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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일 별세…한국영화에 인생 바친 진정한 '영화 예술인'

신성일 별세…한국영화에 인생 바친 진정한 '영화 예술인'
폐암 투병 끝에 별세한 고(故) 신성일은 마지막까지 영화에 대한 열정이 뜨거웠던 진정한 '영화예술인'이었다.

한국 영화계의 큰 별 신성일이 4일 오전 2시 30분 전남의 한 병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향년 81세. 한국영화배우협회 측은 이날 "한국영화배우협회 명예 이사장이신 영화배우 신성일이 4일 오전 2시 반 별세했다"라고 밝혔다.

고인은 지난해 6월 폐암 3기 판정을 받은 후 투병을 해오면서도 영화에 대한 식지 않는 열정을 보여줬다. 병마와 싸워 이겨내겠다는 의지가 강했고, 80세의 나이에도 향후 영화 관련 계획을 세우고 차근차근 추진해 나갔다.

폐암 선고 이후였던 지난해 10월, 자신의 회고전이 열렸던 부산국제영화제에 참석한 신성일은 "난 '딴따라'가 아니다. 난 종합예술 속의 한가운데 있는 영화인이라는 데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라고 말했다.

"의사가 기적이라고 하더라. 이제는 치료를 안 해도 될 정도라고 해서 7번의 방사선 치료를 받고 끝내는 것으로 했다. 모두 기초체력이 좋은 덕분인 것 같다"며 건강을 자신한 신성일은 향후 왕성한 활동을 예고했다. "요즘 '행복'이라는 작품을 기획 중이다. 요즘 드라마도 막장 드라마가 있고 영화도 잔인하게 복수하는 이야기가 많다. 영화가 너무 살벌하다. 난 따뜻하고 애정 넘치는 영화를 만들고 싶다"라고 밝혔다. 또 원작 작가랑 이야기 중이라며 소설 '바람이 그린 그림'을 영화화 할 계획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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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초 출연한 SBS '좋은 아침'에서도 고인은 "내가 원치 않은 것이 몸에 들어왔으니 쫓아내야겠다는 생각이다"며 "나에게 충실하고, 나 나름대로 건강하게 살고자 노력한다. 지금도 잘 살고 있다"라고 말했다. 그는 꾸준한 운동과 건강한 식단으로 몸상태를 관리하며 영화를 위해 쉬지 않고 움직였다.

세상과 작별하기 한 달 전에도 그는 영화인으로서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지난달 초 제23회 부산국제영화제 레드카펫 행사에 참석해 밝은 표정으로 대중에게 인사를 전하던 그였다. 그게 고인의 생전 마지막 대외 활동이 됐다. 고인은 오는 9일 신영균예술문화재단이 주최하는 올해 '제8회 아름다운 예술인상' 공로예술인상 부문 수상자로 선정돼 시상식 참석도 논의 중이었다.

고인은 한국영화사에 전무후무한 업적을 남겼다. '신성일'이란 이름을 빼놓고는 1960~70년대 한국영화를 감히 논할 수가 없다.

1937년 대구에서 태어난 신성일은 1956년 경북고를 졸업하고 가정형편이 어려워지자 무작정 상경했다. 우연히 눈에 들어온 한국배우전문학원에 들어가 3000대 1의 오디션 경쟁률을 뚫고 당시 신상옥 감독이 세운 신필름 전속 연기자가 되며 배우의 길을 걷게 됐다.

'신성일'이란 예명을 지어준 사람이 바로 신상옥 감독이었다. 본명은 강신영이었으나, 당시 신상옥 감독이 '뉴스타 넘버원'이란 뜻으로 지어준 예명 '신성일'을 주로 사용했다. 정계에도 진출했던 그는 국회의원 출마를 앞두고 '강신성일'로 개명했다.

1960년 신상옥 감독의 영화 '로맨스 빠빠'로 영화계에 데뷔한 고인은 '맨발의 청춘'(1964년), '별들의 고향'(1974년), '겨울 여자'(1977년) 등에 출연하며 큰 인기를 누렸다. 1960년대와 70년대 최고의 미남배우이자 청춘스타로 당대를 풍미했던 그가 출연한 영화는 무려 500여편.

한국영상자료원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에 따르면 출연 영화 524편, 감독 4편, 제작 6편, 기획 1편 등 한국 영화계에 길이 남을 만한 독보적인 활동이다. 1967년 한 해에만 주연으로 출연한 영화가 51편이다. 그가 가장 왕성한 활동을 펼쳤던 1964년부터 1971년까지 8년간 개봉한 한국영화가 1,194편인데 그 가운데 324편에 그가 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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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은 다수의 영화에 함께 출연하며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여배우 엄앵란과 지난 1964년 결혼했다. 당시 두 사람의 결혼식에는 약 4,000명의 인파가 몰려 지금까지도 '세기의 결혼'으로 회자되고 있다. 이들의 결혼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고인의 외도와 사업실패 등으로 40년 넘게 별거했다. 하지만 이들은 이혼하지 않고 힘들 때 서로의 곁을 지키며 인생의 동반자로서 삶을 함께 했다.

수상 이력도 화려하다. 1968년과 1990년 대종상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을 받았고, 부일영화상 남우주연상, 백상예술대상 남자최우수연기상,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남우주연상, 청룡영화상 인기스타상, 대종상영화제 공로상, 부일영화상 공로상 등 명성만큼 수많은 상을 수상했다.

1971년부터는 직접 연출을 하기도 했는데, 감독으로서 '연애교실', '어느 사랑의 이야기', '봄 여름 가을 그리고 겨울', '그건 너' 등을 만들었다. 1989년에는 '성일 시네마트'를 설립해 제작자로도 활동하며 '코리아 커넥션' 등의 작품을 제작했다. 영화 관련 단체 활동도 적극적이었다. 1979년 한국영화배우협회 회장을 맡았으며, 1994년에는 한국영화제작업협동조합 부이사장을 지냈다. 2002년에는 한국영화배우협회 이사장과 춘사나운규기념사업회 회장직을 맡았다.

60년 가까이 한국영화의 산 증인으로서 길이 남을 역사를 스스로 써내려간 신성일. 그가 추진하던 다음 작품 계획은 결국 실현되지 못하게 됐지만, '영화예술인'으로서 그가 보여준 영화에 대한 열정만큼은 영원히 대중의 기억 속에 남을 것이다.

영화계에선 한국 영화계에 큰 업적을 남긴 고인을 기려 장례를 영화인장으로 치를 예정으로, 구체적 절차를 놓고 논의 중이다.

유족으로는 부인 엄앵란, 장남 석현·장녀 경아·차녀 수화 씨가 있다. 빈소는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 30호실에 차려졌다. 발인은 오는 6일이며 장지는 경북 영천이다.

(SBS funE 강선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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