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백억대 자산가를 80일간 납치해서 100억원을 뜯어 낸 납치사건의 주범 김 모 씨가 지난 5월 15일 필리핀으로 출국했습니다. 12일 시작된 경찰수사를 눈치챘던 거죠. 경찰은 이날 김 씨에 대한 출국금지를 검토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보도가 나간 후 김 씨는 필리핀 마닐라의 한 호텔에서 필리핀 MBI(우리로 치면 국정원 정도 되는 기관)에 검거됐습니다. 체포 직후 김 씨는 곧바로 필리핀 이민국으로 넘겨졌죠. 그리고 이 날 전 언론에는 '수백억대 자산가 필리핀서 검거'라는 제목의 기사가 나갔습니다.
주범이 잡혔으니, 신병만 넘겨받으면 사건이 금방 정리되겠구나 싶었습니다. 여담 한 마디 하자면 김 씨가 검거된 직후 현지 연락통에게서 전화를 받고 8시뉴스에 김 씨가 검거됐다는 단독기사를 준비하고 있었는데요. 우리 경찰에게 사실 여부를 최종 확인하는 과정에서.. 화들짝 놀란 경찰이 모든 언론사에 내용을 바로 풀을 해버렸죠. 뭐.. 보는사람 입장에서는 '그러든지 말든지'겠지만, 뉴스를 만드는 저희들 입장에선 제법 안타까운 일이랍니다.
각설하고요, 끝난 줄 알았던 사건이 다시 꿈틀대기 시작한 건 보도가 나간 그 날 밤부터 였습니다. 김 씨가 필리핀 이민국에서 풀려났다는 황당한 소식을 접했기 때문이죠.
인터폴 적색수배(red notice)자인 김씨가 어떻게 풀려난 걸까?
필리핀 현지 경찰은 김씨의 신병을 확보한 뒤 "김 씨가 현지 법령을 위반한 것이 없다"면서 여권을 압수한 후 김 씨를 석방했습니다. 김 씨는 여권이 없기 때문에 필리핀 출국은 어렵지만 현재로서는 필리핀 안을 돌아다니는 것에 대해서 달리 제재할 방법이 없습니다. 우리 경찰은 김 씨가 필리핀으로 출국한 사실을 확인하고 바로 인터폴에 김 씨에 대해 '적색수배'를 신청했습니다. 인터폴 수배 유형에는 모두 5종류가 있는데요.
- 적색수배(사전영장 발부자)
- 청색수배(소재파악)
- 녹색수배(우범자의 범죄 사전 예방)
- 황색수배(실종자 및 가출인)
- 흑색수배(변사자 신원확인)
적색수배는 구속 또는 체포영장이 발부된 사람 중 살인,강도,강간 등 강력사범이나 50억 이상 경제사범이 대상입니다. 각국 경찰은 해당자를 수배해서 추방하거나 수배 요청국에 정보 제공하게 되죠. 인터폴은 국제조약이 아닌 임의기구여서 범죄인이 체류하는 나라에서 강제수사권이 있거나 체포권을 행사할 수는 없는데, 물론 나라마다 상황이 다르긴 합니다. 유럽이나 남미에서는 인터폴 적색수배가 '체포영장'과 동일한 효력을 지닙니다.
그래서 적색수배 통보를 하면, 현지 경찰이 범죄인을 직접 체포해서 송환하죠. 송환은 보통 해당국 비행기까지 인도를 하면, 비행기부터는 상대국 경찰이 데려가는 식으로 진행됩니다. 하지만 유럽과 남미를 제외한 다른 나라들은(우리나라도 마찬가지고요) 해당 범죄인의 출입국 기록과 소재지 정도를 확인해 주는 정돕니다. 조금 있다가 설명하겠지만, 그래서 인터폴은 범죄인 인도조약 만큼 효과가 없죠.
<인터폴 송환> 말고는 방법이 없었나?
도피사범 송환 절차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인터폴을 통한 송환>과 <범죄인 인도협약에 따른 송환>이 그것인데요.
@ 인터폴을 통한 송환은, 도피대상국 인터폴에 소재 확인 및 공조 수사를 의뢰하면 해당국에서 강제퇴거 명령을 내려 집행한 뒤 국내로 송환하는 방법입니다. 하지만 설명 드린대로, 인터폴이 강제성이 없으니 해당국에서 퇴거명령을 내리지 않으면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김 씨 사건의 경우도 이 경우에 해당되는 거고요. 그렇다면 '경찰은 도대체 무슨 이유로 강제성이 없는 이 방법을 택한 걸까?' 하는 의문이 생기겠죠. 이유는.. 범죄인 인도협약이 갖는 맹점 때문입니다.
