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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함께 즐겨요, 배리어프리!

언론 시사회를 통해 남들보다 2~3주 일찍 개봉영화를 볼 수 있는 기자로 지내다보니, 사람들이 많이들 물어봅니다. “그 영화 어때? 볼만 해?” 각종 스포츠와 게임, 케이블TV의 자극적인 프로들이 밀물처럼 밀려들어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이 복잡 다양한 세상에서도 굳건히, 그리고 여전히, 최고의 오락물은 극장영화 아닌가 싶습니다. 영화는 정말... 모두의 공통 관심사입니다.

제가 몸담고 있는 방송사만 보더라도, 아침 뉴스와 교양 프로에서도 시도 때도 없이 새로 나온 영화를 화제 삼고, 아예 영화 전문 프로그램도 따로 있습니다. 소개팅 나가선 좋아하는 영화로 상대방의 취향을 짚어보고, 영화 속 좋았던 대사들은 기억해 두었다가 데이트할 때 우려먹고... 우리 일상에서 영화가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큰지, 다들 더 말하지 않아도 잘 아실 겁니다.

영화가 이렇게나 중요한 세상에 살고 있으면서, 돈이 있고 시간이 있어도, 개봉영화를 제때 즐기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시청각 장애인들입니다. 장애인들이 겪는 불편이 한두가지가 아닌데 영화 못 보는 게 뭐 그리 대수라고 생각하실까 봐 앞서 길~게 설명했습니다. 주말에 영화 소개 프로그램에서 찔끔찔끔 예고편만 보여줘도 얼마나 흥미가 생기고 보고 싶어집니까. 하물며 개봉영화가 매주 6~7편씩 되는 우리나라에서 화제작들을 직접 보지 못한다면, 그것이 장애인에게 어떤 소외감을 느끼게 할지 가늠이 되십니까? 저 같은 사람은 답답하고 속상해서 환장할 것 같은데요.

그런데, 방법이 없는 게 아닙니다. 시청각 장애인도 비장애인과 똑같은 시기에 거의 비슷한 수준까지 영화를 즐길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바로 ‘배리어프리’ 영화입니다.

배리어프리(Barrier-Free) 영화란 청각 장애인을 위한 한국어 자막과, 시각 장애인을 위한 음성 해설을 함께 넣은 영화입니다. 비장애인도 외화를 볼 때엔 성우가 입모양에 맞춰 우리말로 더빙을 하거나 한글 자막이 나오듯이, 배리어프리는 국내 영화에도 한글 자막과 음성 해설을 넣는 겁니다.

지금껏 시청각 장애인들이 영화를 보는 방법은 극히 제한돼 있었습니다. 청각 장애인의 경우엔 그래도 상황이 나은 편이었습니다. 대사를 자막으로 표현하는 것이야 어려운 일이 아니니까요. 하지만 대사 외에도 음악이라든지 바람이 부는 소리, 부엌에서 냄비가 덜그럭거리는 소리 같은 것이 영화의 내용을 이해하는데 필요할 때가 많은데, 그런 세심한 부분들을 놓치면서 봤으니 제대로 즐겼다고 보기 힘들죠.

                  

시각 장애인들은 더욱 심각합니다. 앞이 보이질 않으니 영화를 보는 게 아니라 들어야 할텐데요, 영화를 '듣는' 방법이라곤 성우가 상영관에서 함께 화면을 보며 동시 설명하는 방식 뿐이었습니다. 그마저도 단체 관람할 만한 규모의 시각 장애인들이 모여야 가능한 일이었으니 자주 있는 일도 아니었고요. “대사가 우리말로 되어 있으면 음성 해설을 따로 할 필요 없지 않나?”라고 생각하시겠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배우가 말이 아닌 행동을 했을 때는 시각 장애인들이 알 길이  없잖아요. 게다가 비언어적인 방식으로 표현되는 것들, 이를 테면 주인공이 노을 지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고 치면, 감독이 그 장면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가 있을 텐데, 그건 대사가 아니니까 시각 장애인이 알 길이 없죠. 그래서 음성 해설을 넣는 겁니다. 이런 식으로 들어가겠죠, “대교 위에서 노을 지는 한강을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철수. 바람이 철수의 머리카락을 헤집어 놓고,  8차선 대로에선 씽씽 차들이 속도를 내며 달리고 있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훌륭하고 좋은 의도의 배리어프리 영화가 우리나라에선 여태 나오지 않았던 걸까요? 배리어프리를 만들기 위해선 추가 자막 작업과 음성 해설 녹음을 위해 약 2천만 원이 필요합니다. 제작비 절감을 위해 전쟁을 치루는 제작사 입장에선 부담스러운 액수죠. 개봉일을 정해두고 빠듯하게 진행해 겨우 제작을 완료하는 국내 영화업계 관행도 이윱니다. 최소 1~2개월이 필요한 배리어프리 버전 작업을 위해 개봉일을 미룰 수도 없고, 제작사 입장에선 '그 시간이라면 비장애인들에게 공개되는 일반 버전 편집에 더 공들이는 게 남는 장사'라고 생각할 테니까요. 이유는 역시나 '돈'과 '시간' 때문입니다.

그래도 점차 배리어프리 영화의 필요성에 대한 인식이 확장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에선 지난 해 10월 '배리어프리영화 설립 추진위원회'가 발족된 이후 '블라인드', '마당으로 나온 암탉' 등의 영화들이 배리어프리 버전으로 만들어졌습니다. 배리어프리 영화의 가장 큰 미덕이 '장애인들도 개봉영화를 동시에 보는 것'이라는 점에서, 앞선 영화들은 일반 버전이 개봉한 지 수개월 이후 만들어져 살짝 아쉽긴 했습니다.

이번 달 개봉한 두 편의 영화 '달팽이의 별'과 '마이백페이지'는 국내 최초로 배리어프리버전이 일반버전과 동시에 개봉했습니다. 반가운 일이죠. 제작사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한 여러 영화인들의 자발적인 재능 기부 참여가 큰 원동력이 됐습니다. 한효주,김동욱 같은 익숙한 이름의 배우부터 가수이자 DJ 김창완 씨의 이름도 눈에 띄네요.

미국을 비롯한 유럽권 국가에선 이미 배리어프리 영화가 꽤 정착돼 있다고 합니다. '안 해도 그만'이라고, '좋은 뜻은 알겠으나 번거롭다'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배리어프리 영화가 얼마나 많은 시청각 장애인들에게 문화적인 소외감을 '덜' 느끼게 할지 생각해 본다면, 영화업계 종사자의 자발적인 노력에만 기댈 것이 아니라 지자체와 정부의 실질적인 지원책이 마련되는 게 필요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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