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SBS 뉴스 상단 메뉴

[취재파일] 핵실험 後 너무나 단호한 아침…'제발, 기분 탓이길'

[취재파일] 핵실험 後 너무나 단호한 아침…'제발, 기분 탓이길'
2017년 9월 3일 일요일 오후 12시 반, 북한은 노동당 산하 군수사업부 주도로 6차 핵실험을 했다. 약 27시간이 지난 다음 날 오후 3시 반, 서울 여의도 한국거래소 코스피 전광판은 2,329.65에서 멈췄다. 28.04포인트, -1.19% 낙폭이었다. 거의 1년 전 9월 9일 5차 핵실험 다음 거래일 -2.28% 하락에 비하면 절반 수준의 낙차였다. 같은 거래소 금 시장에선 1g당 금값이 830원 가까이 올라, 48,400원을 기록했다. 달러화 가치가 오르며 원/달러 환율은 10.2원 오른 1,133원으로 마감했다.

증시 전문가들의 예상이 거의 빗나가지 않은 하루였다. 오전 11시, 이선엽 신한금융투자증권 팀장은 북한 영향은 제한적이라고 이미 못 박았다. 트럼프 대통령이 위기를 관리하려는 듯한 제스춰를 보인 게 시장에 큰 영향을 준다고 봤다. 결론은 단기 조정이었다. 

이경민 대신증권 글로벌마켓실장도 결론은 같았지만 이유는 조금 달랐다. 오전 10시 반, 그는 9월엔 원래 이벤트가 많아 하락세가 시작될 참이었다고 보고 있었다. 오는 7일 유럽중앙은행의 통화정책회의, 9일엔 (작년 5차 핵실험을 했던)북한 건국절, 14일엔 국내 선물옵션 동시 만기 등 불확실성을 높일만한 일정들이 산더미였다는 거다. 북한이 3일에 스스로 '대륙 간 탄도 로켓 장착용 수소탄 실험'이라 규정한 6차 핵실험은 이 가운데 하나였을 뿐이라는 얘기다. 

외국인과 기관 투자자는 매수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지수 하락 이유는 공포에 민감한 개인 투자자였다. 이쯤 되자 증권가에선 오히려 매수시기가 언제라는 전망까지 나왔다. 애초에 주가가 떨어질 수밖에 없었던 9월, 중순 무렵 2,300선이 되면 주식을 살 때가 됐다는 거였다. 

삼성증권 유승민 연구원은 "지정학적 위기는 늘 북미 간 대화 협상 압력이 가장 높다는 역설적인 단초"라며, "북미 모두 군사행동만으로는 각자 원하는 걸 얻을 수 없다는 인식"을 그 근거로 봤다. "이미 8월 전쟁 발언 등 시장의 심리적 임계치도 높아질 대로 높아질 상황이므로, 이번 북핵 이슈는 제한적인 영향만 줄 것"이라 전망했다. 말과 말이 전망을 만들고, '펀더멘털'에 신뢰를 확인한 9월 4일, 남쪽 금융 시장은 또 한 번 굳건한 자세로 흔들림 없는 모습을 보여줬다.

그러나 북핵에도 흔들리지 않는 '긍정계'는 조금씩 금융 시장만의 이야기가 돼 가고 있다는 이 '기분'. 그걸 왜인지 지울 수 없는 게 사실이다. 신뢰를 전망하고 전망이 곧 신뢰가 되는 '긍정계'. 이런 모습의 증권가 바깥 실물 경제의 영역엔 추가 핵실험과 동시에 냉랭한 기류가 흘렀기 때문이다. 

2017년 9월 3일 핵실험 이후 1시간 반쯤 지난 오후 2시 4분, 한국은행은 출입 기자들에게 월요일 아침 8시 북한 핵실험과 관련한 통화금융대책반 회의를 개최한다고 알렸다. 부총재가 주관하고 부총재보와 국장급이 참가하는 대응회의였다. 하지만, 저녁 8시 반, 이번엔 문자 알림이 기획재정부와 한국은행, 금융위원회 출입기자로까지 확대된다. 북한의 6차 핵실험 8시간 뒤, 김동연 부총리와 이주열 한은 총재, 최종구 금융위원장, 정규돈 국제금융센터 원장까지 거시경제금융회의를 열기로 한 것이었다. 

