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3년 입국할 때만 해도 그는 죽음과는 거리가 멀었다. 여느 해외입양인과 마찬가지로 친부모를 찾을 수 있다는 희망에 차 있었다. 해외입양인들을 위한 쉼터인 ‘뿌리의 집’에서 한두 달 머물다 김해로 내려갔다.
김해는 기록상으로 그가 1978년 미아로 발견된 곳이다. 그전에 한국에 잠깐 들어와 한국문화와 한국어 강의를 듣던 대학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강의를 함께 듣던 해외입양인 출신 젊은이들이 마침 김해에 살고 있어 의지처가 됐다. 그는 표정이 매우 밝았고 의욕에 넘쳐 있었다.
해외입양인들에게 고국은 그 자체로 치유의 땅이다. 입양 간 나라에서는 외모와 언어가 달라 어딜 가도 눈에 띄고 입양아라는 신분도 곧 드러난다. 이질감과 소외감을 느낄 수 밖에 없다. 해외입양인연대 AK 셀링 사무총장은 “어린 시절 외모가 다른 사람들 틈에서 정체성 혼란을 겪을 수 밖에 없는데 매우 고통스러웠다.”고 호소했다. 뿌리의 집 김도현 목사는 “아이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이런 식으로 입양을 보내는 것은 일종의 아동학대”라며 “그들이 한국에 오면 외모가 비슷한 사람들과 섞여 익명화 하면서 마음의 안식을 찾는다.”고 설명했다.
해외입양인이 친부모를 찾기란 하늘의 별따기다. 치열하게 찾아다녀도 티끌만한 단서조차 찾기 어렵다. 입양 전후의 기록이 부실하게, 또는 잘못 작성된 경우가 많고 기록이 아예 없는 일도 허다하기 때문이다. 사후관리를 염두에 두지 않고 입양 보내는 데만 치중한 탓이다.
지난 1953년부터 2016년까지 16만 8천여 명(보건복지부 통계)이 해외로 입양됐다. 2016년에도 330여 명의 아동을 해외로 보냈다. 지금도 300~500명의 해외입양인들이 고국에 들어와 핏줄을 찾고 있다. 이들 중 상당수가 기록 부재와 부실기재라는 벽에 부닥쳐 좌절하고 있다.
중앙입양원이 지난해 4월 뿌리의 집의 소개로 그에 대한 상담을 시작했을 때 그의 심신은 이미 만신창이가 돼 있었다. 서울적십자병원에서 진료를 받았지만 건강은 호전되지 않았다. 10월 중순 이후엔 연락이 뜸해졌고 12월 들어선 아예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리고는 주검으로 발견됐다.
그는 생전에 “죽으면 한국 땅에 묻히고 싶다.”고 했지만 그 바람은 이뤄지지 않았다. 그의 유해는 입양 갈 때처럼 그의 의사와는 상관 없이 노르웨이로 보내졌다. 그의 장례절차가 한창 진행될 무렵 공교롭게도 해외입양과 관련한 외신이 전해졌다. 세계 1위의 ‘아동수출국’으로 지목받고 있는 에티오피아 의회가 해외입양을 금지하는 법안을 의회에서 통과시켰다는 소식이다.
우리나라의 해외입양은 전쟁고아를 선진국 가정에 보내는 선(善)한 의도에서 시작됐다. 하지만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이 된 오늘날에는 더 이상 선이 아니다. 대한민국은 ‘아동의 이익을 최우선적으로 고려할 수 있도록 관계 당국만이 입양을 허가해야 한다.’는 유엔아동권리협약 제21조a를 유보한 유일한 나라다. 또 ‘해외 입양을 최소화하고, 원가정 보호를 우선하자.’는 헤이그 국제아동입양협약에도 25년째 가입하지 않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