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겐 아직도 만남과 새로운 얼굴 그리고 새로운 삶에 대한 고집스럽고 본능적인 욕망이 남아 있다. 나는 아직도 머나먼 초원과 얼굴에 쏟아지는 비바람과 느낌이 다른 태양빛 아래 몸을 맡기는 것을 꿈꾼다.“
<나는 걷는다>라는 도보 여행기를 쓴 올리비에 베르나르의 말이다.
실크로드에서 대상(隊商)행렬마저 사라진 지금, 그는 아무도 엄두조차 내지 못했던 그 길을 과거의 그들처럼 걸어서 가고자 했던 것이다. 그가 길 위에서 보낸 4년의 세월은 드디어 그에게 완주의 기쁨을 안겨준다. 그는 그 길 위에서 만난 가난하지만 행복했던 많은 사람들의 도움과 스스로의 불굴의 의지로 그 힘겨운 여정을 이겨낸 것이다.
베르나르가 걸은 여정의 대부분은 자신이 살아온 세계와는 많이 다른 터키, 이란, 키르기스스탄, 우즈베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중국 등 이슬람 문화권의 나라들이었다.
사람이 주는 공포는 또 어떠한가. 내전 지역을 지날 때는 여러 번 총구 앞에서 생명의 위협을 느껴야 했으며, 그를 괴롭히는 사소한 좀도둑들이야 차고 넘칠 만큼이었다.
하지만 그는 짐수레 하나만을 끌고서 걷고 또 걸었다. 결국 그는 목숨을 건 노력 끝에 그가 꿈꾸던 실크로드를 횡단하는데 성공한다. 수많은 도전을 물리치고 이뤄낸 커다란 성취요, 업적이었던 것이다.
그 긴 여정을 담아낸 책이 <나는 걷는다> 세 권이다. 그런데 의미심장한 것은 그의 책 마지막 문장이다. 그 문장은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이다. 무엇이 그리도 헛되고도 헛된 것이었을까.
나도 걷는다. 나의 길은 수원화성에 머물러 있다. 길은 동북각루로 향하고 있다.
나는 베르나르의 꿈 이야기를 떠올리면서, 한편으론 이 광대한 성곽도시를 건설한 정조의 꿈을 상상해 본다. 정조가 완공된 수성화성을 바라보며 느꼈을 그 감회가 오죽하였을 것인가? 비명에 간 아비에 대한 마음의 빚을 덜어내는 계기이면서, 새로운 조선에 대한 웅대한 기대 역시 숨어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그의 꿈은 수원화성 너머에 있었을 것이다. 그 너머에는 조선을 건국한 창업주 이상의 꿈과 웅지를 품고, 부국강병이라는 조선의 꿈이 서려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꿈을 향한 여정의 끝이 머지않았음을 그는 모르고 있었으니, 여기에 조선의 슬픔과 좌절이 배여 있다.
동북각루는 1794년(정조 18) 10월 19일 완공되었다. 주변을 감시하고 군사를 지휘하는 지휘소와 휴식과 풍류가 깃든 정자의 기능을 함께 지니고 있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성곽 바깥의 용연(龍淵)과 용머리바위, 그리고 성곽 주위의 버드나무가 어우러져 각루(角樓)로서의 군사적 기능보다는 호화로운 운치를 풍기는 정자로서의 기능이 더욱 돋보이게 된다.
그런 이유로, 동북각루는 방화수류정(訪華隨柳亭)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는데, ”꽃을 찾고 버들을 따라 노니는 정자“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한다.
수원화성이 완공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곳을 찾은 정조는 축성의 노고를 치하하고, 동북각루에서 활시위를 당겼다고 한다. 활쏘기의 달인이었던 그에게 활은 자부심이었고, 왕으로서의 권위를 확립하는 의식이었다. 그랬던 그였기에 새로이 축성된 광대한 현대식 성(城) 위에서 활시위를 당김으로써 제국의 완성을 선포하는 의미도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그는 스스로 만들어가는 조선에 대한 자부심과 앞으로 만들어갈 조선의 역사는 그를 들뜨게 했을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에게는 남아 있는 시간은 불과 몇 년뿐이었다. 천명(天命)이 그를 기다려 주지 않았던 것이다. 혹자는 성군(聖君)으로서 정조가 화룡점정을 찍지 못한 이유가 바로 그의 길지 않은 수명에서 비롯된다고 말하기도 한다.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이덕무, 유득공, 박제가, 서이수 등 이른바 실학파로 불리는 서얼 출신의 신진 관료들을 규장각으로 모으고, 그 규장각 안에 지금으로 따지면 연구관 제도인 초계문신(抄啓文臣)제도를 두어 정치적으로는 왕권 강화를 위한 세력 기반을 강화하고, 자신의 이념적 터전을 닦고자 하였다. 초계문신 중 대표적인 인물이 정약용이다.
