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일즈맨의 죽음’은 20세기 미국의 걸출한 극작가인 아서 밀러(Arthur Miller)의 대표작입니다. 1915년 미국 뉴욕에서 태어난 밀러는 10대 때 경제 대공황을, 20대 때 제2차 세계대전을 경험했습니다. 번영의 그림자 속에 가려진 미국 사회의 병들고 왜곡된 모습을 이토록 예리하게 포착해 무대 위에 펼쳐 보이는 건, 그에게 어쩌면 지극히 자연스러운 작업이었을지 모릅니다.
윌리 로먼에게 당시 ‘미국 중산층의 전형적 인물’이란 지위를 부여한 건 그의 직업만이 아닙니다. 그는 참을성 있는 아내와 특별히 잘난 것 없는 평범한 두 아들을 둔 가장이기도 합니다. 자기 소유의 주택과 자동차를 소유했지만, 모두 장기할부로 사들인 것들입니다. 노후를 대비해 보험을 들어놨지만, 할부금을 완납하기 위해선 아직 손에서 일을 놓을 수 없는 처지입니다.
한 때는 수당만 주당 170달러를 받으며 회사에서 인정받던 세일즈맨이었는데...촉망받는 미식축구 선수였던 고교생 아들은 대단한 사람이 될 게 분명해보였는데...무엇이 어디서부터 잘못됐는지 알지 못한 채 그의 의식은 끊임없이 과거로 회귀하며 고통스러워합니다.
이쯤 되면 잘 나가던 세일즈맨이 갑작스레 맞닥뜨린 외부의 충격과 시련을 극복하지 못해 좌절하는 이야기처럼 들리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과거에도 그렇게 많은 수당은 받아본 적도 없고, 그의 아들은 시험에 낙제해 고등학교 졸업조차 위태로운 상황이었습니다. ‘행복한 가정의 가장’이란 가면을 쓰고 있었지만, 출장지에선 외도를 저지르는 정직하지 못한 남편이고 아버지였습니다. 그의 꿈과 행복은 애초부터 신기루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물질주의를 종교처럼 숭배하는 속물근성, 사회를 약육강식의 정글이라 부르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이겨야 한다고 믿고 가르치는 야만성, 원하는 결과를 위해서라면 그릇된 방법쯤은 눈감는 비겁함, 주변 사람을 무시하고 허세를 부림으로써 자존감에 위안을 받는 졸렬함...윌리 로먼은 무한경쟁을 부추기는 배금주의 사회가 빚어낸 작은 괴물이며, 이러한 삶의 태도가 그의 불행을 잉태한 원인이었음을 우리는 목격합니다.
첫 장면에서 윌리가 내뱉는 “생각해 봐, 집 하나 사려고 평생을 일했어. 마침내 우리 집이 생겼는데, 그 집에 사는 사람이 아무도 없게 된 거야”라는 탄식의 말은 극의 마지막 장면에서 “오늘 주택 할부금을 다 갚았어, 다! 그런데 그 집에 살 사람이 아무도 없네”라는 아내의 메아리로 되돌아와 관객들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당신은 과연 이 비극에서 예외인가?’라고. 이 질문은 다음과 같이 바꿔 물을 수도 있을 겁니다. ‘당신 또한 이 배금주의 사회가 만들어낸 하나의 작은 괴물이 아닌가?’
이 비극적 인물들을 보며 느끼는 연민이 슬픔이 되고 그 슬픔이 다시 공포와 고통이 되어 우리를 엄습하는 과정을, 극을 통해 확인하실 수 있을 겁니다.
(사진=아서 밀러 원작, 한태숙 연출 '세일즈맨의 죽음'/ 예술의전당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