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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성폭행범 누명 쓰고 옥살이…국가가 저버린 믿음

[취재파일] 성폭행범 누명 쓰고 옥살이…국가가 저버린 믿음
"제가 얼굴도 한 번 본 적 없는 사람을 성폭행했다는 거예요. 
경찰, 검사, 판사 이런 사람들이 누구 하나 걸러줄 것 같았어요.
그런데 뭐가 뭔지도 모르고 그렇게 징역 6년을 받았어요."  (김 씨)

전남 곡성에서 호두과자를 팔며 평범하게 살아가던 50대 남성 김 씨. 김 씨와 김 씨 가족의 삶을 한순간에 망가뜨린 이 사건의 발단은 지난 2015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12월 30일, 유난히 추웠던 겨울밤. 술에 만취한 채 김 씨 집 현관문을 두들긴 한 여성. 다짜고짜 "당신이 우리 조카를 성폭행했다"며 행패를 부리기 시작했습니다.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의 난동에 김 씨는 바로 112에 신고를 하는데 '해프닝'으로 끝날 줄 알았던 이날 사건을 기점으로 김 씨는 하루아침에 성폭행 피의자로 조사 받게 됩니다. 
 

이웃 '무고'에 성폭행범…아버지 무죄 밝혀낸 딸

김 씨를 찾아왔던 여성은 김 씨가 살던 빌라 위층에 살던 정 모 씨. 정 씨와 정 씨 조카는 김 씨를 성폭행범으로 지목합니다. 김 씨는 수사 내내 무죄를 주장하고 무고 혐의로 정 씨를 역 고소하기까지 했지만, 1년 넘는 조사 끝에 결국 구속됩니다. 경찰(전남경찰청)과 검찰(광주지검 목포지청)은 김 씨가 지적 장애가 있는 정 씨 조카를 집과 모텔 등에서 세 차례 성폭행했고, 자신의 혐의를 숨기기 위해 정 씨를 무고했다고 결론 냅니다. 그렇게 재판에 넘겨진 김 씨는 2017년 3월 법원(광주지법)에서 모든 혐의가 인정돼 징역 6년을 선고 받습니다. 

수사 기관과 법원이 믿어주지 않던 김 씨의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나선 건 김 씨의 둘째 딸이었습니다. 당시 경기도에 살던 딸은 임신한 몸을 이끌고 전남 곡성으로 한달음에 내려갔습니다. 마을 주민들을 탐문하고, 사건 장소로 지목된 모텔 CCTV까지 확보합니다. 그렇게 사방팔방으로 뛰다가 아버지가 구속된 지 약 10개월 만인 2017년 9월, 성폭행 당했다는 정 씨의 조카를 전남 나주에서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정 씨 조카로부터 충격적 진실을 듣게 되는데 바로 자신을 성폭행 사람은 고모부이고, 고모가 이를 알면서도 숨기기 위해 김 씨에게 성폭행을 당했다고 말하라고 거짓 진술을 강요했다는 겁니다. 
 
"항소심 선고 직전까지 변호사들이 합의하면 감형된다고 합의하라는 거예요. 그런데 제가 딸한테 합의의 '합'자도 꺼내지 말라고 했어요. 어차피 '감옥에서 죽겠구나...'하고 죽을 결심을 하고 기다렸는데 딸이 (정 씨 조카를) 만났다는 거예요. 그렇게 풀려나게 된 겁니다" (김 씨) 

그렇게 김 씨의 딸은 아버지의 항소심 선고를 딱 2주 남기고 "진범은 고모부였고, 고모 정 씨가 모든 조작을 주도했다"는 결정적 자백을 받아냅니다. 경찰, 검찰의 수사, 그리고 1심 재판부 판단을 뒤집은 극적인 발언이었고, 항소심 재판부는 2017년 9월 29일 보석을 허가하면서 김 씨는 11개월의 억울한 옥살이를 마치고 풀려납니다. 헛발질을 했던 수사 기관은 재수사를 통해 뒤늦게 성폭행 진범은 정 씨 남편이었다는 사실을 확인합니다. 김 씨에 대한 무고 혐의까지 추가돼 고모 정 씨는 징역 7년, 정 씨 남편은 징역 3년 6개월을 선고 받습니다. 
 

김 씨 사건 이전에도 '허위 고소'…"몰랐다"던 경찰, 위증 증거 확보 

성폭행 누명 피해자 인터뷰

가까스로 누명은 벗었지만 김 씨와 김 씨 가족의 외로운 싸움은 무려 7년째 이어지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누명을 벗기기 위해 
방방곡곡 누비던 딸은 유산까지 했고, 억울한 옥살이에 수년을 재판에 묶여 지내며 김 씨의 삶은 산산조각 났습니다. 억울한 옥살이에 대한 책임을 묻고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김 씨는 국가를 상대로 2억 원 규모의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하게 됩니다. 사건 2년 전, 정 씨 부부가 전남 함평에서도 같은 수법으로 이웃을 성폭행범으로 몰았던 전력이 있었는데, 경찰이 이를 알면서도 수사를 제대로 하지 않았다는 이유에서 입니다. 이른바 '함평 사건'이라고 불립니다. 당시에도 조카를 성폭행한 사람은 정 씨 남편인 고모부였지만, 정 씨는 동네 이웃에게 죄를 뒤집어 씌웁니다. 경찰은 당시 조카 진술에 신빙성이 없다며 동네 이웃에게 무혐의 결정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정 씨 부부를 무고로 처벌하진 않았는데 이들이 곡성으로 넘어와 똑같은 수법으로 김 씨에게 성폭행 누명을 뒤집어씌운 겁니다. 정 씨 진술의 신빙성을 의심할 만한 대목인데 김 씨 사건 담당 경찰관은 1심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해 '함평 사건'을 몰랐다며 알았다면 수사 방향이 달라졌을 거라고 증언했습니다. 함평에서 정 씨 부부가 무고 혐의로 조사 받은 전력이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는 건데 담당 경찰의 팀장은 당시 함평 사건을 수사했던 경찰이기도 했습니다. 결국 '함평 사건'을 몰랐다는 증언 등으로 김 씨는 1심에서 패소했습니다. 