정조는 그에게 주어진 20여 년 동안 그가 꿈꾸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제한된 환경 아래에서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고, 나름의 성과를 낸 왕임에는 틀림이 없다.
문체반정을 통해 정조가 대표적으로 문제 삼은 책이 바로 박지원의 <열하일기>다. <열하일기>는 당시 소설식 문체와 해학적인 표현을 빌어 연암체라고 불리는 독특한 문체를 구사해 엮은 여행기로, 당시에도 화제작이었다. 하지만 성리학적 교조주의에 빠진 정조의 눈에는 말 그대로 패관문학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옛 중국의 성현들의 말씀도 많은데 하필이면 아무 쓸모도 없는 시정잡배의 글이냐고 정조는 나무랐던 것이다. 사서오경 같은 경전을 읽으라는 이야기였다. 요즘으로 치면 코란 외에 다른 것을 배척하는 일부 이슬람 과격세력과도 많이 닮아 있다.
정조는 그런 문체로 책을 쓴 이를 불러 반성문을 받기도 했으니, 박지원을 비롯한 적지 않은 관료들이 반성문을 써야 했다. 이는 결과적으로 고답적인 성리학의 사상적, 문학적 한계를 벗어나 새롭게 일어나고 있던 18세기의 문예운동을 위축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고 만다.
하지만 아쉬운 점은 영화 <역린>에서 보듯, 정조 스스로 외부의 적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의술이나 활쏘기 등 자기계발에는 열정적이었으나, 그가 감당하였던 아버지의 죽음이나 군주가 되기 위한 지난한 과정 같은 시대적 운명에서 그는 자유롭지 못하였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정조가 겪어내야 했던 삶의 조건들은 필연적으로 극심한 스트레스를 동반했고, 이는 결국 그를 사지로 내몰고 만다. 게다가 그가 스트레스를 이기기 위해 선택한 과도한 술과 담배 역시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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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는 1752년에 나고, 1800년에 죽었다. 우리 나이로 49살의 나이에 죽은 것이다. 그런 그의 삶 속에서 떼어놓을 수 없는 것이 술과 담배였다.
”사람에게 유익한 것은 남령초(담배)만한 것이 없다. 이 풀이 아니면 답답한 속을 풀지 못하고 꽉 막힌 심정을 뚫어주지 못한다.(......) 담배를 백성들에게 베풀어줌으로써 그 혜택을 함께 하고자 한다.“
정조의 말이다.
이처럼 정조는 엄청난 골초였다. 왕의 담배 사랑은 10대의 아이들조차도 담뱃대를 물고 길거리를 다닐 수 있는 근거가 되었다고 한다. 당시에도 채제공을 비롯한 많은 신하들이 담배의 백해무익함을 주장하고 단속의 필요성을 주청하였지만, 정조는 듣는 둥 마는 둥이었다. 게다가 정조는 애주가였다.
거기다가 정조는 화증(火症)까지 있었다. 현재의 의학용어로는 조울증 쯤 되지 않을까 싶다. 그는 화를 참지 못하였다고 한다. 어렸을 때부터 겪은 심한 스트레스로 인한 것으로 이해되지만 그 정도는 참으로 가볍지 않았으니, 욕이나 화풀이 대상으로는 나이든 신하일지라도 예외가 없었다고 한다. 살로 그의 ‘욱‘은 대단한 것이었다는 말이다. 이런 기질은 숙종부터 영조를 거쳐 정조에 이르기까지 집안의 내력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탕평책을 펼쳤다고는 하지만 노론으로 대표되는 당파들의 힘은 여전하였고, 그가 아니어도 안정적으로 국정을 운영할 제도를 바탕으로 하는 통치시스템은 마련되지 못하였다. 게다가 후계자는 어렸다. 그의 후계자인 순조는 겨우 열 살의 나이에 임금의 자리에 올랐다. 그 임금을 대신해 수렴청정을 한 이는 영조가 66살의 나이에 계비로 맞은 정순왕후였다. 영조와 혼례 당시 그녀의 나이는 15살이었고, 그의 아비는 외척이라는 이유로 노론 벽파의 수장이 된 김한구다. 그런 배경의 정순왕후였으니, 세도가의 득세는 불문가지였다.
하지만, 정순왕후 사후에는 순조의 외척(장인)인 노론 시파의 김조순 가문이 확고부동한 세도정치의 정점이 되었으니, 노론 벽파 입장에서는 정순왕후가 오래 살지 못한 것이 또 어쩌면 한이 되었을 것이다.
길은 동장대로 흐른다. 동장대(東將臺)는 연무대(鍊武臺)라는 편액을 달고 있다. 연무대라는 이름에 걸맞게 장대 앞의 평지가 널찍하다. 보기만 해도 사병들의 사열을 받고, 훈련을 하였던 장소였을 것으로 짐작이 된다. 이곳의 지형은 높은 곳은 아니지만 사방이 트여 있어, 왜 이곳에 장대를 세웠는지를 가늠하게 한다.
