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포구를 벗어난 길은 다시 바닷가를 에둘러 흘러간다
● '인생은 선(線)이 아니라, 점(點)이 연속되는 것'
포구를 벗어난 길은 다시 바닷가를 에둘러 흘러간다.
제법 길이 험하고, 거칠다. 바닷가의 절벽을 따라 이어지는 길은 아스라하다. 그나마 난간이 있어 길은 걸을 수 있는 '길'이 되었다. 길은 절벽을 따라 흐르다가 또 다른 절벽 앞에서는 계단을 타고 오른다. 사람들은 한눈팔 새도 없이 앞사람을 쫒느라 분주하다.
그 사이에도 파도는 저 홀로 들이치고 또 멀어져 간다. 그렇게 왔다가 스러지는 파도에게서 나름 스릴이 느껴진다. 쑥대머리를 풀어헤치고 가없이 밀려들며, 두 팔 벌려 격하게 환영하는 그들의 품에 안겨도 좋을 것만 같은데… 아서라,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 그들과 우리의 길은 애초부터 다르니 욕심내지 말지어다.
하지만, 비록 더딘 걸음이 스스로를 안타깝게 하지만, 그런들 또 어떠랴. 가고 있음이 중요하지 않을 것인가. 제 길을 제 속도에 맞춰 걸으면 될 듯싶다.
그래서일까. 문득 새벽의 시간을 넘어 망망한 대해와 나란히 걷고 있는 사람들과 나를 바라보며, '집에서 나온 순간, 그 자체가 이미 여행'이며, '목적지를 향해 가는 모든 순간이 여행'이라던 아들러(Alfred Adler)의 말이 떠오른다.
아들러는 설사 목적지에 도착하지 못하더라도 여행을 하지 않은 것이 아니고, 결국 인생마저도 여행인지라, 그 인생을 바꾸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용기'라고 말했었다.
그는 '인생은 선(線)으로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점(點)이 연속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비록 그것이 선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연속된 작은 점이라고… '선처럼 보이는 삶은 점의 연속, 다시 말해 인생이란 찰나의 연속'이라고… 그래서 우리는 '지금, 여기'를 살아갈 수밖에 없으며, '우리의 삶이란 찰나 안에서만 존재한다.'는 것이 그의 가르침이다. 그리고 그 찰나를 잘 살기 위해 스스로를 사랑할 '용기'가 필요하다고 그는 말한다.
자신을 믿고, 스스로 최선의 길을 선택했다면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자신을 사랑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지고 묵묵히 나아가라는 아들러의 말은, 그래서 타당해 보인다.
천상병 시인은 그의 시, <귀천(歸天)>에서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과 함께 '손에 손을 잡고 하늘로 돌아가리라'고 노래했었다. 인생이란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처럼 찰나의 순간이었음을 그 역시 노래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1967년, 시인은 '동백림(동베를린) 간첩단 사건'에 연루되어 6개월간의 심한 고문과 옥고로 몸과 마음을 상하고 만다. 이후 시인의 삶은 평생 가난과 음주벽이 뒤엉킨 방랑으로 점철되게 된다.
하지만 그는 무욕(無慾)과 순진무구함이 가득한 마음으로, 또 그 마음을 노래와 시로 엮어 절망과 고통의 삶을 찬란하고 아름다운 것으로 바꿔놓았었다. 삶과 죽음을 동시에 노래하면서 현실을 초월하고, 또 초연하게 삶의 모든 것을 바라보게 된 것이다. 이는 자신의 삶과 알몸으로 대면하고, 또 극복하고자 했던 그의 용기 있는 여정의 결과일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아직도 시인을 기억하는 이유는 아닐는지… 아마도 그러할 것이다.
시인의 삶이 그러했듯, 우리에게도 우리만의 소풍이 가다리고 있을 것이다. '이슬' 같은 삶을, '노을'로 승화시키며, 아름다운 '소풍'을 즐기다가, '하늘'이라는 마지막을 향해 우리는 묵묵히 걸어가야 하는 것이다. 그 양념이자 연료는 '용기 있게 나아가는' 삶의 자세일 것이다.
이슬 같은 삶이라서 허망할 수도 있지만, 그렇게 이슬 같은 삶이기에 우리는 촌음(寸陰)마저도 아껴 더욱 열심히 살아야 하는 이유를 더불어 발견해야 하는 것이다. 이마저도 걷는 이유가 된다.
비록 길은 험하고, 저질 체력이 앞길을 가로막을지라도 그냥 나아가는 것 말고 달리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그래도 더불어 나아갈 동행이 있지 않은가. 걸어온 길을 되짚어 보니 지나온 길은 아직 반에도 미치지 못한다. 아직도 시간은 길 위에 적잖이 남아 있음이 위로라면 위로다.
