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허리 한 번 제대로 못 펴고 농사를 짓지만, 작은 땅 일궈봤자 가족들 입에 풀칠이나 할 뿐 자식들 대학교육 시키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닙니다. 안 좋은 경우라면 무책임한 한량이거나 방탕한 난봉꾼이어서 처자식 고생이나 시킬 따름입니다. 분명한 건 아버지가 전자이든 후자이든, 엄마는 손에 물 마를 날 없고, 마지막 순간까지 자식 걱정과 고된 노동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겁니다.
익숙하신가요? 제게는 눈 감아도 절로 떠오르는 플롯입니다. 제가 청소년기에 그리고 20대에 읽은, 한국 문학 속 '엄마와 딸'의 얘기는 대부분 이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저뿐만은 아닐 겁니다. 다양한 소재의 작품 속에서 주인공인 '나'의 환경적 특성의 하나로 부모가 묘사될 때는 더 다양한 경우가 등장하는데, 이상하게도 '엄마'의 얘기, 특히 '엄마와 딸의 관계' 얘기가 작품의 핵심 소재로 등장할 때는 위와 같은 엄마가 반복적으로 등장하고는 했습니다.
![](http://img.sbs.co.kr/newimg/news/20150718/200852860_1280.jpg)
요즘 대학로에서 한창 공연 중인 작품 중에 '친정엄마'라는 연극이 있습니다. 방송작가 출신 고혜정 씨가 2004년 발표한 동명의 베스트셀러 에세이를 원작으로 만들어진 이 연극은, 2007년 초연된 뒤 2013년에 이어 올해 또다시 무대에 올려졌습니다. 고 작가는 비슷한 설정의 모녀관계를 바탕으로 '친정엄마와 2박 3일'을 썼고 이 또한 영화와 연극 등으로 만들어진 바 있어 많은 이들에게 친숙한 작품일 겁니다.
연극 '친정엄마' 또한 앞서 언급한 모녀관계의 상투성을 벗어나지 '않는' 작품입니다. '못한'이 아니라 '않는'이라고 표현한 건 이 극이 '어쩌다가'가 아니라 '노골적으로' 이런 상투성을 드러내고 있다는 뜻에서입니다.
![](http://img.sbs.co.kr/newimg/news/20150718/200852861_1280.jpg)
그런데도, 그런 대단히 큰 결함에도 불구하고, 연극을 보는 내내 마음이 울컥울컥 하고 자꾸만 눈물을 훔치게 되는 건 어쩔 수 없습니다.
극 중 엄마가 '나중에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꼭 너 같은 딸년 낳아서 키워봐라' 할 땐 엄마에게 한 잘못들이 떠올라 움찔하게 되고, 극 중 엄마가 '금을 준들 너를 사랴, 은을 준들 너를 사랴. 청아 내 딸 청아, 공양미 삼백 석에 너를 팔아 눈을 뜬들 무엇하랴' 노래를 부르면 엄마의 무조건적인 사랑이 떠올라 마음이 먹먹해집니다.
극 중 딸이 '문득 돌아보니 엄마는 할머니가 되어 있었습니다. 세월이 더 흘러 엄마가 더 늙어 죽게 된다면...엄마가 죽는다는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아프고 눈물이 나는데, 엄마가 죽고 없으면 나는 어떻게 살까요...'엄마'하고 소리 내어 부르고 싶으면 어쩌나, 엄마가 나에게 잘해주던 생각이 새록새록 나면 어쩌나, 자다가 문득문득 엄마 생각나면 난 어쩌나' 독백을 이어가는 동안 제 마음 속에도 걱정과 두려움이 커집니다.
딸이 '아 됐어, 한끼 안 먹는다고 죽어?', '나 바빠, 할 말 없으면 끊어'하고 퉁명스럽게 말을 할 때면, '왜 이래, 창피하게', '정말 내가 엄마 땜에 못살아'라며 핀잔을 줄 때면, 또 '엄마는 나에게 뭘 그렇게 잘 해줬다고 그래!', '그러게 안 낳았으면 서로 좋았잖아'하고 화를 낼 때면 미안함과 후회의 감정이 커집니다. 죄책감이 밀려듭니다.
그 죄책감은 딸의 마지막 독백과 닿아 있습니다. '엄마...엄마는 세상에서 나를 제일 사랑하는데, 내가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사람이 엄마가 아니라서...미안해. 정말 미안해'라는.
![](http://img.sbs.co.kr/newimg/news/20150718/200852862_1280.jpg)
나이가 몇 살이든, 결혼을 했든 안 했든, 자녀가 있든 없든 상관 없이, 모두의 마음에 와 닿는 연극입니다. 와 닿을 수밖에 없는 극입니다. 창작물로서의 가치와 별개로 말이죠. 짧은 시간이나마 자신의 엄마를 떠올리며 마음을 뜨겁게 하고 눈물을 흘리고 싶은 분들에게는 추천할 만한 연극입니다.
다만 한 가지 바라는 걸 덧붙이자면, 이제는 좀 다른 이야기도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저만 해도 이런 식의 상투성을 지난 엄마 캐릭터에 온전한 감정이입을 하기가 쉽지 않으니까요. 영화 '클래식'이나 '말죽거리 잔혹사'에서 묘사하는 학창시절은 그 자체로 흥미롭긴 하지만, 제게는 할 얘기가 많지 않았던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건축학개론'이 나오고 나서야 저와 친구들은 '그땐 그랬지'하며 더 많은 얘기를 하게 됐던 것 같습니다. 이제는 '내 엄마와 나의 관계'를 그려줄, 앞선 한 세대가 그려놓은 엄마의 상투성을 깨줄 그 다음 이야기를, 독자로서 그리고 관객으로서 저는 기다리고 있습니다.
▶ [취재파일] 흥미로운 연극 '스피킹 인 텅스'
▶ [취재파일] 연극 '푸르른 날에'…예술이 역사의 비극을 기억하는 방식
▶ [취재파일] 울고불고할 것 없다, 다만 먹먹할 뿐…연극 '3월의 눈'
▶ [취재파일] 연극 '경숙이, 경숙아버지'
▶ [취재파일] 사다리로 만든 세상…연극 '라이온보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