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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야생동물 위협…'죽음의 덫' 농수로

[취재파일] 야생동물 위협…'죽음의 덫' 농수로
벼농사를 짓는 논과 논 사이에는 물길이 있다. 벼를 심을 때 논에 물을 대고, 벼가 익어 추수를 할 때면 다시 물을 빼주기 위해서다. 계단식이거나 삐뚤빼뚤한 재래식 논의 경우 물꼬, 즉 수로는 대부분 어른 허리 아래 깊이에 폭은 1미터 안쪽이다. 양쪽 논둑 사이에 난 통로여서 비가 많이 오면 흙이 무너져 내리기도 하고 구멍이 뚫려 둑이 잘려나가기까지 했다.

 봄부터 여름까지 수로에는 늘 물이 가득 흘렀고, 개구리와 뱀 등 양서류와 파충류, 포유류까지 야생동물은 수로를 건너 양쪽 논을 오가며 살았다. 또 하천에서 흘러들어온 물고기도 많아 족대를 이용해 붕어와 메기 등을 잡는 곳이기도 했다. 이 당시 물꼬는 동물의 서식지이며 농업 수단이었다.
야생동물 위협..'죽음의 덫' 농수로
 하지만 1980년대 이후 경지정리 바람이 불면서 재래식 논은 바둑판이나 두부 모판처럼 반듯반듯하게 나뉘어졌다. 흙둑 사이로 뚫렸던 물길은 콘크리트로 대체됐고, 직각의 수로는 더 이상 동물의 이동 통로가 되지 못했다. 정부는 수로 관리의 편리성과 안전성, 그리고 효율적 농업 용수 관리를 명분으로 논둑과 물길 바닥에 콘크리트를 부어 단단한 구조물로 만들어버렸다. 콘크리트 물길에는 오직 농사만이 고려됐고, 야생 동물과 생태계는 철저히 배제됐다.
야생동물 위협..'죽음의 덫' 농수로
 콘크리트 대형 농수로의 생태계 단절 피해 현장을 직접 목격 한 것은 두 달 전쯤이다. 충남 예산군의 한 농수로에 고라니 4마리가 한꺼번에 빠져 버린 것이다. 고라니가 살던 곳은 농수로와 맞닿은 야산이다. 들녘으로 먹이를 먹으러 내려오다가 사고를 당한 것이다. 이곳 농수로는 예당저수지에서 나온 물을 예산군과 당진군 들녘으로 공급해주고 있다. 도로에 비유하면 큰 줄기인 간선 도로인 셈이다. 콘크리트 수로는 무려 깊이가 2미터나 되고, 폭은 10미터, 길이가 26km에 이른다. 말이 농수로지 어마 무시한 규모다. 이 속에 갇힌 고라니는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출구를 찾아 사정없이 달려보지만 소용이 없다. 양쪽 벽은 뛰어오르기에 너무 높고, 수로 끝은 물이 흘러 갈 곳이 없는 상태다. 고라니는 힘껏 점프를 해 둑을 뛰어넘어 보려다 결국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사람이 꺼내주지 않으면 고라니 스스로 빠져나오기가 사실상 불가능한 것처럼 보였다.
야생동물 위협..'죽음의 덫' 농수로
 야생 동물 구조센터는 고라니가 힘이 좀 빠져 행동이 느릴 때까지 기다렸다가 구조하자고 했다. 워낙 힘이 있고, 빨라서 포획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다행히 대형수로 안에는 파릇파릇한 풀과 마른 풀까지 있고, 바닥에는 물도 조금 흘러 당분간 고라니가 먹고 지낼 환경은 조성돼 있었다. 하지만 마을 주민들은 이구동성으로 구조를 반대했다. 농사를 망치는 동물이니 굶어 죽게 내버려두자는 것이다. 고라니 상태가 궁금해 열흘에 한 번씩 수로를 찾았다. 한 달 쯤 지나자 4마리 가운데 1마리만 남고 3마리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높이가 낮은 수문을 타고 힘들게 빠져 나갔거나 수로 끝 까지 26km를 달려 물속으로 들어갔거나 추정은 두 가지다. 지난해 4월에도 이곳 수로에 고라니 1마리가 빠졌다가 구조 대원들이 포획하기 위해 한쪽으로 몰아가자 필사적으로 달아나던 고라니가 높이가 상대적으로 낮은 수문을 타고 달아난 적이 있다.
야생동물 위협..'죽음의 덫' 농수로
 영하의 강추위가 몰려온 지난 주 고라니를 다시 찾아갔다. 한파에 눈까지 와 고라니 서식 환경이 크게 악화됐기 때문이다. 예상은 들어맞았다. 콘크리트 수로 바닥은 얼음판으로 변했고, 먹이용 풀은 눈과 얼음 속에 파묻혔다. 햇볕이 드는 콘크리트 벽 아래에 웅크리고 앉아있던 고라니는 취재진을 보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홀쭉해진 몸에 빙판이 미끄러워 제대로 걷지도 못 하고 자주 넘어졌다.
야생동물 위협..'죽음의 덫' 농수로
 현장으로 달려온 야생동물 구조센터 대원들은 수로로 뛰어들어 고라니를 포획하는데 성공했다. 생각보다 고라니의 건강 상태는 양호했다. 구조 대원들은 수로에서 10km가량 떨어진 숲 속으로 고라니를 데려가 자연으로 돌려보냈다. 충남 야생동물 구조센터는 1년에 20여건 정도 고라니 농수로 추락 신고가 들어온다고 했다.
야생동물 위협..'죽음의 덫' 농수로
 사슴과 동물인 고라니는 암수 모두 뿔이 없는 게 특징이다. 맑은 눈망울은 순박하다 못해 오히려 슬퍼 보이기까지 한다. 고라니는 전 세계적인 멸종위기종이다. 고라니가 토착종으로 서식하는 나라는 지구상에 딱 두 곳 밖에 없는데 바로 한국과 중국이다. 중국에도 일부 제한된 지역에 1만여 마리의 고라니가 살고 있다고 한다. 이에 반해 한반도에는 거의 모든 지역에 고라니가 살고 있고, 국립생물자원관의 2015년 조사에 의하면 100ha당 7.8마리로 나타났다. 전국적 서식 밀도로는 충남이 11마리로 가장 높고, 전남이 3.7마리로 낮았다.