그렇게 벼랑 위의 길은 끝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이곳에다 길을 놓기로 하고, 기어이 그 길을 연 그들의 위험천만한 생각이 이렇게도 감동스럽고 고마울 줄이야. 새삼 많은 사람들이 이 길을 사랑한다면 길은 더욱 단단해질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길은 많은 사람들의 발자국들이 모여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길 위에서의 호젓한 걸음걸음은 바다와 마을과 그 마을의 사람들과 또 그들의 삶과도 이어져 있을 것이다. 그러면 그들과 만나게 될 걷는 이는 또 한 뼘만큼 세상을 향한 눈이 넓어질지도 모를 일이다. 지금의 나 역시 기대하는 바다.
빛살이 비끼는 바다 위에 작은 배 한 척이 한가롭다. 바다에 안기어 떠가는 그에게서 살짝 부러운 시샘이 인다.
혹여 그것이 아니라면, 그 옛날 주나라의 강태공이 그러했듯 때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일까. 가서 물을 수 없으니 그것을 알 길이야 없지만, 그들이나 나나 각자 나름대로 분주하긴 마찬가지인 듯하다. 누군가는 바다에 낚싯대를 드리우면서, 또 다른 누군가는 길 위에서, 그 길의 굴곡을 따라 걸으며 나름 열심히 살아가고 있었다.
바다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전망 좋은 곳에 해안경계를 위한 초소가 보인다.
가까이 다가가서 본 해안초소는 그 쓰임새가 다했음인지 폐가처럼 을씨년스럽다.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안보의 최전선이었을 경계초소가 이제 그 소용을 다했다니 그저 반가울 따름이다.
오랜 세월 동안 바다는 경계 철책 너머에 있었다. 다가가 안을 수 없는 경계의 저쪽이 바다였던 것이다. 바다는 그렇게 철조망으로 둘러쳐져 철조망의 틈새만큼씩 조작조각 난 채로 육지와 연결되었었다. 특히나 1996년, 이곳에서 멀리 않은 강릉 해안에 북한의 잠수정이 침투한 사건 이후에는 그 삼엄함이 더 엄혹했던 세월이었다.
사실 우리가 걷고 있는 블루로드 B코스의 바다를 에둘러 이어진 길들 역시 경계를 서기 위해 초병들이 개척하고, 또 그들이 매일같이 다니던 해안 초소길을 다듬은 것이다. 젊은 청년들이 찬바람 맞으며 걷던 그 길이 우리에게로 와서 트레킹로가 된 것이다. 문득 그들의 시간을 생각하게 된다. 새삼 우리가 누리는 모든 것들은 굳이 길이 아니라도 누군가의 희생과 노력 속에서 이루어진 것임을 다시금 깨닫게 된다.
폐쇄된 초소의 창문 너머로 사람들이 줄지어 걸어가고 있다. 이런 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저 그들의 발걸음은 분주하기만 하다.
절벽을 따라 이어진 길들이 아슬아슬하다. 그런 이유로 그 풍광이 화려하다. 비록 길은 험해도 이 수려한 바다와 길을 여기 아니면 어디에서 보고 또 걷는다는 말인가. 그러니 많은 사람들이 와서 걸어볼 일이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의 저자인 신영복 선생은 '갇힌 사람에게 '출소'의 가장 큰 의미는 혼자 걸어 다닐 수 있는 권리, 즉 독보(獨步)'라고 했었다. 감옥이라는 갇힌 곳을 나서 세상으로 나온다는 의미는 다름 아닌 마음대로 '걸어 다닐 수 있는' 자유였던 것이다. 너무나도 당연해서 그 가치를 모르고 사는 우리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러니 걸을 일이다. 가슴속 저 밑바닥에 엉겨 붙어 있는 묵은 때마저도 말끔히 씻어내는 바닷바람과도 맞서볼 일이다.
배는 항구에 있을 때 가장 안전하지만, 배는 항구에 머물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듯, 우리도 아마 그러할 것이다. 소파 위에서 뒹구는 것이 가장 안락하게 느껴질지는 몰라도, 집 안에서만 빈둥거리기에는 우리의 건강한 육신이 너무 아깝지 않은가.
길은 오르고 내리고를 반복한다. 걸어야 할 길이 저 멀리에서 어서 오라고 손짓을 하고 있는 것만 같다. 걸음은 느리고 마음만 급하다.
<3편에 계속>
- 자가용
해맞이공원이나 풍력발전단지 내에 주차 가능.
축산항에서 해맞이공원으로 돌아오는 방법은 농어촌버스 이용, 오보 해수욕장이나 대탄항 하차
● 먹거리
영덕대게는 12~5월이 제철. 6~11월은 금어기이므로 냉동 대게를 먹을 수 있음. 여름 별미를 찾는다면 물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