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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러운 '품격'의 부재

성추행 경무관 사건

이웃나라 일본에서는 매년 '유행어 대상'을 선정합니다. 1년동안 생겨나 유행한 말 가운데 세태를 정확하게 포착하거나 대중의 광범위한 지지를 받은 말을 선정해 수상하고, 그 말을 태어나게 한 사람이나 단체를 기념하기 위한 것입니다.

현대 일본 사회의 폐부를 깊숙이 찌른 '품격'

2006년 일본의 10대 유행어 가운데 '품격(品格, ひんかく)라는 말이 있습니다. 수학자인 후지하라 마사히코의 저서 '국가의 품격'이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유행한 이 말은, 비록 기발하거나 재미있는 말은 분명 아니지만 실용에만 함몰된 나머지 다른 가치는 무참하게 뭉개버리며 나아가는 현대 일본사회의 폐부를 깊숙이 찌른 '정문일침'으로 평가받았습니다. 주변국의 입장에서 보기에 다소 '국수주의적 회귀'로 해석될 여지가 있어 꼭 반갑지만은 않은 베스트셀러와 유행어였지만, 아무튼 이후 '품격'이라는 단어는 책 제목에서 다룬 '국가'를 벗어나 일본사회 전방위로 확산되면서 다양한 각도로 주목받았습니다. (비정규직 문제를 다소 코믹하게 다룬 트렌디 드라마의 제목에  '품격'이라는 단어가 들어가기도 했습니다.)

최근 이 '품격'이라는 단어를 다시 한 번 떠올리게하는 사건이 경찰 내부에서 있었습니다. 바로 청와대에 파견된 경찰관리관이 경호행사를 마친 뒤풀이 자리에서 여성 경호원을 성추행해 물의를 빚은 사건입니다. 청와대 파견 경찰관리관의 계급은 '경무관'. 군으로 치면 '별', 즉 장성급에 해당하는 고위직입니다.

(경무관 - 흔히 '경찰의 꽃'이라고 불리우며 일선경찰서의 서장을 맡는 계급인 '총경'보다 한 계단이 더 높고, 지방경찰청의 청장 계급인 '치안감'보다는 한 계급 아래입니다. 경찰에 입직하는 계기는 순경 공채부터 경찰대 졸업이나 고등고시 특채까지 다양하지만 그 가운데 경무관의 직위에까지 오르는 사람은 절대인원으로 보면 상당히 적은 수입니다.)

징계에 앞서 '일단 내려가 있어라'?

사건 직후 경호실에서 강력하게 문제를 제기하자 경찰은 해당 경무관을 직위해제하고 원 소속처인 서울지방경찰청으로 '원복'시켰습니다. 직위해제된 경무관은 마땅한 보직이 없는 이른바 '무임소' 간부로 지내오다가 지난 주 뜬금없이 대구지방경찰청 차장으로 전보발령됐습니다. 성추행으로 물의를 빚은 간부가 한 광역시의 치안을 담당하는 두 번째로 높은 경찰이 된 것입니다. 해당 경무관에 대해서는 행정안전부 중앙인사위원회(징계위원회)가 소집돼 구체적인 징계수위를 결정할 예정인데, 경찰은 징계조치에 앞서 '일단 내려가 있어'라는 식으로 지방청 차장 인사를 단행했습니다. 당연히 대구에서는 시민단체를 중심으로 경찰의 '생각없는' 처사에 반발하는 움직임이 일었습니다. 

문제는 앞서 설명한 인사조치에 대한 경찰의 해명입니다. 제가 통화한 경찰 간부는 '징계조치가 꼭 인사조치에 선행할 필요는 없다'는 식으로 말끝을 흐렸습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어차피 징계를 받을 게 확실해 보이는 상황에서 무리하게 인사조치를 하는 것은 밖에서 보기에 '제 식구 감싸기'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고 지적하자 중앙인사위원회의 소집과 징계 결정까지 기다리기에는 시간이 석 달 이상 걸리는 경우가 다반사고, 그때까지 무임소 경무관으로 서울에 붙잡아 두는 것이 오히려 모양새가 나쁘다는 뉘앙스의 답변을 해 왔습니다. 이미 망가질대로 망가진 모양새를 어떻게든 티안내고 바로잡으려는 '꼼수'가 다 들여다 보였습니다.

그가 '품격'을 모르진 않았겠지만..

각계에서 따가운 지적이 이어지자 해당 경무관은 어제(23일) 경찰에 사표를 제출했습니다. 조직이 어떻게든 보호해 줄 거라고 믿었는지, 아니면 뭔가 억울하다고 생각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찌됐든 경찰 전체의 사기를 위해서라도 진작 냈어야 할 사표라는 느낌입니다.

마침 물의를 일으킨 경무관은 '품격'이라는 단어가 유행하고 있던 그때, 일본에 현지 주재관으로 근무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일본사회에 몰아친 '품격' 바람을 전혀 모르지는 않았을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품격을 지키지 못하고 시쳇말로 '옷을 벗게' 된 모양새가 끝까지 좋지 못합니다. 촛불 유모차 엄마들에 대한 수사도 '과잉충성' 논란을 빚고 있고, 불교계와는 여전히 화해하지 못하고 있는 경찰. 지금이야말로 '품격'이라는 말을 곰곰히 음미해야 할 시점입니다.

  [편집자주] IT분야에 전문성이 느껴지는 유성재 기자는 2001년 SBS에 입사해 정보통신부 출입기자와 인터넷뉴스팀 기자로 다년간 활동했습니다. 지금은 사회2부 경찰기자팀의 부팀장격인 '바이스캡'으로 활약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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