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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마다의 눈물샘 터뜨리게 한, '폭싹 속은' 삶의 여정: '정'과 '고귀함'의 세계 [스프]

[취향저격]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 (글: 장은진 대중문화평론가)

폭싹 속았수다
 

매일 쏟아지는 콘텐츠 홍수와 나도 헷갈리는 내 취향, 뭘 골라야 할지 고민인 당신에게 권해드리는 '취향저격'.
 

여기저기 <폭싹 속았수다>의 이야기가 봄날 제주 유채꽃처럼 흐드러지게 피어나고 스러진다. 누군가는 펑펑 눈물을 쏟았다고 하고 누군가는 너무 내 얘기 같다고 하고 또 누군가는 다시 그만두었던 시를 쓰기 시작했다. 정치적 혼란함으로 어지러운 시국에 들과 산으로 번진 불길이 할퀴고 간 상처에 끝도 없이 속이 타 내려갈 즈음 조용히 시작된 그 제주의 이야기는 그렇게 사람들 가슴 속에 번져갔다.

<폭싹 속았수다>는 과연 모두를 구원한 드라마일까? 취향의 차이는 있겠지만 세대 불문 공감의 서사를 펼친 것은 확실해 보인다. 20대들은 학씨 아저씨나 은명이처럼 인정받지 못한 설움과 인생의 페이소스에 열광했고 50대는 IMF를 겪으며 살아온 금명의 이야기에, 6,70대는 가난과 가족의 굴레 속에서 자신을 희생해야 했던 애순을 보며 몰입하고 빠져들었다.

그렇게 살면 살아졌던 시간을 버텨온 이들을 위한 이야기에 우리 모두의 봄이 노오란 유채꽃처럼 팔랑이며 너울너울 스며든다.


<폭싹 속았수다>의 세계관 : 청춘의 낙서가 시집이 되었다

임상춘 작가가 새 작품을 발표할 때마다 도대체 이 세계를 창작해 낸 작가의 정체가 밑도 끝도 없이 궁금해진다. 생각할 상(想)에 넉넉할 춘(賰)이라는 필명을 쓰는 작가. 이름처럼 그녀가 창조해 낸 세계는 늘 너울거리듯 넉넉하다. 세파에 찌든 사람들에게 마음껏 울 수 있는 물꼬를 틀어주고 뒤돌아서 '그래, 내가 가진 소중한 것들에 감사해야지'라는 훈계 대신 따뜻한 용기와 포근한 도닥임을 선사하는 의문의 크리에이터.

<동백꽃 필 무렵>에서는 옹산, <쌈마이웨이>에서는 호천마을이라는 공간을 통해 특별한 로컬리티를 보여주더니 이제 제주 여인 3대의 서사를 통해 엄마와 딸, 손녀의 이야기를 이렇게 그려낼 줄이야... 가족이라는 연대, 그리고 그 안에 담긴 딸과 엄마로 이어지는 거대한 서사는 재미교포 2세대인 이민진 작가도 <파친코>에서 깊이 다루지 못했던 부분이다.

영도와 일본, 미국이라는 공간을 부유하는 한인들의 디아스포라를 다뤘던 <파친코>와 다르게 <폭싹 속았수다>는 제주에 뿌리 내린 여인들의 삶을 글로벌 플랫폼 넷플릭스 안에서 그려냈기에 더 의미 있다. 생존을 위해 바다 밑으로 내려가야 했던 여인들, 살기 위해 결혼을 선택하고 아이를 낳아 기르고, 아이를 죽음으로 떠나보내고 그렇게 "살민 살아진다"며 꾸역꾸역 살아냈던 그들에게 바치는 감사와 존경. 그렇게 그 시대를 살아간 우리들의 할머니, 어머니, 누이에 대한 이야기이기에 관객은 공감하고 눈물을 흘린다. 성공한 영상 콘텐츠에는 보편성의 진리가 들어있다. 효와 정, 믿음과 의리. 인간이 가장 인간다울 수 있는 타이밍에서 사람들은 감동한다.

매섭게 몰아친 인생이라는 폭우를 건너고 건너온 모든 이들에게 손 내미는 따뜻한 스토리. 이들이 썼던 청춘의 낙서가 일기장이 되고 다시 시집이 되어 모두의 가슴을 적시는 것, <폭싹 속았수다>의 세계관이자 미덕이다.


학씨 아저씨가 알려준 잊고 있던 울 아버지의 모습

<폭싹 속았수다>의 화제성에는 조연들의 연기도 한몫했다. <미생>과 <시그널>의 김원석 감독과 임상춘 작가가 찾아낸 보석 같은 조연들의 연기는 적재적소에서 빛을 발한다. 부산으로 야반도주한 관식과 애순이 묵던 여관 주인으로 얄미울 만큼 실감연기를 보여주던 강말금은 <찬실이는 복도 많지>로 신인상을 휩쓴 배우고, 80년대 패션과 분위기를 완벽하게 재현하며 금명에게 딸의 대리시험을 제안하던 김금순도 독립영화계에선 이미 정평이 나 있는 배우다.

