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가운데 충무로 대표 액션 키드 류승완 감독이 첩보물에 출사표를 던졌다. '부당거래'를 통해 한국 사회의 폐부를 날카롭게 드러낸 바 있는 류승완 감독은 '베를린'(제작 외유내강, 배급 CJ 엔터테인먼트)을 통해 영화의 무대를 해외로 확장하고, 이야기의 규모를 상하로 키우는 등 자신의 영화적 야심을 제대로 드러냈다.
영화는 냉전 사회 종식 후에도 암울한 기운이 서려있는 '베를린'을 배경으로 각자의 목적 때문에 서로가 표적이 되는 남북 비밀 요원들의 이야기를 그린다.
첩보물은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인 한국에서는 더없이 현실적으로 와 닿을 수 있고, 또 상상력의 살을 마음껏 붙일 수 있는 장르다. 류승완 감독은 첩보물 안에서도 에스피오나지(espionage : 신분을 감추고 활동해야 하는 스파이의 고충을 현실적으로 다루는 영화)에 방점을 찍었다.
남과 북이 아닌 제 3의 공간 베를린에서 신분을 숨기고 살아가는 북한 비밀요원의 갈등과 고뇌가 이야기의 중심이다. 김정일이 죽고, 새롭게 도래한 김정은 시대의 혼란, 그 안에서 기생하는 최고 권력층 내부의 갈등은 주인공의 삶을 뒤흔든다.
무국적, 지문 감식 불가의 북한 비밀 요원 '표종성'(하정우 분)과 그를 국제적인 음로 한 가운데로 밀어 넣는 북한 권력자의 아들 '동명수'(류승범 분), 이 음모들 사이에서 반역자로 의심을 받게 되는 통역관 '련정희'(전지현 분), 그리고 제 3자의 눈으로 그들을 추격해나가는 국정원 요원 '정진수'(한석규 분)가 핵심 캐릭터다. 이들은 각자의 목적을 위해 서로를 표적으로 삼고, 쫓고 쫓기는 결투를 벌인다.
'베를린'은 소재와 이야기, 캐릭터까지 첩보 액션의 공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이 영화는 전형성이라는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늘 동경과 감탄의 눈으로만 바라봤던 할리우드 스타일의 첩보물이 한국화 되었을 때 어떻게 구현될 수 있는가를 야심차게 보여준다.
특히, 전체 67회차의 촬영 중 단 25회차 만에 완성한 해외 촬영분은 이 영화의 독보적인 강점이다. 독일의 베를린과 라트비아의 리가에서 촬영된 주요 액션 신들은 스케일과 완성도면에서 흠잡을데 없다. 호텔에서의 총격전에서 고가 건물을 뛰어넘는 질주신으로 이어지는 오프닝 시퀀스, 13m 상공에서 떨어지는 아찔한 탈출 와이어 액션신, 도심 광장을 관통하며 벌이지는 카 체이싱 신 등은 하나같이 세련되고 속도감 넘치는 구성을 자랑한다.
때때로 류승완 감독은 액션 시퀀스를 길게 할당하면서 지나치게 스타일을 과시했다는 인상 주기도 한다. 그러나 다소 과시적 영상초자도 보는 이들로 하여금 감탄하게끔 하는 것은, 이 장르 안에서 어떤 감독도 하지 않았던 아니 엄두도 내지 못했던 스케일의 액션들이 스크린에서 펼쳐지고 있다는 놀라움 때문일 것이다.
배우들의 앙상블도 돋보인다. 지난해 '도둑들'의 성공으로 그 시너지가 입증된 바 있는 멀티캐스팅은 '베를린'에서 빛을 발한다. 한석규와 하정우를 필두로 류승범, 전지현까지 4인의 주요 배우들은 캐릭터를 완벽하게 지배하며 열연을 펼쳤다.
'추격자'와 '황해'에서 거친 매력이 살아있는 '날것의 액션'을 보여줬던 하정우는 첩보물에서도 극을 긴장감 있게 이끌며, 세련된 구성의 액션마저도 탁월하게 수행할 수 있음을 보여줬다.
류승완 감독의 영화에서는 늘 자신의 능력치 이상을 보여줬던 류승범은 북한 권력층의 비뚤어진 야욕을 특유의 능글맞은 연기로 소화해냈다.
또 '쉬리', '이중간첩' 등 한국 첩보영화의 계보 속에 늘 함께 했던 한석규는 '베를린'에서 하정우와 절묘한 앙상블을 과시하며 존재감을 과시한다. '도둑들'을 통해 캐릭터 연기의 가능성을 보여줬던 전지현도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며 비극을 표현하는 한층 성숙된 연기를 펼쳤다.
물론 ‘베를린’에 아쉬움이 없는 것은 아니다. 액션신 구현에 많은 공을 들인 반면, 영화의 스토리는 중반 이후부터 맥이 풀린다. 적과 동지를 구분할 수 없는 상황에서 위기를 맞는 표종성이 영화의 극적 재미를 주는 요소였다면, 후반부 들어 단 하나의 목적에 집착하는 드라마로 늘어지면서 특유의 활력을 잃는다.
무엇보다, 이 영화를 접하는 관객들은 자연스레 할리우드의 '본 시리즈'를 떠올릴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베를린'의 한계라고 여겨지진 않는다. 오히려 한국형 첩보물이 도달할 수 있는 모범답안으로서의 냉철한 비교를 가능하게 하는 긍정적 요소로 작용하지 않을까 싶다.
러닝타임 125분. 15세 관람가. 1월 31일 개봉.
(SBS 통합온라인뉴스센터 김지혜 기자)
<사진 = 영화 스틸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