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S 사건팀에서 제가 맡고 있는 라인은 강남라인입니다. 강남, 서초, 송파, 수서, 강동 경찰서 관할 지역, 그러니까 서울 강남권 전체에서 일어나는 사건 사고가 제 담당인 셈이죠. 원래 이 강남 라인은 사건 사고가 많기로 유명했습니다. 90년대 중반 지존파 사건이나 부모를 죽인 패륜아 박한상 사건, 삼풍 백화점 붕괴, 성수대교 붕괴 사고가 모두 이 강남라인에서 일어났죠.
그런데 사실 요즘은 대형 강력 사건이나 큰 사고가 좀 뜸한 편입니다. 특히 강력사건은 예전보다 많이 줄어드는 추세인데요, 제 나름의 분석으론 '치안의 양극화'가 한 몫하고 있는 게 아닌가합니다. 부유한 사회일수록 안전도도 따라서 높아지는 현상인데, 치안의 양극화에 대해선 나중에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여하튼, 강남라인에 사건다운 사건이 뜸해지면서 출입기자들도 불안해하던 상황에서 일이 터졌습니다.
토요일 오전 11시쯤 서울 청담동 패밀리마트 앞에선 어이없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한 현금지급기 업체 직원 2명이 편의점 내에 설치된 지급기에 돈을 채워넣는 사이 현금 수송차량 운전사였던 허 씨가 홀연히 차를 몰고 사라진 겁니다.
이 업체는 서울 전체 90곳의 지급기를 5개 권역으로 나눠 운영하고 있는데, 허 씨가 속한 조가 맡은 곳은 강남권 18곳이었습니다. 청담동 편의점은 당일 3번째 방문지였고, 때문에 돈 주머니엔 2억 6천만 원이 넘는 돈이 그득했습니다. 작업 초반 도망간 이유가 따로 있던 거죠.
허 씨는 지난 6일 이 업체에, 정확히 말하면 현금지급기 업체의 용역업체에 입사했습니다. 입사 열 흘 만에 뒤통수를 친 셈인데, 이 쯤되면 범행을 계획한 뒤 입사했다고 보는 게 맞겠죠.
돈을 훔친 허 씨는 당일 훔친 차를 삼성동 한 아파트 앞에 곱게 주차해두고, 돈보따리를 들고 양재동 중고차 매매상으로 갔습니다. 그리곤 BMW 335i를 7천만 원을 주고 샀습니다. 허 씨는 인터넷 자동차 관련 사이트에도 여럿 가입돼 있는 등 자동차 마니아라고 합니다. 역삼동 원룸에 거주하는데 그랜저와 프린스 2대를 갖고 있었을 정도니까요.
경찰 수사 상황이 속속 언론을 통해 보도되자, 허 씨는 경찰과 숨바꼭질을 벌입니다. BMW를 샀다는 보도가 나오자 차를 정릉 부근에 버려두고 열쇠는 택시기사를 통해 이혼한 전처에게 맡겼습니다. 그리고 같은 택시를 이용해 자신이 고교와 대학을 나온 부산으로 향합니다.
허 씨는 도주 과정에서 경찰 검문을 맞닥뜨리지만 경찰을 보기좋게 농락합니다. 경찰은 19일 밤 허 씨가 택시기사의 휴대폰으로 내연녀와 통화한 사실을 파악하고, 택시기사에게 문자를 보냅니다. "가까운 휴게소에 들르면 연락달라"는 거였죠. 이 문자를 본 허 씨, 분위기 파악하고 작전에 돌입합니다. 기사에게 "내가 사기 혐의로 수배가 돼 있는데, 부산에 해결하러 간다. 부산에서 누군가 만나 해결만 하면 혐의가 풀리니 트렁크에 잠시 숨겨달라"고 요청한 겁니다. 순진한 택시기사는 허 씨가 착해보여 곧이 곧대로 부탁을 들어줬고 허 씨는 트렁크에 숨은 채 경찰 검문을 따돌릴 수 있었습니다.
서울 경찰이 부산 경찰에 "서울 번호판의 택시가 부산으로 잠입하고 있다"고 알려줬는데도, 택시 기사의 말만 믿고 트렁크도 열어보지 않아 용의자를 눈 앞에서 놓친겁니다.
택시기사는 현금으로 38만 원을 받았다고 합니다. 보통 부산까지 왕복하면 35만 원대를 준다고 하니, 딱 택시요금만 받고 자기는 범인도피 혐의로 입건되는 불쌍한 신세가 된겁니다.
허 씨는 부산에 잠입한 뒤 오늘 오전까지 오리무중입니다. 경찰이 19일 저녁 방송을 통해 공개수배를 한 만큼 제보가 잇따를 것으로 보이는데 오늘 오전까지는 별다른 진전이 없다고 하네요.
경찰은 허 씨를 두고 굉장히 자존심 상해하는 분위깁니다. BMW 보도만 나가지 않았다면 금세 잡을 수 있었을거라고 목소리를 높이기도 하고요. 하지만 기자들 때문에 다잡은 용의자 놓쳤다는 경찰의 푸념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닙니다. 어떤 큰 사건이든 그런 과정을 거쳐왔고, 그런 와중에도 결국은 범인을 잡아낸 게 경찰 아닙니까.
사실, 이번 사건 용의자가 돈에만 욕심이 있던 것은 그나마 다행이란 생각입니다. 돈을 훔치는 과정에서 다른 폭력이 행사됐거나 살인, 강도로 이어지지 않았으니까요. 경찰은 지금도 허 씨의 행적을 좇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이 글을 읽고 있는 순간에는 허 씨가 이미 검거된 뒤이길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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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2002년 기자 생활을 시작한 조성현 기자는 지난해 SBS로 둥지를 옮겨 사회2부 사건팀에서 활약 중입니다. "취재는 냉철하게, 마음은 따뜻하게.." 일한다는 그는 최근 학부모들에게 큰 충격을 준 '일산 초등생 엘리베이터 유괴미수' 사건을 특종 보도하기도 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