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92년 영국은 유럽의 단일통화체계를 만들기 전 과도단계인 'ERM'에 참여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ERM은 단일 통화를 만들기 전에 일종의 과도기성 고정환율성격의 시스템으로 예를들어 영국 파운드를 교환하는 비율을 정해놓은 것입니다. 당시 시장에서는 영국이 이 제도에 참여할 지 말 지에 대해 관심이었고, 일부 전문가들은 영국이 서둘러 선언할 필요없이 애매한 입장을 취하는 것이 낫다는 의견을 피력했지만 영국은 공개적으로 참여를 선언하면서 "탈퇴하지 않겠다"고 못을 박았습니다.
그러자 조지 소로스을 중심으로 한 투기 세력이 영국 파운드화에 대한 공격에 나섰습니다. 영국 중앙은행은 투기세력의 공격에 대해 걱정이 없다고 큰 소리쳤지만 결국 버티지 못한 채 소로스에 항복을 했고 유럽단일통화체계에서 탈퇴했습니다. 이 사건 이후 금융이 어느 정도 발달한 선진국에서는 당국이나 중앙은행이 '공개적'으로 자신들의 '패'를 공개한 뒤 외환시장에 개입하는 '어리석은' 행동은 하지 않게 됐죠.
그런데 그 '어리석은' 행동을 지금 우리 경제팀이 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올 초부터 '2008년 최대화두는 물가급등'(2월 취재파일 참조)이라고 웬만한 경제전문가들은 이야기하고 있을 때 물가를 끌어올리는 부작용을 가진 '고환율' 정책을 추진해 900원 중반대 원.달러 환율을 무려 천백원대까지 끌어올렸던 강만수 기획재정부 장관이주도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정반대 방향인 '저환율' 정책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고유가, 고원자재 여건에서 고환율이 부담을 키우고 있고 이를 해결할 수 있는 효과적이고 직접적인 방법은 원화가치를 높이는 것이라는 지적은 지난 달 취재파일 '고유가가 거품이 아니라면'에서 한 바 있기는 합니다. 하지만 조용히 미세조정을 통해 해야지 이렇게 공개적인 방법을 쓸 경우 득보다는 실이 훨씬 클 수 밖에 없습니다.
첫째,국제환투기세력은 '입장이 명확한' 나라의 통화를 주요 타겟으로 삼습니다. 금융선진국들도 눈에 띄지 않게 외환시장에 개입하며 미세조정을 하고는 있지만 자국 통화의 가치가 오르는 것이 좋은 지 내리는 것이 좋은 지를 공개적으로 밝히지 않으며 애매모호한 입장을 취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처럼 원.달러 환율을 낮추는데 "외환보유고까지 동원할 수 있다"고 중앙은행과 정부가 국제시장에 '패'를 공개하는 순간 '타겟'의 우선순위가 됩니다.
둘째, 지금 우리 환율을 둘러싼 여건은 150달러를 육박하고 있는 국제유가와 조선업 호황 등 원.달러 환율을 오르게 할 요인들은 넘쳐나는데 비해 환율을 낮출 수 있는 요인은 없는 상황이기때문에 자치 소중한 외환보유고만 날릴 가능성이 높습니다. 당국의 적극 개입 발언이후 외환보유고 수십억 달러를 투자하며 원.달러 환율을 한때 천원 밑까지 하락시키기도 했지만 앞서 설명한 여건을 고려하면 외부요인이 조금만 바뀌어도 '반발력'에 따른 상승으로 원래 수준보다 오히려 원.달러 환율이 높아질 수 있습니다. 이럴경우 환율 방어를 위해 쓴 외환보유고만 허공에 날린 셈이 되는 거죠.
셋째, 우리 외환보유고 상황이 그렇게 넉넉하다고 볼 수 없다는 점에서 자칫 제 2의 외환위기 위험을 높일 수 있습니다. 당국은 2천억 달러가 넘는 세계 5위의 외환보유고 규모를 자신하고 있지만 1년 미만 단기외채, 즉 1년 안에 달러로 갚아야하는 빚,이 외환보유고의 70% 가까이 차지하고 있는 상황에서 실제 가용할 수 있는 규모는 수백억 달러라고 봐야합니다. 타겟이 정해지면 천문학적인 규모로 공격할 수 있는 투기세력에 맞서기에는 쓸 실탄이 그리 많지 않다는 말입니다. 외환보유고와 비교적 건전하다는 외채 성격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경제지표들이 '외환위기 이후 최대' 를 기록하고 있는 지금 외환보유고를 줄일 수 있는 정책은 더욱 아니라고 봅니다.
무엇보다 강만수 경제팀이 환율에 적극 개입하는 의도 자체가 순수하지 않습니다. 당국의 적극 개입 발표가 강 장관을 유임시킨 뒤 차관을 자르고 단지 장관 3명을 교체하는데 그친 소폭 개각 발표일이라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강 장관은 지난 1997년 외환 위기때도 그랬지만 정부가 환율을 움직여 시장을 이길 수 있고, 성장이나 물가 안정 같은 특정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고 강하게 믿고 있습니다. 시장에서는 '시대착오적 판단' 이라고 규정하고 있는데 단지 믿는데 그치지 않고 이를 실천한다는데 더 큰 문제가 있습니다. 거시경제정책상 정부가 경기부양이나 물가안정을 위해 쓰는 수단은 국채 발행이나 추경예산 같은 정책이지만 이는 국회의 동의를 받아야 하고 금리를 결정하는 것은 중앙은행의 동의를 얻어야하는 상황에서 상대적으로 환율은 정부 독자적으로 시행할 수 있다는 편의성도 있죠.
강만수 경제팀의 갑작스런 180도 정책 변화에 주식시장,외환시장 등이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미 시장의 신뢰를 잃은 강만수 경제팀에 대한 불신도 커지고 있습니다. 외국투자은행과 신용평가회사에서는 물가가 문제라면 금리를 올리는 것이 정공법인데 금리는 11개월째 동결하면서 외환시장에 적극 개입하겠다는 정책의 비일관성을 납득하지 못하는 평가를 내놓고 있습니다.
단기적으로 환율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성과가 있다고 믿는 건 큰 오산입니다. 재정부 장관을 맡은 뒤 '고환율' 정책으로 환율이 올라 수출기업들이 덕을 좀 보고, 해외여행객이 조금 줄 자 강 장관이 "여행수지 적자를 줄이는데 기여했다"고 자평하다 물가급등이라는 후폭풍에 호되게 고생하며 정반대의 정책을 쓰고 있다는 현실을 돌이켜 볼 필요가 있습니다.
유가 급등세는 약간 주춤하고 있고 일본,중국,대만 같은 아시아 증시가 오르는 날에도 우리 증시만 연일 연중 최저치를 경신하고 있는 배경에 바로 '강만수 효과'가 있다는 시장의 분석을 "그렇지 않다"고 묵살하다가는 더 큰 후폭풍을 만나게 될 것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강 장관을 유임시켰을 뿐인데 그 대가로 갑자기 외환위기 걱정을 크게 해야 하는 우리 상황이 안타까울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