아침 8시에 열린 회의. 결과는 "그 어느 때 보다 비상한 각오로 대내외 리스크 관리에 한 치의 빈틈도 없도록 철저히 대응해 나가야 한다는데 의견을 같이 했으며, 당분간 매일 관계기관 합동점검반 회의를 개최하여 '북한관련 상황, 국내외 금융시장, 수출, 원자재, 외국인 투자 동향 등' 경제상황 전반을 24시간 모니터링하고, 시장불안 등 이상징후 발생 시 비상대응계획에 따라 신속하고 단호하게 시장 안정화 조치를 취해 나가기로 했다." 전례 없이 강력한 수준의 담화였다. 

이젠 세계적인 저술가라 불러야 할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 그의 히트작 '사피엔스'를 한 마디로 요약하면 이렇다. '호모 사피엔스는 '허구'를 믿었기에 역사의 주인이 됐다.' 그가 말하는 허구란 국가, 경제 같은 개념들이다. 근대에 와서 사피엔스는 이번엔 은행과 신용, 소비, 성장이라는 경제적 '허구'(개념)도 실존한다고 믿기 시작했다. 이 복잡한 진화에서 바로 '경제는 심리'란 말이 나왔다. 그러나 '멘탈'이 무너지는 순간, 사피엔스는 종족과 함께 쌓은 신뢰의 체계를 일순간에 부정한다. 거대한 신용으로 지급 체계가 구축된 은행에선 '뱅크런'이 일어날 것이며, 지갑을 닫자 소비심리가 굳고, 성장은 멈출 것이다.

무너질 수도 있는 '멘탈', 흔들리는 심리의 근간엔 공포와 불안이 있다. 그러나 사피엔스에겐 이 두 가지 근원적 감정을 붙잡을 수 있는 처방약도 있다. 바로 '권위'다. 2017년 북한이 핵실험을 하자, 다음 날 남한 경제 당국자들이 보여준 해법의 다른 이름이다. 시장은 안정적일 것인 믿음을 불러 일으키는 무엇. 9월 4일 아침, 국가는 '권위'를 행사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들 가운데 통화 정책의 최고 권위를 갖춘 한국은행은 지난달 소비자심리지수가 7월보다 1.3포인트 떨어졌다고 밝혔다. 7개월 만에 소비심리가 나빠진 것. 이유 가운데 하나로 이례적으로 북핵 문제를 언급했다. 8월, 김정은과 트럼프는 전쟁 운운하며 설전을 벌였다. 그 여파가 소비 심리를 얼렸다는 진단이다. 

나쁜 거시 지표는 몇 개 더 있다. 아침 회의 참가자들은 이런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알 것이다. 그래서 기자는 왜인지 걱정과 안도감 사이에서 양가(兩價)적 감정에 휩싸인다. 북한의 6번째 핵실험 다음 날 아침 8시, 경제 정책 당국의 최고 대표자들이 힘주어 말한, 빈틈, 철저, 24시간, 만전. 이란 단어들 때문이다.

어쩌면 금융시장의 동요를 막고, 실물 경제의 안정을 도모했을지 모를 이 단어들이, 너무나 적재적소에 적극적으로 사용된 데서 오는 감정이다. '강력한 권위를 신속 정확하게 전달해야 할 다른 이유는 없었겠지?' 하고 묻게 된다. 부디, 우리 실물 경제도 금융 시장 처럼 여전히 '긍정계'안에 있기를. 아침에 떠오른 단상은 제발, 그저 기분 탓이길.      
Copyright Ⓒ SBS.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스브스프리미엄

스브스프리미엄이란?

    많이 본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