낌없는 찬사다. 나 역시 김준수의 팬이 되어버렸다. (가수이며 뮤지컬 배우 김준수와는 동명이인이다)
우희와 로맨스까지 곁들인 항우의 드라마틱한 삶과 비장한 최후는 객관적 역사적 평가와는 상관없이, 국경을 넘어 한국인들까지 매료시킨다. 또 항우와 우희, 유방 외에도 한신, 여치, 장량, 범증 등 수많은 등장인물들이 우리에게 낯설지 않다.
창극에는 유방이 항우 휘하에 있던 한신을 '과하지욕(袴下之辱)', 즉 가랑이 밑으로 기어가는 치욕을 당했던 장수로 언급하는 장면이 나온다. 한신은 젊은 시절 깡패의 위협을 받아 '과하지욕'을 겪었고, 이 단어는 '훗날의 큰일을 위해 당장의 분함을 참는다'는 뜻이 되었다. 창극에 나오지는 않지만 한신은 유방이 패권을 잡은 이후 내쳐져 '토사구팽(兎死狗烹)' 당했다. 토끼가 죽으면 토끼 잡던 사냥개도 필요 없어져서 주인이 삶아 먹는다는 뜻이다.
중국의 역사와 민담, 설화가 우리 한국인들에게도 얼마나 친숙한지 새삼 실감하게 되었다. 그러고 보니, 판소리 중에도 '적벽가'는 중국에 뿌리를 둔 이야기다. 하지만 피 말리는 권력다툼과 참혹한 전쟁, 이 속에서도 이어지는 민초들의 삶은 어디에서나 통하는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 초나라 병사들이 우리 사투리를 쓰면서 등장하는 장면을 보니 더 그런 느낌이 들었다.
창극은 최근 몇 년간 오페라와 그리스 비극 등 다양한 장르와 교류하며 새로운 시도를 해왔다. 창극 공연을 찾는 젊은 관객들은 창극을 신선하고 흥미로운 장르로 재발견하고 있는 중이다. 지극히 한국적인 것과 지극히 중국적인 것이 만나 탄생한 창극 '패왕별희' 역시 새로운 발견이다. 전통을 원형 그대로 보존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시대와 사회의 변화에 맞춰 끊임없이 새롭게 발견되는 전통, 이게 바로 공연예술의 역동적 매력일 것이다.
(사진=국립극장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