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끝까지 ‘묻지마 살인’은 아니라던 경찰
지난 달 30일, 서울 노원경찰서는 수락산 살인사건의 첫 브리핑을 했습니다. 피의자 김학봉을 체포한 지 하루 만이었습니다. 기자들이 가장 궁금해 했던 건 범행 동기였습니다. 사건의 성격을 규정해 줄 핵심적인 단서였기 때문입니다.
질문이 쏟아졌고, 경찰은 김학봉의 최초 진술을 공개했습니다. “산에서 처음 만나는 사람을 죽이기로 마음먹고 수락산에 올라갔다”는 것이었습니다. 정해둔 범행 대상도 없고, 죽여야 할 이유도 없었다는 뜻입니다.
실제 김학봉은 자신의 진술대로 행동했습니다. 시장에서 흉기를 산 뒤 범행 당일 새벽 2시, 수락산으로 숨어들었습니다. 3시간 20분 만에 피해 여성을 만났습니다. 그리곤 흉기로 피해 여성을 주저 없이 찔렀습니다. 묻지마 살인으로 볼 여지가 충분했지만, 경찰의 판단은 달랐습니다. 범행 당사자의 진술을 믿을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질의응답 내용 중 일부를 보면 당시 분위기를 알 수 있습니다.
기자 / 산에서 처음 만난 사람 죽이겠다고 했는데 왜 ‘묻지마 범행’이 아닙니까?
경찰 / 첫 번째 진술은 그렇게 했는데 맞는 말인지, 지어낸 말인지 추가 확인해야 할 것 같습니다.
기자 / 죽인 사람이 정말 첫 번째 본 사람인지, 아니면 여러 명을 지나친 뒤 죽인 것인지를 확인한다는 뜻입니까?
경찰 / 그렇습니다.
기자 / 그 두 가지 경우가 본질적으로 차이 있습니까?
경찰 / (살해 대상이 처음 본 사람이 아니라면) 최초 진술에 신빙성이 없어질 수 있다고 봅니다.
당시 경찰은 한바탕 곤욕을 치른 뒤였습니다. 지난 달 17일, 강남역 인근 화장실에서 살인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34살 김 모 씨가 처음 본 20대 여성을 죽인 겁니다. 당시 경찰은 묻지마 살인사건으로 인해 국민을 불안감에 떨게 했다는 비난을 들어야 했습니다.
그래서였을까요. 경찰은 수락산 사건 수사 내내 묻지마 범행은 아니라는 입장을 고수했습니다. 수사도 강도 혐의에 초점을 맞춰 진행됐습니다. 결국 계속된 압박에 김학봉은 “돈을 빼앗으려고 피해자를 위협했으나, 반항해 살해했다”고 진술했습니다. 경찰은 이 진술에 방점을 찍었습니다. 그리곤 지난 8일, 결국 살인이 아닌 강도살인 의견으로 사건을 검찰로 넘겼습니다.
다시 말해 김학봉이 피해 여성의 돈을 뺏기 위해 강도행각에 나섰고, 그 과정에서 살인이 벌어졌단 뜻입니다. ‘살인’보다 ‘강도’가 앞섰고, 범행 목적이 있었기 때문에 묻지마 살인이 아니라는 것이죠. “산에서 처음 만나는 사람을 죽이기로 마음먹고 산에 올라갔다”는, 그러니까 '살인'이 우선 목적이었다는 김학봉의 최초 진술은 묵살된 셈입니다.
하지만 김학봉은 검찰로 송치되던 날, 돈 때문에 살인을 저질렀냐는 취재진의 질문에 “아니다, 짜증이 나서…화가나서…”라고 대답했습니다. 자신의 최초 진술을 유지한 셈입니다.
결국 경찰의 판단은 검찰의 수사 과정에서 뒤집혔습니다. 검찰은 수사 끝에 김학봉을 살인혐의로 기소했습니다. 같은 증거를 놓고 검찰이 경찰과 다른 결론을 내린 셈입니다.
우선 부검 결과가 판단의 근거가 됐습니다. 피해여성의 손바닥엔 강도 살인 때 흔히 발견되는 방어흔이 전혀 없었습니다. 위협 없이 곧바로 살인을 저질렀다는 뜻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찔린 부위가 신체에 가장 치명적인 목과 배로 한정됐다는 점도 중요한 단서가 됐습니다.
돈을 거의 안 가지고 다니는 등산객을 노렸다는 점, 피해 여성의 주머니 지퍼가 그대로 닫혀있었던 점도 강도의 의도가 없었다는 판단을 뒷받침했습니다. 돈을 훔치려 사람까지 죽여놓고 제대로 주머니도 뒤져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검찰 관계자는 “등산로에서 먼저 마주치는 사람을 죽이겠다고 생각했고 실행으로 옮겼다는 점을 볼 때, 묻지마 범행으로 볼 여지가 충분하다”고 했습니다. 대검 과학수사부의 통합심리분석 결과도 "김학봉이 강도를 목적으로 살인을 저지른 것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로 나왔습니다. 참고로, 경찰도 조사 당시 프로파일러들을 투입했는데 당시엔 "범행 동기를 판단하기 어렵다"고 결론냈습니다.
제3자인 범죄 심리분석가들의 의견을 구해봤습니다. 검찰의 판단과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모 대학 경찰행정학과 교수는 “인과관계를 추정할만한 단서가 없다는 점에서 이번 사건은 묻지마 살인으로 봐야한다”고 말했습니다. 다른 범죄 심리학 교수도 “금품이 목적이었다면 애초에 산에 올라가 범행 대상을 기다리지도 않았을 것”이라며, “김학봉의 정신이 온전하지 않은 만큼 묻지마 범행 가능성이 충분하다고 봐야한다”고 판단했습니다.
경찰은 수사 결과가 뒤집힌 데 대해 “관점의 차이일 뿐”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같은 행위에 대해 ‘강도’대신 검찰이 ‘절도 미수’를 적용했으니 큰 차이가 없다는 겁니다. 강도살인의 형량은 최고 사형, 절도미수는 벌금형에도 처해질 수 있는 범행입니다. 관점의 차이라고 보기엔 죄의 무게 차가 너무 큽니다. 경찰은 김학봉이 진술을 검찰에서 진술을 번복했기 때문이란 말도 했는데,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김학봉은 수사 초기부터 불특정 피해자를 죽이려고 했다는 주장을 적어도 언론 앞에선 유지해왔습니다.
경찰의 수사 노력을 폄훼하자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이번 사건의 수사 결과에 대해 경찰만 유독 다른 쪽에 서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그 이유가 진술과 증거에 의한 판단이 아니라, ‘묻지마 범행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틀에 맞춰져 수사가 진행됐기 때문이란 의심도 거두기 어려운 게 사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