 국제적으로 개체수도 적고, 순하게 생긴 외모와 달리 고라니는 우리나라 포유류 가운데 가장 푸대접을 받는 동물이다. 농작물을 뜯어먹어 농민들에게 피해를 준다는 이유로 해로운 야생 동물로 지정돼 매년 멧돼지와 함께 수렵과 유해 조수 구제 대상이다. 해마다 6만~10만 마리 정도의 고라니가 사냥감이 돼 사라지는 것으로 추정된다.<한국고라니/국립생태원>

 고라니를 위협하는 것은 사냥만이 아니다. 산과 들을 가로질러 뚫린 도로 위 차량에 의한 로드킬도 한몫 한다. 국립생물 자원관의 2015년 야생동물 로드킬 조사에 따르면 고라니의 로드킬 비율이 27.9%로 가장 많고, 너구리22%,족제비17.3% 순이다. 

 고라니뿐 아니라 너구리와 뱀, 개구리도 일단 콘크리트 농수로에 빠지면 탈출이 거의 불가능해 죽을 수 밖에 없다. 야생동물 사고가 잇따르고 있지만 농수로는 안전시설 없이 방치 되고 있다. 농수로 주변에 울타리 하나 없고, 덮개도 설치돼 있지 않다. 직각의 콘크리트 둑에는 사람만 겨우 올라올 수 있게 만든 철근 계단이 드문드문 있을 뿐이다. 하지만 깊이가 2미터 가량이나 돼 노인이나 어린이들이 빠지면 크게 다칠 수 있다.
야생동물 위협..'죽음의 덫' 농수로
 농림축산식품부가 만든 ‘농업생산기반 정비사업 계획 설계 기준’ 친환경편에 따르면 콘크리트 수로에는 탈출로를 만들고, 동물이 이동 할 수 있도록 수로 덮개와 생태 다리도 계획하라고 규정돼 있다. 최근에 만든 농수로는 경사진 탈출로가 설치돼 있지만 20여 년 전에 만든 농수로는 친환경적인 시설 보완 없이 대부분 방치돼 있다.
 
 농수로는 단지 농사를 짓기 위해 물을 공급하는 시설이 아니다. 물 공급과 배수는 기본이고 야생 동물의 생태계를 끊어놓는 게 아니라 이어주는 기능을 해야 한다. 먹이사슬의 생태계가 잘 유지돼야 건강한 농사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눈앞에 보이는 경제성과 효율성의 논리는 지속가능한 생태계 건강을 보장하지 못한다. 고라니와 야생 동물이 잘 살아야 우리의 삶도 안전하게 보존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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