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모스크바에서 23일(현지시간) 한 괴한이 반정부 성향의 민영 라디오 방송 '에호 모스크비'(모스크바의 메아리) 보도국에 난입해 근무 중이던 여기자 1명에게 흉기 공격을 가해 중상을 입혔다.
인테르팍스 통신 등에 따르면 이날 오후 1시께 모스크바 시내 '노비아르바트' 거리에 있는 에호 모스크비 방송사 건물에 한 괴한이 들이닥쳤다.
괴한은 건물 입구를 지키던 경비를 호신용 가스를 뿌려 제압한 뒤 곧바로 엘리베이터를 타고 14층에 있는 방송사 보도국으로 올라갔다.
이어 보도국으로 들어선 괴한은 자리에서 근무 중이던 방송사 보도부국장 타티야나 펠겐가우에르에게로 곧장 다가가 흉기로 그녀의 목을 찔렀다.
중상을 입은 펠겐가우에르는 병원으로 후송돼 치료를 받고 있다고 방송사 측은 밝혔다.
범인은 현장에서 경비들에 체포돼 경찰에 넘겨졌다.
범인은 보리스 그리츠라는 이름의 48세 남성으로, 러시아, 이스라엘 이중 국적자라고 영국 일간지 가디언은 전했다.
범인은 경찰 조사에서 "약 5년 동안 그녀와 텔레파시로 접촉해 왔으며 그녀가 매일 밤 텔레파시로 나를 힘들게 했다"고 말하는 등 횡설수설했다고 통신은 전했다.
경찰은 그를 정신과 의사에게 보내 정신 상태를 검증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현지 언론인들과 서방 언론 등에서는 이번 사건이 러시아 정부에 비판적인 언론인에 대한 잇따른 공격의 연장선에서 벌어진 일 수 있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이 방송사 보도국장인 알렉세이 베네딕토프는 이번 사건을 정신이상자의 단독 범행으로 보는 것은 너무 이르다면서 "그는 그가 몰랐어야 할 것들을 알고 있었다. 그는 펠겐가우에르가 아직 거기에 있을 거라는 것을 어떻게 알았는가? 평소대로라면 그 공격이 있었을 때쯤이면 펠겐가우에르는 이미 자리를 뜨고 난 후였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소셜미디어에도 정치적 동기에 따른 범행 가능성을 시사하는 글들이 올라왔다.
서방 언론은 이 방송사가 평소 러시아 정부에 비판적인 보도를 한 사실에 주목하면서 이번 사건을 최근 러시아에서 이어진 언론인과 반정부 인사들을 겨냥한 공격과 위협의 한 사례로 전했다.
미국 일간지 뉴욕타임스(NYT)는 '에호 모스크비'는 그동안 극도의 정치적 압박을 받았고, 이 방송국 기자들도 빈번하게 살해위협에 시달렸다면서 이번 공격으로 기자들의 신변 안전에 대한 우려가 다시금 불거지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 방송국의 또 다른 진행자 율리야 라티니나는 차량 방화 시도 등 잇따른 공격에 지난달 러시아를 떠나기도 했다.
이번에 흉기 공격을 받은 펠겐가우에르는 2주 전 러시아 국영 TV의 표적이 된 바 있다고 영국 일간지 파이낸셜타임스(FT)는 전했다.
당시 러시아 국영TV는 '에호 모스크비'가 미국과 연계된 비정부기구(NGO)에서 자금을 받으면서 친(親)서방 보도로 러시아에 해를 입히고 있으며, 펠겐가우에르가 러시아의 대표적 야권 운동가이자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정적인 알렉세이 나발니를 지원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나발니도 지난 4월 괴한의 약물 공격으로 한쪽 눈의 시력을 거의 잃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