그러나 그중에서 가장 뜨거운 반응을 얻은 학씨 아저씨 부상길 역의 최대훈은 전형적인 악역이 아닌 연민을 자아내는 중년과 노년에 이르는 남자의 삶을 입체적으로 보여주었다. 우리 엄마들의 옆에서 살아온 아버지의 삶은 어떠한가. 허세 가득하고 때론 모질도록 폭력을 휘두르던 그 역시 정에 목마른 인간이었음을, 배 나오고 머리 벗겨진 할아버지가 된 남자의 슬픈 뒷모습에 담긴 부상길이란 캐릭터는 잊고 있던 내 아버지에 대한 상념에 젖게 만든다. 부상길이 황혼 이혼 후 서툴지만 조금씩 그의 방식으로 감정을 표현하는 모습, 영란과 자전거를 타며 바닷길을 달리는 장면이나 자식에게 선물 받은 관식의 신발을 신어보고 편하다며 달리는 모습에서 느끼게 된다.

누구에게나 마음속에 찰랑이고 있는, 고여있는 우물처럼 깊은 삶의 아픔과 깊이. 부상길을 보며 오래전 세상을 떠난 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랐던 건 왜일까. 관식이처럼 다정하고 지고지순하며 희생적인 아버지 대신 자식에게, 아내에게 다가가는 법을 몰랐던 서툴고 거칠었던 아버지가 그곳에 있었다. 누구나 자신만의 방식으로 삶을 살아가지만 철이 들면 알게 된다는 것을, 나중에 엄마가 되고 그게 아버지의 표현법이란 것을 알게 된 현숙이는 아버지는 늘 소파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이야기를 엄마 영란에게 들려준다. 그 장면에서 늦은 밤 소파에서 자고 있던 아버지가 떠오른 것은 과연 나뿐이랴. 어쩌면 우리에게는 애순 같은 엄마도 있었지만 상길이 같은 아버지도 있었다는 것을. 금명이가 입에 달고 있던 '짜증 나'라는 표현은 실상 '미안해, 아빠 나도 사랑해'와 동의어였다는 것을.


세상의 모든 삶은 작고도 크다, 그 고귀함에 대하여
<폭싹 속았수다>를 보면서 문득 루시드폴 8집의 '모든 삶은 작고 크다' 가 떠올랐다. 그 어떤 삶도 소중하지 않은 게 있으랴. 척박한 삶을 살아가면서도 딸이 지어준 '개전복'이란 시 한편을 가슴에 품고 행복해하던 광례의 삶도, 야반도주해 가출한 아들 관식이를 찾자마자 금개구리의 행방부터 묻던 계옥이도, 사위를 곤경에 빠트린 사기꾼을 찾기 위해 자존심도 팽개쳤던 부상길의 인생도, 그렇게 오늘 하루 담벼락에 피어난 패랭이꽃처럼 소중하지 않은 인생이 있을까.

작고도 큰 삶, 크고 작은 모든 삶의 여정은 위대하다고 말해주는 이야기, <폭싹 속았수다>. 그렇게 정말 수고하며 오늘 하루도 무탈하게 살아온 모든 이들의 시간이 씨줄과 날줄로 엮여서 역사가 만들어진다는 것을.

이 드라마에 담긴 두 가지 메시지는 정(情)과 고귀함이다. 애순이가 자신의 존재를, 해녀였던 엄마 광례를, 그리고 자신을 사랑해 준 관식이를 귀하게 여기지 않았다면 애순이의 시집은 세상에 빛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게 스스로를 사랑하고 귀하게 여겼기에 애순의 딸 금명이 역시 자신을 귀하게 여겨준 충섭이를 찾았고 그 충섭의 엄마에게 귀한 사람으로 대접받는다.

충섭이의 엄마가 애순에게 말린 곶감을 보내며 손편지로 썼던 글, "저는 금명이가 그렇게도 예쁩니다". 아마도 수많은 K-며느리들의 눈물샘을 터트리게 한 장면은 바로 이 장면이었을 터, 세상의 그 얼마나 많은 딸들과 며느리가 이 말을 듣고 싶어 할까. 듣고 싶지만 듣기 어렵고 하고 싶지만 쉬이 하기 힘든 말. 그 안에는 상대를 인정하고 배려하며 긍휼히 여기는 태도가 들어있다. 사랑과 자비를 베푼다는 것. 처음에는 '왜 금명이와 애순이는 복도 많지, 남편 복이 참 많구나' 삐딱했다가 결국엔 깨달았다. 고귀한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나 스스로 상대방을 높이고 귀한 사람으로 대해주어야 내게 돌아온다는 것을.

(남은 이야기는 스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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