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지휘자'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니던, 50대 초반의 한국인 지휘자는 '우리나라에 세계적인 오케스트라를 키워야겠다, 그걸 도와줄 수 있는 일을 해야겠다는 건 일평생 가지고 있었던 꿈이었다'며 이제 그 '책임을 맡을 수 있을 때가 온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문화부 기자가 된 뒤 처음으로 정명훈 감독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자리였기에 당시 기자간담회가 더 생생하게 기억에 남습니다. 1시간 남짓한 시간 동안 '세계적인 지휘자 정명훈'이 한국 사회와 충돌하는 단면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정 감독을 둘러싼 많은 논란들은 그의 잘잘못을 논할 문제라기보다는 가치관의 충돌처럼 느껴졌습니다.
정명훈 감독과 그를 비난하는 사람들 사이에는 가치관의 '다름'이 있었고, 그 다름이 '불화'를 만들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어쩌면 그에게 너무나 많은 것을 기대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 관련 취재파일 보러가기 ▶[취재파일] 말보다 음악으로…정명훈 감독의 즉흥연주)
그리고 다시 1년, 다들 아시는 것처럼 정명훈 감독이 시향을 떠났습니다. 앞선 일주일은 특히나 긴박하게 돌아갔습니다. 2015년의 마지막 주말 정 감독의 부인이 박현정 전 대표에 대한 시향 직원들의 명예훼손에 관여한 혐의로 경찰에 입건된 사실이 알려졌고, 이튿날 시향 이사회에서는 높아진 비난 여론 속에 정 감독 재계약 안건 처리가 보류됐습니다.
다음날 정 감독은 재계약을 최종 거부하고 10년간 몸담았던 시향을 떠나겠다고 밝혔고, 30일 예정됐던 시향의 송년음악회를 마친 뒤 프랑스 행 비행기에 몸을 싣고 한국을 떠났습니다.
시향 사무국 직원들이 박현정 전 대표를 성토하며 시작된 시향의 내분사태는, 박현정 전 대표가 자신을 향해 있던 손가락을 더 유명하고 화제성 있는 정 감독과 박원순 서울시장을 향해 돌려세우면서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박원순시정농단진상조사시민연대라는 단체는 정 감독을 횡령과 배임 혐의로 고발했고, 박 전 대표가 특정 성추행 고소 건에 대해 무혐의 처분을 받자, 육성으로 공개됐던 당시 폭언과 막말마저 없었던 일인 양 여론은 '반전 드라마'라며 흥분했습니다.
혹자는 재작년 박현정 전 대표 파문 당시 박원순 서울시장이 정 감독의 손을 들어줬다며 정 감독을 박 시장의 사람으로 분류합니다. 혹자는 이명박 전 시장에 의해 영입됐고 그의 대통령 취임식에서 축하연주를 한 정 감독을 이 전 대통령의 사람으로 분류합니다.
외국에서 알아주는 인물이니 잘못이 있어도 덮고 가자는 게 아닙니다. 다만, 정 감독이 어떤 사람이든 혹시라도 이런 식의 프레임 때문에 그에게 사안의 본질에서 벗어난, 실제 받아야 할 비판보다 가혹한 마녀사냥 식 비난이 가해진다면 그건 비극이겠죠.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문화부 기자로서 제가 목격한 지난 일주일은 그런 비극이 벌어진 일주일이었습니다.
지난 10년간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하며 아시아 정상급 오케스트라로 성장한 시향은 정 감독의 사임으로 커다란 위기를 맞았습니다. 가혹한 여론몰이 끝에 시민의 소중한 자산인 시향이 위기에 처한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거장을 불화 속에 떠나 보내게 된 것도 유감입니다.
한 명의 서울시민으로 느끼는 개인적인 감정이지만, 정 감독이 이렇게 황망하게 떠날지 몰라, 시향을 지휘하는 모습은 언제든 볼 수 있다는 착각 속에, 거장의 귀한 무대를 좀더 자주 보러 가지 않았던 것도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 추신: 2016년 1월 시점에서는 정명훈 지휘자를 '전 서울시향 예술감독'으로 호칭하는 게 맞지만, 편의상 반복되는 '전'을 생략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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