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에는 미국 영화의 아류랄까, 그런 영화를 많이 찍었습니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되겠다는 각성을 했고, 미국 영화의 속도나 미국 문화를 담고 있는 영화로부터 벗어나 한국인의 정서로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임권택(74) 감독은 7일 오후 서울 충무로 대한극장에서 영화 '족보'(1978) 상영에 앞서 관객에게 30년 전 이 영화를 만들게 된 배경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족보'는 1940년대 일본인 관리 다니(하명중)가 상부의 명령으로 창씨개명을 설득하기 위해 설씨 가문을 찾았다가 종손 진영(주선태)과 딸 옥순(한혜숙)의 자부심에 오히려 동화되는 과정을 그린다.
이 영화는 제2회 서울충무로국제영화제(CHIFFS)에서 8로 끝나는 해에 만들어진 한국영화를 소개하는 '한국영화 추억전 #8' 부문에 초청돼 상영되고 있다.
이날 무대인사에 나선 임 감독은 "오래 전 영화라 몇 분이나 올까 싶었는데 예상과 달리 굉장히 많이 오셨다"는 소감으로 말문을 열었다.
임 감독은 이어 창씨개명을 소재로 택한 데 대해 "일제 강점기에 초등학교를 다녔다"며 "당시 일본 성으로 바꾸지 않으면 안 되게끔 몰아가는 상황을 실제로 경험했다"고 소개했다.
그는 "우리 문학 작품에서 창씨개명을 정면으로 다룬 작품이 없었다"며 "언젠가는 소재로 다뤘으면 했는데 서울에서 총독부 관리의 아들로 태어나 소년 시절을 보낸 일본인 작가 가지야마 도시유키가 쓴 작품이 나와 이를 바탕으로 영화를 만들게 됐다"고 말했다.
임 감독은 "우리가 창씨개명 문제를 들고나오면 일본에는 '한국인이 원해서 한 것'이라고 망언하는 사람들이 많다"며 "일본인이 쓴 작품이라 더 좋다는 생각을 했다"고 덧붙였다.
임 감독은 또 "1960년대의 미국 영화의 속도, 문화를 담은 영화에서 벗어나서 한국인의 정서, 동양인의 유장한 속도를 가진 영화를 만들려 했다"며 "몇 년 간 노력했는데 '족보'에서 그런 노력이 제자리를 잡았다"고 강조했다.
1962년 '잘 있거라 두만강아'로 감독으로 데뷔한 임 감독은 1970년대 '잡초', '왕십리' 등으로 본격적인 작가주의 정신을 살리기 시작했으며 1980년대 이후 인본주의적 작품 세계를 널리 인정받았다.
(서울=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