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두께가 더해갈수록
쌓여가는 의문과
뒤늦은 회한
번져가는 자화상엔 표정이 없다.
(중략)
알 수 없는 두려움에 뒷걸음치다
멀어져 가는 그에게서 발견하는 나의 얼굴.
낯설다
길을 잃고 헤매는 자의
절망이 담겨 있다.
그러다 문득
추락하는 삶에,
미궁에 갇혀 신음하는 그의 모습에,
번쩍, 눈이 뜨인다.
실상은 내 스스로 내 삶에 만족을 선물한 적이 별로 없는, 그저 그런 삶을 살아왔던지라 불만이야 없을 수야 없겠지만, 특히 그것이 인생에서건 길 위에서건, 가야 할 길을 잃을 때는 정말 스스로가 한심하고 그 자책이 지나쳐 발등을 찧고 또 찧는다.
그 ‘때’가 길 위에서 또, 발생했다. 어느 순간 길을 잃고 말았던 것이다.
길을 걷다 보면 한두 번은 길 위에서 헤매는 경우가 생긴다. 한 번에 적게는 10여km, 많게는 20여km를 걷는 일이라, 중간 중간 적지 않은 갈림길을 만나게 되는데, 이 짧은 선택의 순간이 미아 탄생을 결정짓는 분수령이 되는 것이다.
한참을 걷다 어느 순간 이정표가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벼락이 치듯’ 깨달았다. 아뿔싸! 어디에서 길을 잘못 들었단 말인가. 길이 워낙 널찍한 임도였던지라 무심코 걸었더니, 일정 거리마다 나타나는 이정표가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4번의 전화 통화를 한 후에야 가고자 하는 길을 찾을 수 있었다. 여러 번의 성가신 전화에도 불구하고, 어리석은 도보여행자의 막무가내 행보를 친절하게 바로잡아준 단양군 영춘면 면사무소 담당자에게 이 자리를 빌려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100여m의 도로를 따라 걷자, 온달산성(溫達山城)이 머지않았음을 알리는 이정표가 나타난다. 생각보다, 더 반가웠다.
온달산성은 <소백산 자락길> 중 6자락길의 이름이 <온달평강 로맨스길>으로 불리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온달산성으로 가는 길은 이제껏 걸었던 임도가 아닌 산길이다. 그리고 이 길이 온달장군이 신라에 빼앗긴 죽령 서쪽 지역의 고토(古土)를 회복하겠다는 일념으로 오고 간 그 길이라는 생각에 감회마저 새롭다.
온달산성에 오르자, 아! 굳이 누군가의 설명이 없더라도 천혜의 요새라면 바로 이런 곳을 두고 하는 말이겠다는 사실을 단박에 알게 한다. 저 멀리 돌아나가는 남한강이 한쪽의 굳건한 방벽이 되고, 다른 한쪽은 절벽이라, 방어용 성곽으로는 으뜸이었다. 그야말로 난공불락, 이 조그만 산성이 1,500여 년의 세월을 거슬러 오늘날에까지 이르게 된 이유 역시 오랜 세월 동안의 그 쓰임새에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따르면, 온달장군은 “죽령 서쪽을 빼앗지 못한다면 결코 돌아오지 않겠다.”는 맹세와 함께 이곳으로 출정했다고 한다. 하지만 장군의 꿈은 애석하게도 이루어지지 못한다. 신라군과의 전투에서 화살을 맞고 유명을 달리한 것이다.
기록에 따르면 온달장군이 전사한 곳은 아단성(阿旦城). 문제는 이 아단성이 서울의 아차산성인지 단양의 온달산성인지가 확실치 않다는 것이다. 서울의 광진구와 충북의 단양군은 각자의 이해관계에 따라 각 지역 내의 온달 관련 설화나 지명, 유적지를 개발하여 서로가 온달 역사의 적자임을 내세우고 있지만, 결국 역사적 판단은 학자들의 몫일 것이다.
온달은 워낙 ‘온달과 평강공주’라는 설화 속 인물로만 인식되었던지라 실존 인물이었는지도 아리아리할 때가 있기 때문이다. 온달의 이야기는 ‘삼국사기 제45권 열전 제5(三國史記 卷第四十五 列傳 第五)’에 등장한다. 우리가 익히 들어 알고 있는 그 내용이다.