@ 범죄인 인도협약에 따른 송환은, 양국 정부간에 상당히 복잡한 과정을 거쳐 이루어 집니다. (경찰-검찰-판결받고 법무부-외교부)-(외교부-법무부-검찰-경찰) 순인데 이 과정에서 생기는 수 많은 수사 자료들을 모두 번역해야 합니다. 범죄인 한 명을 데려오기 위해 이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 하는 건데, 여기에 들어가는 시간과 비용 등을 고려하면..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봐야합니다. 법원 판결이 나오기 전까지는 '무죄추정의 원칙'에 따라 범죄인을 어떻게 할 방법이 없으니까요.
그렇다고 우리 경찰이 범죄인을 상대국에서 체포하게 되면 상대방 나라의 주권을 침해하는 일이 되기 때문에 이럴 경우 외교적으로 문제가 생깁니다. 그렇다고 경찰 아닌 일반인이 범죄인을 잡으면 오히려 그 사람이 체포,감금죄로 처벌을 받고요. 혐의가 뚜렷한 김 씨 같은 경우라 하더라도 필리핀 정부의 범죄인 인도 재판 결과까지 보는데 (그것도 김 씨가 도주하지 않고 성실히 재판을 받아야만) 몇 년이 걸릴지 알 수가 없죠. 김 씨 사건에 대한 외교부 영사국 관계자의 말입니다.
- 필리핀 이민국이 그 양반 돌려보냈다던데?
= 사실상 풀어준거다. 특히 필리핀의 경우 이런 사례가 종종 발생한다. 다른 나라의 범죄자 관련 협조 요청이 있어도 자국법을 우선시 하는 분위기다. 필리핀의 경우 한국 수사당국의 협조 요청이 들어가면 필리핀 이민국장이 심사한 뒤 "미션 오더"를 내줘야 하는데, 이민법상 위반사항(여권위조, 체류기간 만료 등)이 없으면 잘 안내주는 경우가 많다. 필리핀의 경우 무비자로 90일까지 체류 가능하다. 따라서 이번 케이스에도 이 사람이 현지에서 90일 이상 체류하다가 필리핀 이민국에 걸리거나 하지 않으면 사실상 본국 송환이 어렵다고 봐야 한다. 때문에 요즘 필리핀으로 튀는 범죄자들이 많다. 범죄인 인도의 경우 현지 영사국이나 외교부 차원에서는 조치를 취할 수 있는 근거나 절차가 없다.
다른 방법은 없을까?
현재 경찰은 필리핀 이민국이 김씨를 '부적절한 외국인'으로 결정해 강제추방할 수 있도록 현지 주재관 통해 압박을 넣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필리핀 이민국은 "한국 경찰과 정부의 입장을 이해하고 협조해 주겠다"는 답을 했고요. 하지만 이 부적절한 외국인 심사 자체에만 1-2개월의 시간이 걸린다고 하는군요.
현지 소식통에 따르면, 피해자에게서 거액을 뜯어낸 있는 김 씨는 이런저런 루트를 통해 필리핀 관계자들에게 뒷돈을 쓰고 있다고 합니다. 위조여권을 만들어서 제3국으로 도피하려고 시도하는 건 물론이고요. 심지어는 필리핀 이민국에서 음성적인 채널을 통해 "(우리 돈으로) 1억 2천만 원 정도를 주면 여권을 돌려주겠다"는 제의를 해 온다고 하니 필리핀 정부도 경찰도 얼마나 후진적인지를 엿볼 수 있겠죠.
김 씨는 필리핀 MBI에 임의동행되던 당시부터 현지 변호인을 선임했고 이 변호인은 이민국 심사에도 참석해서 공방을 벌일 예정입니다. 범죄를 저지른 사람은 느긋하고, 오히려 경찰이 발을 구르는 웃지 못할 상황이 된 겁니다. 관계자들의 의견을 한 번 들어 볼까요?
@ 황철규 전 법무부 국제형사과장
현재로선 범죄인 인도조약에 따르는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이민법 위반(체류기한 위반, 밀입국 등)을 적용해 강제 추방시키는 방안이 있지만 위반 사항이 없다면, 국내에서 범죄혐의가 있다는 것만으로는 추방 결정이 안나올 수 있다.