그런데 최근 항소심 진행 과정에서 당시 경찰이 함평 사건을 인지하고 있었다는 증거가 확보됐습니다. 수사당국이 끝까지 버티며 주지 않던 수사기록을 문서제출명령을 통해 받아보니 김 씨 사건 수사 보고서에 함평 사건 기록이 첨부돼 있었고 "함평 사건을 몰랐다"고 증언했던 담당 경찰관이 이를 직접 편철했다는 기록도 남아 있던 겁니다. 담당 경찰관은 취재진과의 통화에서 "오래전 일이라 기억이 나지 않는다"며 수사 기록을 다시 보겠다고 말했습니다.
 
 
"1970~80년대 일어나도 황당한 사건인데,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2015년에 일어났어요. 그게 얼마나 끔찍해요. 
따님이 노력해서 무죄가 됐어요. 근데 국가는 책임이 없다는 거고 우리는 할 만큼 다 했다는 거예요. 
누구나 이런 일을 당할 수 있고 이런 세상에 우리가 살고 있다는 게 너무 무서운 거죠." (최정규 변호사, 김 씨 변호인) 
 

국가 상대 손해배상 소송 1심 패소…다음 주 2심 선고

성폭행 누명 피해자 인터뷰

하루아침에 무고한 사람을 성폭행범으로 만든 수사 기관의 수사 과정은 너무나 허술했습니다. "김 씨가 차량에 태워 모텔로 끌고 간 뒤 성폭행하고 마트 앞에 내려줬다"는 피해자 진술이 있었음에도 경찰은 기본 중에 기본인 김 씨 차량 블랙박스와 모텔, 마트 CCTV를 확인하지 않았습니다. 김 씨 카드 사용 목록에 범행 장소로 지목된 모텔 결제 내역이 없었음에도 김 씨를 기소해야 한다며 사건을 검찰에 넘겼습니다. 여러 인물 사진을 보여주고 범인을 특정하게 하는 서면 수사를 진행할 때도 고모인 정 씨는 조카 곁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결국 경찰의 판단 근거는 정 씨 조카의 진술, 그리고 재판에서 증거 효력이 없는 거짓말 탐지기 결과 정도였습니다. 

이렇게 수많은 허점이 있었지만, 국가 손해배상 소송 1심 재판부(서울중앙지법)는 김 씨 손을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수사 과정에서 일부 미흡한 점이 있었지만, 수사 기관이 법령, 법규상 또는 조리상의 한계를 위반해 객관적 정당성을 결여한 수사를 했다고 보기 부족하다"는 등의 이유에서 입니다. 대법원 판례를 보면 국가는 손해배상의 요건을 △수사기관의 판단이 경험칙이나 논리칙에 비춰 도저히 그 합리성을 긍정할 수 없는 정도에 이른 경우 △공무원이 법규상 또는 조리상 한계를 위반해 객관적 정당성을 결여한 수사방법으로 수사했다는 점이 명백히 입증된 경우 정도로 한정하고 있습니다. 가까스로 딸이 무죄를 밝혀냈는데 이젠 수사 기관의 잘못을 증명해야 하는 겁니다. 
 
"저를 무고로 몰았던 사람들까지 고소해서 7년 간 재판만 한 것 같아요. 지금까지는 경제적인 피해는 이루 말할 수 없죠. 그런데 경제적인 피해보다도 국가 배상을 받아서 명예를 회복하고 싶어요. 국가에서 저렇게 나오는데 내 말을 누가 믿겠어요." (김 씨)

"경찰, 검사, 판사 이런 사람들이 누구 하나라도 걸러줄 것 같았다"는 김 씨의 말. 얼굴도 모르는 사람을 성폭행했다는 황당무계한 누명을 쓰고도 김 씨는 곧 무죄가 밝혀질 거라 믿음을 갖고 있던 대한민국 국민이었습니다. 하지만 김 씨의 기소를 막아서는 이는 아무도 없었고, '의심스러울 때는 피고인의 이익으로'라는 법언이 무색하게도 징역 6년이 선고됐습니다. 부실한 수사와 재판에 대한 책임을 물을 수 있을 거라 믿었지만 그마저도 좌절됐습니다. 김 씨는 국가 기관을 상대로 1심에서 확보하지 못했던 증거를 들고 항소심을 진행 중입니다. 2심 선고는 오는 13일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립니다. "누구 하나 걸러줄 것 같았다"는 김 씨의 그 믿음을 이번 만큼은 저버리지 않았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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