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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리포트] 웨스트 엔드에 '인터뷰' 오르던 날

[월드리포트] 웨스트 엔드에 '인터뷰' 오르던 날
조금은 짜증스런 하루였다. 성탄절 날 눈 뜨자마자 유튜브를 찾았다. 구글 크롬은 왜 이리 연결이 안 되는지.. 결국 스마트폰으로 영화 감상에 들어갔다.
 
5.99 달러나 주고 그 '인터뷰'를 봐야 했다. 어지간한 장면들은 예고편을 통해 공개된 터라 그렇게 끌리는 대목은 없었다. 지루했다.
 
웬 욕설은 그리도 많을까? 세스 로겐 등 몇 안 되는 주인공들은 'F'로 시작하는 네 글자 욕설을 쉴 새 없이 쏟아냈다. 한번 세 보려다 포기했다.
 
나중에 영화 정보 데이터베이스인 IMDb에 들어가 '보호자 안내'를 봤더니 욕설, 비속어 사용(profanity)이 10점 만점에 10점이다. 네 글자 F-욕설은 무려 143번 정도가 나온다고 한 다. 이에 못지않은 욕설과 성적 표현을 담은 대사도 상당수다.
 
폭력, 음주와 흡연, 공포 등 다른 항목들은 상대적으로 나은 평가를 받았는데, 다만 "김(정은)이 암살되는 장면은, 그가 한 나라의 현직 독재자라는 점을 고려할 때, 일부 관람객들에게 불쾌감을 줄 수 있다"고 적었다.
 
● 웨스트 엔드 '서끝 극장'으로…
 
그 '인터뷰'를 상영한다는 극장을 뒤졌다. 워싱턴 교외 두 군데, 시내 한 곳이 나왔다. 잘 됐다. SBS 워싱턴 지국으로 출근해서 기사를 정리하고 택시를 잡아탔다. 서쪽 끝 '웨스트 엔드 시네마'로 향했다. M 스트리트 23번 가에 있었다.
 
극장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방송 송출 차량이 있는 걸 보니 뉴스의 현장일 것이었다. 투명한 유리 안쪽으로 좁은 극장이 바글바글했다.
 
영화 '인터뷰'를 제작한 소니영화사가 테러 위협을 이유로 성탄절 대형 극장 체인 개봉을 포기하자, 3백 여 독립 소극장들이 상영을 자청했는데, 바로 이 '서끝 극장'이 그 중 하나였다.
 
캐나다와 대만의 방송사, 그리고 로이터 TV 취재진까지 인터뷰에 바빴다. 성탄절 휴일에 혼자 나온 터라 비상수단을 강구했다. 휴대폰 카메라로 인터뷰를 하고, 외국 방송사 취재진에게 부탁해 역시 휴대폰으로 현장 '스탠드 업'까지 했다.
이성철_취파
벌써 이틀 치 표가 거의 매진됐다. 무작정 나온 한 여성 관객은 "성탄절 영화 보러 나오는 사람이 없을 줄 알았는데 놀랐다, 집에 가서 온라인으로 봐야 겠다"며 발길을 돌렸다.
 
극장 직원으로 보이는 한 남성이 팝콘을 튀기고 있다. 손님 맞으랴 쇄도하는 인터뷰 요청에 응하랴 바쁘다. 낯이 익다 싶었는데 하루 전 SBS 8뉴스에 출연한 인물이었다.
 
조시 레빈(Josh Levin), 독립 극장 '웨스트 엔드 시네마'의 공동설립자이자 매니저다.
 
나중에 살펴보니, CNN에 나왔고 로이터 TV와 AP, AFP, 여러 영화 전문 매체를 통해 전 세계에 소개됐다. 

● "모든 이야기는 여기서…"
 
'여기에서 모든 이야기를 한다 (All stories told here).' 그가 언론에 소개한 웨스트 엔드 극장의 슬로건이다. "어떠한 외부의 압력이 있더라도 그 정신을 지킬 것이며 그것이 바로 이 극장의 철학"이라는 설명이다. (로이터 TV)
 
영화 '인터뷰' 개봉이 취소됐다는 이야기를 듣고 소니 측에 전화를 걸어서 웨스트 엔드 극장에서 상영할 수 있을지 물었다고 한다. 워싱턴에선 웨스트 엔드이지만 캘리포니아에서 보면 동쪽 끝 ‘이스트 엔드’다.
 
영화 '인터뷰'의 포스터는 눈에 띄지 않았다. 벽에는 '위플래시' '보이후드' '나를 찾아줘(Gone Girl)' '바바둑' 그리고 '시티즌포'의 포스터들이 붙어 있었다.
이성철_취파
 이들 영화를 본 건 아니지만 헐리우드 영화 '인터뷰'와는 감이 달랐다.
 
"예술을 사랑하는 단골손님 몇 명이 이런 이야기를 하더군요. 평소 세스 로겐과 제임스 프랭크의 코미디 영화에 빠져들 일은 없지만, 원칙이 너무나 중요하기 때문에 왔다고요." (AP)
 
원칙 - 표현의 자유를 해치도록 둘 수 없다는 뜻이리라.
 