설명에 따르면, 동북공심돈은 군사적 요충지인 것은 물론 수원화성 건축물 중 유일하게 원형형태로 희소성이 높다고 한다. 그냥 보기에는 겨울철 양곡을 저장하는 사일로를 닮았다. 내부는 소라처럼 생긴 나선형의 벽돌 계단을 통해서 꼭대기에 오르게 돼 있어 일명 ‘소라각’이라고도 불린다고 한다.
● 봉수대에서 전쟁을 생각하다
얼마가지 않아 봉수대가 보인다. 봉수대는 5개의 연기구멍을 갖고 있는데, 밤에는 불, 낮에는 연기로 신호를 보냈다고 한다. 평상시에는 남쪽의 첫째 것만 사용하고, 적이 나타나면 2개, 경계에 접근하면 3개, 경계를 침범하면 4개, 그리고 적과 접전시에는 5개의 봉화를 올렸다고 한다.
전쟁은 국가의 존망과 생사의 문제이기 때문에, 그 과정은 필사적이고 기본 속성은 대단히 파괴적이다. 그래서 전쟁이 두려운 것이다.
어느 것이, 어느 방법이 우리의 안녕과 안전을 담보한다고 쉽사리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또 인간이 그렇게 막연하거나 불완전한 존재만은 아니다. 다행스럽게도 집단 이성은 오락가락하다가도, 늘 조금씩은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려고 하는 합리적인 운동성을 지니기 때문이다. 평화를 향한 오늘의 모든 행위들도 지난 10년을 헤매다 이제야 방향을 잡은 그 합리적인 그 움직임의 연장선이 아니던가.
성곽길이 끝나는 지점이 머지않은 듯 행인들이 뜸하고 한산하게 느껴진다. 남수문을 지나자 길이 갑자기 뚝~ 하고 끊겨버린다. 잠시 어디로 가야하나 어리둥절했다. 지나는 분에게 팔달문이 어디냐고 묻자, 팔달문 앞에서 팔달문을 묻느냐는 투다. 사실 그랬다. 골목길을 조금 벗어나자 팔달시장이 나타난다. 팔달 시장 안으로 들어가 이것저것 구경하고픈 마음 간절했으나, 지체할만한 시간이 없는지라, 팔달문으로 나아간다.
길 위에는 낙엽들이 지난 계절을 추억하고 있다.
수원화성 성곽길을 걸으며, 새삼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과 맞닥뜨리게 되었다. 진정 역사란 무엇일까? 왜 우리는 한낱 지난 일을 배우고 또 익히는 것일까?
그 답은 영국의 역사학자 카(E. H. Carr)가 말하는 '역사는 과거와 현재와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경구에서 얻을 수 있을 듯싶다. 오늘이란 어제가 만들어 놓은 바닥 위에서 또 다른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 쟁투하는 공간이 아니던가.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 역사는 의미가 있는 것이다.
우리는 역사를 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실제로 많이 안다. 누구든 십여 년 동안 공교육 안에서 역사를 배웠으니 모르는 것이 이상한 것이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진정 우리는 역사를 알고 있는 것인가 하는 의문과 맞닥뜨리게 된다. 무슨 해에 무슨 일이 일어났었는지 같은 객관적인 사실만을 외운 건 아니었는지... 30여 년 전 대학 입학 후 읽은 <해방전후사의 인식>이나 <전환시대의 논리> 같은 책들이 주었던 충격은 기존의 역사 교육에 심각한 의문을 갖게 하는 것이었고, 지금도 별반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역사는 항상 새롭게 다시 쓰이며, 따라서 모든 역사는 현재의 역사이다“라는 역사학자인 칼 베커의 지적은 항상 유효하다. 역사가 현재의 거울이 되기 위해서, 역사는 올바르게 정립되어야 하고, ‘백의민족’ 같은 맹목적인 긍정의 역사를 뛰어넘는 성찰과 반성, 그리고 계승발전이라는 대의에 충실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어야 토인비가 말했듯 ”인류에게 가장 큰 비극은 지나간 역사에서 아무런 교훈도 얻지 못한다는 데 있다“는 지적에서 자유로울 수 있지 않겠는가.
서남암문을 지나자, 길은 서장대로 이어진다. 어느새 출발지로 돌아온 것이다. 하지만 여정이 끝난 것은 아니다. 성 아래 오목한 곳에 자리 잡은 수원화성 행궁으로 가야 한다.
행궁(行宮)은 왕이 궁궐 밖을 행차할 때 임시로 머무는 궁궐을 지칭한다. 화성행궁은 화성 안에 건축된 행궁으로, 수원화성 행궁은 정조가 아버지인 사도세자가 잠들어 있는 융건릉에 능행할 목적으로 건축하였다.
▶ [라이프] 정조의 꿈, 조선의 꿈…수원화성 성곽길을 걷다 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