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투는 아침 일찍 시작됐습니다. 일본은 먼저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1군과 이시다 미쓰나리가 이끄는 2군이 선봉을 맡아 압도적인 수적 우세를 믿고 성벽으로 달려들었습니다. 하지만 조선은 화차와 신기전을 이용해 총탄과 나무 등을 쏘아올려 공격했고, 1군과 2군 모두 큰 피해를 입고 물러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번에는 3군의 구로다 나가마사가 성의 높이가 낮은 것을 보고 누각을 쌓아올려 그 안에서 조총을 쏘면서 공격했지만, 다시 조선군의 화포 공격에 일방적으로 무력화되고 말았습니다.
결국 4군을 이끌던 총대장 우키다 히데이에가 직접 진격하자, 한때 조선군이 설치한 2겹의 목책 중 바깥쪽이 뚫리면서 방어선이 무너질 뻔한 위기에까지 몰렸습니다. 하지만 조선군은 성내에 보유하고 있던 신기전, 총통, 화차, 비격진천뢰 등 가용 화력을 모두 집중시켜 결사적으로 방어했고, 결국 우키타 히데이에는 거의 사망에 이를 뻔한 치명상을 입고 간신히 후퇴했습니다.
행주대첩이라는 기적적인 승리의 주역은 물론 권율 장군 이하 관군과 의병, 민간인이 한 마음으로 뭉쳐 적을 물리쳤던 데에 있겠지만, 그 이면엔 세종 때부터 개발돼 이미 실전에서 여러 차례 위력이 검증된 로켓무기 신기전의 활약이 있었습니다.
어제는 행주대첩 420주년(7갑자)을 맞는 날이었습니다. 고양시와 국립과천과학관, UST 등은 420주년을 맞아 당시의 격전지인 행주산성에서 새로 복원한 신기전 시연행사를 열었습니다. 당시 전투에서 큰 활약을 보여준 세계 최초의 이동식 로켓 발사대인 화차, 그리고 세계 최초의 2단 로켓이라고 할 수 있는 산화신기전(散火神機箭)이 선을 보였습니다.
화차는 중신기전(中神機箭) 100발을 동시에 발사해 최대 250m까지 날려보낼 수 있습니다. 바퀴가 달려 있어 2~3명이 함께 끌고 밀면서 손쉽게 이동할 수 있게 돼 있고, 이날 공개된 것과 조금 달리 조선왕조실록에는 화차를 발사하는 사람이 몸을 숨길 수 있도록 양 옆에 방패 역할을 하는 판자를 덧댈 것을 지시하는 내용이 등장하기도 합니다.
참석자들과 기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화차에 탑재된 신기전과 연결된 심지에 불이 붙었습니다. 잠시 후 불붙은 100발의 로켓 화살이 쉴 새 없이 폭음과 화염을 내뿜으며 맹렬하게 날아갑니다. 어제 8뉴스를 보시면 지상 카메라와 헬리캠(공중 무인 카메라)으로 촬영한 화차의 발사 모습을 입체적으로 보실 수 있습니다.
영화 '신기전'(2008)에서도 이 화차를 이용해서 수백발의 신기전을 동시에 쏘아올려 다수의 적(영화에서는 명나라 군대)을 제압하는 장면이 나옵니다만, 행주대첩에서도 이 화차의 위력은 엄청나 일본군의 선봉 1군과 2군을 물리치는 것은 물론, 이 신무기를 처음 목격한 나머지 일본군들의 사기를 꺾는데도 크게 기여했다는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하지만 어제 시연에서는 산화신기전이 하늘 높이 솟구치면서 발사되긴 했지만, 그 안의 지화가 다시 점화되는 것을 목격할 수는 없었던 것이 아쉬움으로 남았습니다. UST 채연석 교수가 복원한 이 산화신기전은 지난 2009년에도 3차례 발사됐지만 당시에도 지화를 점화시키는데는 실패했습니다.
행주치마에 돌을 싸서 던졌다는 이야기는 정사에는 기록되지 않고 야사나 민담에서 전승돼 왔습니다. 고등학교 국어시간에도 배우지만 '행주치마'의 어원이 행주대첩 때보다 더 거슬러 올라간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이제는 행주대첩을 '돌을 던져 안간힘 끝에 어찌어찌 막아냈다'는 식으로 이해하기보다는, 당시 세계 최첨단 무기였던 신기전과 화차, 총통과 비격진천뢰 등이 총동원된 전투로 재조명해야 할 때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잠깐 전투 얘기로 다시 돌아가자면, 행주대첩 당시 서쪽면을 방어하고 있던 승병들은 석회와 재가 담긴 주머니를 차고 있다가 일본군에게 던져 터뜨려서 막아냈다는 기록도 있습닌다. 석회와 재는 수분과 접촉하면 격렬한 발열반응을 일으키는데, 특히 눈을 노리고 던져 전투력을 잃게 만드는 화학전술까지 동원됐던 셈입니다. 16세기 동아시아의 삼국의 운명을 뒤흔들었던 격변의 임진왜란은 세계 최고의 전쟁무기들이 선보였던 '기술전쟁'의 총화가 아니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