지국으로 돌아와 아침 뉴스를 전하고 몇 시간 뒤 다음 편 상영 시간에 맞춰 다시 '서끝 극장'으로 향했다. 점심은 건너뛰고 저녁은 쌀국수 컵라면으로 때웠다. 미안하지만 이번에는 제대로 된 인터뷰를 위해, 가족들과 성탄절 저녁 시간을 보내고 있을 동료까지 불러내야 했다. '아! 잔인한 성탄절이여~'
 
어둠이 짙게 깔린 극장 입구가 북적였다. 관객과 취재진이 뒤엉켰다. 워싱턴의 '채널 8' 방송 기자는 간이 중계 장비를 이용해 생방송을 했다.
이성철_취파
영화가 끝날 시간에 맞춰 갔는데 왼쪽으로 줄이 길었다. 다른 영화 때문이겠지 했는데, 다음 회 분 '인터뷰'를 보려는 관객들의 행렬이었다. 이때는 벌써 사흘치 표가 매진돼 가고 있었다.
 
"영화 '인터뷰' 괜찮았나요?"
"재밌었어요."
 
영화를 보고 달려 나가는 여성 관객의 첫 반응이다.
 
"북한이 풍자를 너무 곧이곧대로 보고 있어요. 이건 진지한 영화가 아닙니다. 그냥 코미디에요."
 
"표현의 자유를 누릴 권리, 또 우리가 좋아한다면 어떠한 오락도 즐길 권리가 있습니다."
 
다른 관객들 얘기들 들었다. 핵심은 '표현의 자유'에 있었다. '바로 이게 자유의 나라 미국이구나' 하는 생각에 움찔했다. 미 FBI의 중간 수사 결과 발표대로 해킹을 북한이 했든, 여러 보안 전문가들의 분석대로 소니영화사 내부자나 러시아 쪽 제 3의 해커가 했든, 미국을 잘 못 건드린 건 틀림없었다.
 
'9.11을 기억하라'는 최후의 협박이 컸다. 미국민 가슴 속 가장 예민한 부분을 파고들었다. 미국 정부는 믿을만한 테러 위협이 없다며 국민들을 안심시켰지만, 서둘러 성탄절 개봉을 취소한 소니영화사 경영진의 자충수가 스스로 발등을 찍었다.
이성철_취파
  ● 제 발등 찍은 소니…표현의 자유 선봉에
 
전문가들이 B급으로 평가한 헐리우드 코믹 영화 '인터뷰'가 표현의 자유의 선봉에 서게 된 경위다. 성탄절 날 '표현의 자유' 지키기에 동참하려 스스로 극장으로 향한 관객들은 대체로 호평했다. 그러나 한 여성 관객은 10점 만점에 7점을 주는데 그쳤다.
 
미국의 건국 이념 '자유'는 동경할 만하다. 특히 말글로 먹고 사는 기자에게 '표현의 자유'는 지켜야 할, 빼앗길 수 없는 제1의 덕목이다.
 
그러나, 아무리 밉고 뒤집어엎고 싶어도 '아(我)'의 자유가 '타(他)'의 존재를 부정할 지경에 이른다면? 여러 답이 있겠지만 오늘 정치 전문 폴리티코에 실린 데이비드 로저스의 글이 눈에 띈다.
 
''인터뷰'에 재미난 구석은 없다 (Nothing funny about 'The Interview')'라는 글에서 언제부터 암살이 미국 유머의 주제가 됐는지 묻고 있다.
( 기사 보기 : Nothing funny about 'The Interview' )
이성철_취파
3주 전 기자가 미 국무부의 로버트 킹 북한인권특사에게 "성탄절에 '인터뷰'를 볼 계획이 있느냐 물었을 때, 그는 "다른 할 일이 많다, 성탄절 날 극장에 갈 일은 없을 것"이라며 멋 적게 웃으며 피해갔다. 이 영화가 갖는 소프트파워적, 정치적 함의를 의식했으리라.
 
백악관 취재진도 휴가를 떠나는 오바마 대통령에게 물었는데, 오바마 역시 자신만의 영화 목록이 있다며 피해갔다.
 
킹 특사에게 괜한 질문을 던졌나? 따분한 강연장에 폭소를 터뜨린 '탱크 포탄'과도 같았는데, 그 유탄이 고스란히 기자에게 돌아왔다. 성탄절 아침부터 다음날까지 꼬박 24시간을 '인터뷰'에 시달렸다.
 
그래도 위안을 삼는다면 '서끝 극장' 웨스트 엔드 시네마의 발견이다. AMC나 리걸 같은 대형 체인만 있는 줄 알았는데, 워싱턴 시내에서 보물을 찾았다. 커다란 '인터뷰' 파문이 사그라들면 극장 흰 벽에 포스터가 붙어 있던 그런 작은 영화들을 한번 볼 작정이다.
이성철_취파
● ‘인터뷰’ 끝나고 부산에서…
 
취재를 다 마치고 나오는 길에 관객 안내에 바쁜 매니저 조시 레빈에게 덕담을 건넸다.
 
"CNN에도 나오고 다른 방송에도 나오고 스타가 되셨더군요."
 
의외의 답이 돌아왔다.
 
"내년에 부산에 가면 잘 찍어 주세요."
"오! BIFF에 오시나요?"
 
부산국제영화제에 올 거란다. 작은 독립 영화관을 차리고 손수 팝콘을 튀기는 영화인다운 깜짝 답변이었다.
 
아침저녁 극장에 와서 인터뷰를 다 마쳤으니 영화 '인터뷰' 열풍을 전할 취재는 어느 정도 됐다. 집으로 돌아가 눈을 비비며 몇 시간 더 정리만 하면 된다. 그런데, 탱크 포탄에 얼굴이 녹고 머리가 터지는 영화 속 장면은 왜 이리 선명할까? 두고두고 기억에 남을 잔인한 성탄절이다.
이성철_취파
 

▶ '인터뷰' 극장 개봉…소니·MS 또 온라인 장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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