@ 전성원 검사 (전 법무부 국제형사과 범죄인인도 담당)
통상 경찰이 요청하면 강제추방 해주는데, 강제추방 결정은 필리핀 이민국 자유 재량에 달려있다. 거기서 김 씨의 체류 자격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해 추방하면 다행이지만 아니라면 시간이 걸려도 범죄인 인도조약에 따르는 수 밖에 없다. 다만, 이민국이 아직 김 씨 여권을 갖고 있고, 조사가 더 진행될 상황이라고 한다면 최종 결정이 안 난 상태일 수 있으니 나중에 강제추방 결정이 나올 수도 있다.
@ 박종록 변호사
범죄인 인도협약은 보통 법무부-법무부 간에 이뤄지는데 이는 100% 상대국의 판단에 따를 수밖에 없다. 고소.고발 사건 등 자잘한 내용이 아니면 공조 요청을 해서 데려오는 경우도 많다. 케이스마다 다르지만 강력사건은.. 신문에 날 정도면 뭐 충분하지 않을까 싶은데. 하지만 상대국에서 범죄인에게 뒷 돈을 받고 풀어준다 하더라도 강제하거나, 이의제기를 할 수는 없기 때문에 외교적으로 설득하는 수밖에 없다고 봐야. 이 방법은 사안에 따라 걸리는 시간이 다르지만.. 보통 오래 걸린다고 보면 된다.
@ 박창식 필리핀 주재관
우리 판사나 검사는, "판사가 판결하기 전까지는 범죄인이 아닌 일반인이다. 범죄인 인도청구에 의해서만 하고, 너희가(경찰이) 맘대로 움직이지 말라"고 얘기하는데, 범죄인 인도협약은 보통 3-4년, 10년이 걸려도 안되는 경우가 있다. 따라서 범죄인 인도협약은 실효성이 없다고 봐야한다. 국민들이 잘 몰라서 그렇지.. 사법만능주의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범죄인 인도협약의 맹점을 좀 알려줄 필요가 있다.
공수표 날렸다가 머쓱해진 경찰
공교롭게도 일이 터지기 바로 전인 21일, 경찰청 외사수사과에서는 <민생경제침해 중요 도피사범 송환활동 적극 추진>이란 보도자료를 냈습니다. 세계 186개 인터폴 회원국과 적극 협조해 해외도피 경제사범 송환 활동을 적극 강화할 계획이라면서 피해액수별, 국가별 도피사범 통계를 내보냈죠. 전체 도피사범 647명 가운데 미국이 283명, 중국 88명에 이어 필리핀은 51명으로 3위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경찰은 "그동안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 등과 인터폴 실무회의를 개최해 왔는데 올해 8월 베트남과 처음으로 실무회의를 개최하게 되어 보도자료를 낸 거다"라고 설명했지만, 사실은 이틀 전인 19일, 경찰청 출입 기자단과 외사국과의의 점심식사 자리에서 "요즘 외사국 일이 너무 없어서 뭐하시는지 모르겠다"는 농 아닌 농에 부랴부랴 보도자료를 만들어 배포한 것이라고 하는군요. 보도자료를 낸 지 며칠만에 이번 사건이 터지고 일부 언론에서 경찰 '안일 대응'이란 주제의 기사가 나오자 경찰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신세가 된 거죠.
......
어쨌든 경찰이든 검찰이든 간에.. 혐의점을 잡고 수사를 시작하면 서둘러 출금부터 시키는 이유가 있었군요. 솔직히 지금껏 범죄인 일당이 해외로 도피한 경우는 많이 봤지만 범죄인 송환이 이런 식으로 처리되는지는 몰랐는데요. 눈 앞에서 용의자를 놓아줘야 하는 경찰 속이 얼마나 쓰릴까요. 범인 못 잡는다고 경찰만 욕 할 일은 아닌 듯 하죠? 이번 사건을 경찰이 어떻게 마무리 하는지 한 번 지켜보자구요. ^^
궁금증이 좀 풀리셨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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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겸손과 존중'이 취재의 좌우명이라는 김요한 기자는 2006년 SBS 보도국에 입사해 사회2부 사건팀에서 활약 중입니다. 섬세하고 끈질긴 취재력과 함께 수준급 실력의 '드럼' 연주까지 보도국의 팔방미인으로 꼽힙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