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승범이 '용의자X' 이후 약 3개월 만에 '베를린'(제작 외유내강, 감독 류승완)으로 돌아왔다. '베를린'은 동서 냉전의 상징과 같은 도시인 베를린을 배경으로 각자의 목적 때문에 서로가 표적이 되는 남북 비밀 요원들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다. 이 영화에서 류승범은 북한군 장교 '동명수' 역할을 맡아 야욕을 위해서는 살인도 서슴지 않은 냉혈한으로 변신했다.
"류승완 감독에게 이 영화의 이야기를 처음 들은 것은 2011년 가을쯤이었다. 북한의 산업 스파이들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가 될 것 같다고 대략적으로만 얘기해주셨는데, 호기심을 자극했다. 우리에게는 북한이라는 도시가 베일에 싸인 듯한 느낌이 있지 않은가. 그 부분에 큰 흥미를 느꼈던 것 같다"
류승범은 자신의 캐릭터를 '악의 축'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영화에서 선과 악이 있다면, '동명수'는 절대악에 가까운 인물이다. 북한 최고층의 2세면서도 더 큰 탐욕을 가지고 악행을 서슴지 않는다. 북한 사투리를 가르쳐주신 선생님이 말하시길 실제 북한의 권력층 내부가 엄청 엄격하고 무섭다고 하더라. 그 부분을 염두에 두고 캐릭터를 그렸다"
'베를린'에서 류승범의 연기는 생동감이 넘친다. 외국어만큼이나 난해하게 다가왔을 북한어의 능숙한 구사는 물론이고, 분노와 냉소를 머금은 감정 연기, 그리고 화려하면서도 강력한 액션 연기까지 그 모든 요소들이 절묘하게 어우러져 '동명수'라는 캐릭터를 완성한 것이다.
"사투리로 연기하는 것은 외국어를 쓰는 것만큼이나 어렵다. 북한어로 대사를 할때는 목소리를 눌러서 표현했다. 톤이나 뉘앙스 등의 느낌이 내 실제 목소리 보다 한 톤 낮추는 게 더 실감나게 들렸기 때문이다"
액션을 맛깔나게 소화하기로 유명한 배우답게 이번 영화에서도 흥미진진한 액션 연기를 선보였다. 특히 영화 내내 대립각을 세우는 '표종성' (하정우 분)과의 액션신들은 이 영화의 백미이기도 하다. 그는 "액션 연기는 예전부터 좋아했다. 문제는 생각으로는 매우 신나지만, 실제로 할 때는 힘들다"면서 "특히 마지막 액션신은 한 여름에 찍어 더위와의 전쟁이었다. 그러나 상대배우와 치고받을 때 주는 쾌감은 여전했다"고 말했다.
류승범은 대부분의 영화에서 극을 끌고 가는 역할을 했다. 그러나 '베를린'에서는 한석규, 하정우, 전지현 등 톱배우들과 앙상블을 맞추며 시너지를 냈다. 충무로 최고 배우들과의 만남인 만큼 긴장도 되고, 설레기도 했을 터.
"언제 이 배우들이 한 작품에서 모이겠나 싶었다. 설렘도 큰만큼, 부담도 컸다. 하정우 하면 충무로 대세 배우 아닌가. 같이 연기해보니 굉장히 유연한 사람이란 것을 느꼈다. 촬영할 때는 프로페셔널 했고, 현장에서는 유머가 넘쳤다. 또 한석규 선배의 경우 1990년대 충무로의 르네상스 시대를 연 대단한 분 아닌가. 영화 안에서 마주하는 신은 거의 없었지만, 그 분과 한 필름 안에 담기는 것만으로도 영광이었다"
멀티 캐스팅이 장점만 있는 것은 아닐 터. 류승범은 자신이 현장에서 예민해지는 스타일이라 다른 배우들에게 행여 실례가 되지는 않았나 걱정했다. 그는 "돌이켜보면 나의 예민함이 (하)정우 형이나 (전)지현 씨에게 불편함으로 다가가지 않았나 걱정되기도 한다. 정우 형은 현장을 즐기는 편인데 나는 총격 액션 같은 큰 신을 앞두고 많이 예민해져서 그러지 못했다"고 말했다.
