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경구의 영화 데뷔작 '박하사탕'(1999)이 개봉했을 때, 그에게 쏟아진 스포트라이트를 기억해보자. '최고 연기파 배우의 탄생', '충무로 역사상 가장 강렬한 신인' 등 화려한 수식어로 점철된 수많은 칭찬이 쏟아졌다. 마치 연기의 신이 지상에 당도한 것과 같은 열렬한 반응이었다.
그만큼 그의 연기는 빼어났고, 놀라웠다. 이후 '오아시스', '공공의 적', '실미도'까지 설경구는 연기력뿐만 아니라 흥행 능력까지 입증하며 몇 년 만에 충무로에서 가장 잘나가는 배우가 됐다. 실로 대단한 질주였다.
설경구는 충무로에서 '메소드 연기'(극중 인물과 동일시를 통한 극사실주의적 연기)에 가장 능한 배우로 꼽힌다. 캐릭터를 위해 체중을 늘리고 불리는 육체적 변화를 감행하는 것은 물론이고, 탁월한 심리 연기를 통해 인물의 감정을 밑바닥부터 끌어올린다. 그러나 그 스스로는 '메소드 연기'를 잘 모르고 싫어한다고까지 말한다. 겸손이다.
데뷔 20년, 메소드 연기의 달인이라 불리는 설경구가 신작 '나의 독재자'(감독 이해준)에서 연기의 '연'자도 제대로 모르는 재능 없는 배우를 연기했다.
'나의 독재자'는 자신을 김일성이라 굳게 믿는 남자와 그런 아버지로 인해 인생이 꼬여버린 아들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 배우의 숙명과 아버지의 삶을 녹여낸 이 작품의 중심엔 설경구의 눈부신 열연이 있다.
"처음에 이 영화의 대본을 읽었을 때 매우 세고 무겁게 여겨졌다. 내가 출연에 대한 답을 안 주니 이해준 감독이 한번 만나자고 하더라. 그리곤 두번째로 읽었는데 그땐 무척 가볍게 잘 읽히더라. '이런 코미디 같은 인생이 있나' 싶었다"
설경구는 단순히 김일성 역이었다면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절대악 캐릭터는 매력이 없다고 여겼다. 그가 반한 지점은 하찮은 김성근이 김일성이 되려는 눈물겨운 모습이었다고 했다. 그리고 배우 김성근이기 전에 아버지 김성근을 다룬 점이 인상적이었다고 했다.
"오래간만에 접한 호흡 긴 영화였다. 요즘 영화 대부분이 전개도 빠르고 조금은 가볍게 다루지 않나. '나의 독재자'의 시나리오를 읽으며 '내가 언제 이런 부담스러운 역을 해봤더라' 싶었다. 특수분장, 감정의 진폭 등 넘어야 할 벽이 많은 캐릭터지만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봄부터 초여름에 걸쳐 찍다 보니 땀으로 인해 특수분장이 떨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특수분장이 떨어지면 그날 촬영을 접어야 하니 분장 담당자들은 초긴장 상태였다. 이번에 내 특수분장을 해주신 송종희 씨는 '은교'때 박해일의 분장을 담당하셨던 분이다. 그땐 10시간에 걸쳐 했다는데, 그 경험으로 인해 내 분장 시간을 확 줄일 수 있었다"
외모는 분장의 도움으로 실재의 인물과 가깝게 완성하면 됐지만, 연기는 또 다른 영역의 어려움이었다. 김일성이라는 이미 세상을 떠나고 없는 인물을 표현해내기란 쉽지 않았다.
"김일성의 연두 교시(敎示) 자료 화면을 봤는데 가래 끓는 목소리더라. 그리고 더듬더듬 느리게 말하는 편이라 톤이 좀 연극적으로 들렸다. 자료를 보면서 두 특징을 흉내 내려 했다. 북한 사투리를 가르쳤던 선생님께서 김일성을 본 적 있다고 하더라. 나를 보더니 비슷하다고 해 안심이 됐다"
'나의 독재자'의 하이라이트는 후반부 등장하는 남북정상회담 예행 연습신. 설경구는 이 장면에 모든 것을 쏟아부었다. 김성근의 일생일대 열연이자 아들에게 바치는 숭고한 선물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의외의 대답이었다. 이 장면을 보면 누구나 김성근이 생애 최고의 메소드 연기를 선보였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설경구는 김일성이 아닌 김성근을 연기했다고 했다.
설경구는 이 영화에서 김성근의 눈을 주목해 달라고 했다. 그는 "김성근은 김일성으로 살기로 결심한 이후부터 한 번도 아들 태식(박해일 분)의 눈을 제대로 보지 않는다. '리어왕' 독백을 하는 그 장면에서 오 장관(윤제문 분)쪽으로 몸을 살짝 트는데 그것은 CCTV를 찾기 위함이다. 몇 십년만에 처음으로 아들과 눈을 맞췄다. 그것도 CCTV를 통해서 말이다"라고 말했다.
"성근은 김일성에 못 빠져 나온 게 아니라 안 빠져나온 것이었다. 감독님은 이 영화를 통해 배우의 길과 아버지의 삶을 이야기하고 싶었다고 했는데 나는 아버지의 삶에 더 비중을 뒀다. 마지막 연극도 아버지로서 한 것이다. 유일한 관객인 아들을 위한 혼신의 연기였다"
이번 영화는 설경구로 하여금 자신의 연기 인생을 되돌아보는 계기가 됐다. 그는 자신이 맡은 캐릭터를 '김성근 선생'으로 지칭하며 그로 인해 자신은 큰 착각을 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고 했다.
설경구는 배우의 숙명에 대해 "모든 배우의 목표가 '제대로 하나만!'이다. 물론 그게 마음처럼 쉽지 않다는 것도 안다. 배우는 철 안드는 애기 같다. 잘 맞거나 안 맞거나지 적당히 맞는 것이란 건 없다. 제대로 된 연기가 주는 카타르시스를 위해 그렇게 하고 또 하는 거다"라고 설명했다.
지난해 '소원'에 이어 올해 '나의 독재자'까지 최근 2년간 설경구가 보여준 연기의 깊이가 남다르다. 그는 "좋게 말씀해주셔서 감사하지만 이러다가 다음 영화 또 개판 칠 수 있다. 난 인생에 울화가 많아서 작품에도 울화가 많다"고 웃어보였다.
스스로 '울화가 많은 삶'이라고 했지만, 어쩌면 그래서 이런 깊이있는 연기가 나오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는 배우라는 자신의 천직에 대해 "힘들고, 재밌고, 또 고통스럽다"고 표현했다. 더불어 "안정적이면 그게 어디 배우의 삶이겠나?"라고도 했다.
고통마저도 연기로 승화하는 배우, 누가 뭐래도 설경구는 천생 배우다.
(SBS 통합온라인뉴스센터 김지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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