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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욕의 상흔 간직한 서울 남산

<8뉴스>

<앵커>

일본의 왠만한 신사보다 규모가 큰 조선신궁이 서울 남산에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분들은 그리 많지않습니다.

일제의 침략정책에 유린당한 남산의 굴곡어린 역사를 김문환 기자가 취재했습니다.

<기자>

지난 600여년간 우리민족의 정신적 숭배의 대상이었던 한양땅 남산. 안중근의사 기념관이 자리한 남산중턱을 찾았습니다.

{정운현/친일문제 연구가}
"바로 이 일대가 조선 신궁입니다. 저기 식물원자리가 사진에 있는 본전입니다. 2만4천여평에 신궁을 지었어요."

당시의 항공사진은 신궁이 남산을 얼마나 훼손했는지 잘 보여줍니다.

{친일문제 연구가}
"1925년에 계단 광장, 차가다니는 길등을 만들어 남산 서쪽을 완전히 훼손했습니다."

더우기 일제는 신궁을 지으면서 남산에 있던 민족 사당인 국사당을 인왕산으로 내쫓았습니다.

{친일문제 연구가}
"조선민족들의 상징적인 숭배대상을 쫓아내 버린 거죠"

일본 관광객들조차 거대한 신궁이 있었다는 사실에 놀랍니다.

{일본관광객}
"오. 이곳에 일본의 절 신사가 만들어졌다니."

그러나, 할아버지들은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는 일조차 괴롭습니다.

{이철준(78)}
"계단 저리로 올라가서 ...여기서 참배했지."

{기자}
"강제로 했나요?"

{할아버지}
"그럼 다 강제지."

조선신궁은 일본의 개국신을 봉안한 곳으로 고이즈미 총리가 참배한 야스쿠니 신사보다 격이 높습니다.

{임헌영/중앙대 교수}
"우리의 정신상태, 기본적인 얼까지를 일본사람과 똑같이 만들고자 하는것이 조선신궁을 만든 기본 식민통치이념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일제는 근처 숭의 여자대학 자리에 총독부를 세워 1926년까지 국권박탈의 본거지로 활용했습니다.

또, 을미사변때 명성황후를 지키다 순직한 2명의 장군을 기리는 장충단 공원 위쪽으로는, 안중근의사가 처단한 이등박문을 위해 박문사를 지어 민족의 정기를 끊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민족 말살의 의도를 지녔던 건축물들이 어디있었는지 표시조차 남기지 않아 역사교육에 큰 허점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학생}
"몰랐는데요, 안내판 같은 게 없어서 신궁이 있다는 것 몰랐어요.">

그러나 서울시는 남산 제모습가꾸기 사업으로 외인아파트를 철거하는 등 3천500억원을 남산에 쏟아부었지만 일제 잔재와 관련한 분야에는 단 한푼도 쓰지 않았습니다.

{이춘희/서울시 공원녹지과장}
"신궁이요? 그런게 뭐죠."

남산의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우리민족의 절개와 기개를 상징하던 소나무.

조선왕조 태종때부터 심기 시작했다는 남산의 소나무는 이제 애국가에서만 나올 뿐입니다.

1910년 부임한 초대 데라우찌, 사내 총독이 남산에 아카시아 만 8천주를 심은뒤 소나무가 밀려났기 때문입니다.

{이경재/서울 시립대 교수}
"아카시아는 왜정때부터 심었고, 아카시아는 잘 자라는 환경이돼 귀화식물이 남산 차지."

고이즈미 총리의 참배로 다시 확인하는 일본의 제국주의 망령. 남산에 비쳐진 일본의 본질은 오늘도 변함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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