충무로를 대표하는 개성파 배우를 생각하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사람이 류승범이다. 전문적으로 연기를 배워본 적이 없는 19살의 문제아였던 류승범은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를 통해 동물적인 본능과 감각에 가까운 연기로 평단과 관객을 사로잡았다.
그 이후 류승범은 매 작품마다 자신의 독특한 캐릭터가 투영된 연기를 선보였다. 이른바 '양아치' 캐릭터다. 영화 '베를린'에서 맡은 북한 장교역할마저도 그는 양아치스럽게 소화해냈다. 류승범은 "양아치 캐릭터에 대한 애착이 있다. 관객들이 나를 통해 보고 싶어 하는 캐릭터인 것 같기도 하고. 백발노인이 되더라도 이 캐릭터를 맛깔나게 연기하고 싶다"고 말했다.
데뷔작의 강렬한 인상 때문인지 혹은 그가 걸어온 자유로운 행보 때문인지 34살의 류승범에게는 아직까지도 '길들여지지 않은 청춘' 같은 이미지가 있다. 누군가에게 간섭 받지도 또는 동화되지도 않고 자신의 길을 꿋꿋이 갈 것만 같다.
"만들어낸 이미지는 아니다. 내가 추구하는 건 자유로움이다. 구속받은 것 자체를 싫어한다. 아직도 천방지축 같은 면이 많다. 길들여지지 않은 내 모습이 좋다. 그런데 이제 30대가 되니까 주위 사람들도 돌아보고, 최소한 피해는 주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은 들더라"
최근 몇 년간 류승범의 필모그래피를 살펴보면 그가 스스로 연기의 외연을 확장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과거에는 어떤 영화에서도 캐릭터가 먼저 보였다면, 최근에는 작품 안에서 자연스레 녹아들고 있다. 더불어 종전까지는 감정을 분출하는 연기에 발군의 능력을 보였다면 최근작인 '부당거래', '용의자 X', '베를린'에서는 감정을 누르면서도 인물의 심리를 탁월하게 표현해냈다.
"자연스러운 변화라고 생각한다. 20대 때는 에너지도 넘치고. 나 스스로 통제가 안되는 면이 있었다. 그런 에너지가 외부적으로 나오기도 했었다. 그러다보니 관객들에겐 영화보단 캐릭터가 먼저 보였던 것 같다. 하지만 30대가 되면서 다른 관점으로 연기를 생각하게 됐다. 영화와 캐릭터를 전체적으로 보면서 그림을 그리게 되는 것 같다"
데뷔 12년, 길다면 길고 짧았다면 짧은 시간이다. 형 류승완 감독의 영화에 출연하면서 배우의 길을 걷게 된 류승범은 처음부터 형의 후광과 상관없이 자신의 길을 걸어왔다. 그러나 형의 작품에서 늘 베스트의 연기를 보여줬던 것은 사실이다. '베를린'은 '부당거래'에 이어 배우 류승범을 대표하는 또 한편의 영화가 될 것을 의심치 않는다. 또한 감히 예측하건데 이 작품은 류승범에게 달콤한 흥행까지 안겨줄 것이다.
"'베를린'의 흥행? 생각대로 되기 때문에 잘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내가 원한다고 흥행이 되는 건 아니니까, 일단 관객들의 판단을 믿고 기다릴 생각이다. 한 가지 자부할 수 있는 것은 관객들이 '베를린'을 보고 절대 '티켓 값이 아깝다'는 말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거다. '베를린'은 다양한 관점으로 즐길 수 있는 영화인데, 이야기의 줄기들이 조금 복잡하다 생각되면 그냥 액션 자체만 즐겨도 너무나 즐겁고 멋진 영화로 다가갈 것이다"
ebada@sbs.co.kr
<사진 = 김현철 기자khc21@sbs.co.kr>
(SBS 통합온라인뉴스센터 김지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