오래지 않아 구황(救荒)식물인 느릅나무 껍질(*최근 세간에 댓글로 유명세가 자자한 그 느릅나무다.)을 한 아름 벗겨 돌아오는 온달 앞에 불쑥 나타난 평강공주. 공주의 느닷없는 등장과 구애에 혼비백산한 온달은 “이런 산골은 여자가 올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사람이 아니고 여우나 귀신일 테니 나를 따라오지 마라”고 하며 도망을 간다.
그런다고 내가 물러날 소냐. 평강공주는 온달의 집 앞에서 농성(?)을 시작한다. 가진 것이 없어도, 설사 바보라 해도 좋다며, 농성을 멈출 기색조차 없다. 그러자, 온달이 슬그머니 백기를 든다. 어쩔 것인가. 여자가 좋다는데 남자가 너무 빼는 것도 남자답지 못한 일이고, 특히 그 대상이 ‘공주님’이 아니던가. 온달로서도 그쯤에서 못 이기는 척 받아주는 것 말고는 달리 방법도 없었을 것이다. 온달 ‘성공신화’의 시작이다.
신영복은 그의 책 <나무야 나무야>에서 온달을 “어리석은 자의 우직함이 세상을 바꾼” 극적인 사례라고 평가한다. 온달이 온달이라는 이름보다도 ‘바보온달’로 불렸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삼국사기가 전하는 설화의 내용을 모두 사실로 인정하기에는 어딘가 석연치가 않다. 온달은 설화 속 인물이기도 하지만, 엄연한 역사 속 인물이기 때문이다.
고구려 역시 신라보다는 유연했다고 하나 신라와 마찬가지로 귀족 중심의 공고한 신분제 사회였다. 당시는 특히 광개토대왕과 장수왕의 절대왕권시대를 지나 귀족의 영향력이 점차 확대되던 시기였으니, 설화의 사실성에 대해 갖는 의문은 어쩌면 당연하다 할 것이다.
그때가 요즘 같은 다매체시대도 아니고, 인터넷이 있어 온달에 관한 이야기가 SNS에서 회자 되었을 리도 만무한데, 입소문만으로 온달에 관한 이야기가 퍼져 구중궁궐의 왕과 공주에까지 이르렀다고? 현실성이 떨어진다. 그것도 가난한 나무꾼에다 바보라 불리던 존재감 제로의 그를 말이다.
아마도, 온달은 최소한 몰락한 가문의 자제 정도는 됐을 것이다. 그런 그였기에 입신양명의 꿈을 꾸며 스스로를 단련시키고 세상에 나갈 뜻을 품고 있었을 것이며, 그러한 노력 끝에 온달은 자신에게 찾아온 천재일우의 기회를 잡지 않았을까? 그 기회는 바로 왕이 직접 주관하는 사냥대회였다.
기록에 따르면 고구려에서는 해마다 3월 3일이면 낙랑(樂浪) 언덕에서 사냥대회를 개최하였다고 한다. 사냥대회의 목적은 하늘과 산천의 신령께 제사를 지내기 위함이었는데, 사냥에서 잡은 돼지와 사슴을 제물로 바쳤다고 한다. 이 사냥대회에서 온달이 내로라하는 명문가의 자제들을 물리치고 1등을 했다는 것이다. 아마도 왕은 이날을 기점으로 온달의 존재를 알았을 것이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중국 남북조 시대의 주요국 중 하나였던 북주(北周)가 요동을 침략(577년)한다. 다급해진 왕은 직접 군사를 이끌고 전쟁에 참여하고, 온달 역시 이 전쟁의 선봉장으로 참전한다. 이 전쟁에서 온달은 남다른 무예 실력과 용맹함으로 전쟁을 승리로 이끈다(*일부에서는 을지문덕의 살수대첩, 강감찬의 귀주대첩과 비교하기도 한다).
전쟁 후 논공행상에서 온달은 전쟁 승리의 일등 공신이 되었고, 왕은 온달에게 대형(大兄)이라는 벼슬을 하사한다. 온달에 대한 왕의 총애는 두터워졌으며, 온달이 군부의 유력한 실력자가 되는 계기가 마련된 것이다. 이즈음 왕은 온달을 사윗감으로 점찍지 않았을까. 물론 나의 추론일 뿐이다.
당시 고구려는 내우외환의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광개토대왕과 장수왕 때의 전성기는 끝났으며, 게다가 평양성을 새 도읍지로 정한 뒤인지라, 오랜 토목사업에 민심은 흉흉해지고, 이런저런 이유로 왕권이 약해진 틈을 타 귀족들이 그 세력을 넓혀가던 와중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중국의 정세는 수나라가 힘을 키워 중국 대륙을 장악해 나가던 시기였고(*수나라는 589년에 중국을 통일한다), 남쪽으로는 신라와 백제 간의 크고 작은 분쟁이 끊이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격변기에 왕권을 이어받은 평원왕(재위기간, 559~590)은 안팎으로 당면한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우선 내부적으로는 득세하는 귀족세력을 견제해야 했다. 이를 위해 필요한 일차적인 해결책은 능력 있는 다양한 인재의 발굴이었을 것이다. 그런 시대적 상황은 온달에게는 준마가 날개를 단 격이었으리라. 전란의 시대에 군부의 실력자야 말해 무엇 하랴. 그러한 인재를 확실히 자기편에 두기 위해 왕이 선택한 방법이 딸과의 혼인이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온달은 왜 ‘바보’ 온달로 불리게 되었을까?
신영복은 이에 대해 “온달의 미천한 출신에 대한 지배 계층의 경멸과 경계심이 만들어낸 이름”이었을 것이라고 설명한다. 귀족이 아닌 온달이 신분상의 관례를 넘어 왕의 사위가 되자, 귀족사회에서 시기와 폄하의 대상으로 온달을 ‘바보’라는 상황적 명칭으로 불렀을 것이라는 추론이다.
하긴 ‘온달콤플렉스’라는 신조어가 만들어질 정도의 갑작스러운(?) 신분적 도약을 이룬 온달로서는 이마저도 어쩌면 스스로 감당해야 할 사회적 비용(?) 중 일부가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아니라면 귀족들의 반감과 의구심을 누그러뜨릴 목적으로 스스로 ‘바보’가 되는 스토리가 필요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어느 것이든 온달로서는 치러야 할 대가였을 것이다.
그렇게 온달의 성공신화는 말 그대로 기층 민중들의 신화가 되었다. 민중들에게 온달은 신분제를 뚫고 솟아오른 큰 산이었고, 또 한편으론 표상이자, 우상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온달설화는 구전(口傳)에 의해 전승되어지면서 첨삭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 이유로 온달설화는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창작하고 그 후 더 많은 사람들이 오랜 세월에 걸쳐서 승낙한” 이야기라는 신영복의 지적은 명쾌하고 적확하다.
사회의 벽을 뛰어넘고, 나아가 자기를 뛰어넘는 비약을 이룬 온달에 대한 민중들의 관심과 사랑이 그만큼 컸음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아름답고도 안타까운 장면이 아닐 수 없다.
온달산성에서 바라보는 남한강은 그저 묵묵하다. 솔숲 너머로 1,500년 전에도 그랬듯 지금도 강은 말없이 흐르고 있다. 그저 우직하고 또 우직하다.
‘우직한 어리석음, 그것이 현명함의 바탕이고 내용’이라는 신영복의 가르침이 새삼 특별한 의미로 다가오는 산천의 모습이다. 온달이 그랬던 것처럼, 우직하고 그래서 어리석어 보이기까지 하는 순수(純粹)가 강을 따라 흐른다.
“역사를 연구하는 것은 미래를 알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지평을 넓히기 위해서다. 우리의 현재 상황이 자연스러운 것도 필연적인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이해하기 위해서다. 그 결과 우리 앞에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더 많은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다.”- 유발 하라리, <사피엔스>
끝으로 신영복의 글을 인용한다. ‘어리석은 자의 우직함이 세상을 바꾼다’는 그의 가르침에는 커다란 울림이 있기 때문이다.
“현명한 사람은 자기를 세상에 잘 맞추는 사람인 반면, 어리석은 사람은 그야말로 어리석게도 세상을 자기에게 맞추려고 하는 사람이라 했습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세상은 이런 어리석은 사람들의 우직함으로 인하여 조금씩 나은 것으로 변화해간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