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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약회사들이 우주로 간 까닭은? [취재파일]

'우주 제약'의 현재와 미래

과거 탐험, 탐사의 대상이었던 미지의 영역 우주는 어느덧 본격적인 개발의 대상이자 주요 국가들의 경쟁의 장이 됐습니다. 우주 산업의 급작스러운 성장 그 이면에는 일론 머스크의 스페이스X가 있습니다. 발사 비용을 획기적으로 줄인 스페이스X는 지금까지 1만 기 넘는 위성을 발사했고, 대부분은 지금도 지구 저궤도(LEO)를 돌고 있습니다. 저궤도에는 스타링크를 비롯한 위성만 있는 게 아닙니다. 국제우주정거장(ISS)과 중국의 우주정거장 '톈궁'이 돌고 있고, 가까운 미래에는 민간 우주정거장과 우주쓰레기 제거 시스템도 활동을 시작할 걸로 보입니다. 이 모두가 지구 저궤도에서 현재 혹은 가까운 미래에 관측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한국마이크로중력학회장인 인하대병원 김규성 교수는 "라이트 형제가 비행기를 띄우던 시절 미지의 영역이었던 하늘이 이제 익숙하고 통제할 수 있는 공간이 된 것처럼, 지구 저궤도도 예측 가능한 공간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왜 저궤도로 가야 하는지, 그곳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고민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국제우주정거장(ISS) 내 단백질 결정화 실험 장비 (출처=NASA)
▲ 국제우주정거장(ISS) 내 단백질 결정화 실험 장비 (출처=NASA)

지난해 가장 많은 매출을 기록한 의약품은 다국적 제약사 머크의 면역 항암제 '키트루다(Keytruda)'입니다. 지난 2023년부터 3년 연속 단일 약물 글로벌 매출 1위를 기록했고, 올해는 300억 달러를 넘어 역대 최대 매출을 기록할 것으로 전망됩니다. 지난 2015년, 지금은 고인이 된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의 암을 완치해 주목받기 시작했던 신약 키트루다는 지금은 명실상부한 '블록버스터' 항암제입니다. 2028년 미국 내 특허 만료를 앞뒀는데, 지난해 말 새로운 제형으로 변신했습니다. 정맥주사가 아닌, 피하주사 제형인 '키트루다 큐렉스(Keytruda Qlex)'가 미국과 유럽에서 잇따라 승인을 받은 것입니다.

대형 병원에 가서 정맥주사로 맞는 시간만 30분 넘게 걸리던 항암제를 피하주사로 단 몇 분 만에 맞게 된다? 그 자체로 암 환자들의 삶의 질을 크게 높이고, 사회적 비용은 줄이는 획기적인 사건입니다. 그런데 이뿐만이 아닙니다. 피하주사로 맞을 때 우리 몸이 항암제를 잘 흡수할 수 있게 돕는 결정적인 기술을 국내 바이오 기업이 머크에 제공하고 로열티를 받게 된 것도 국내에서는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습니다. 여기에 '우주'라는 키워드가 키트루다의 서사를 더 확장합니다. 국제우주정거장(ISS)의 미세중력 환경에서 진행한 단백질 결정 실험이 제형 변화의 핵심 토대를 제공한 것입니다.

과거에 비해 발사 비용이 줄었다지만 여전히 비싼 비용과 각종 위험을 감수하고 우주로 가야 하는 이유는 바로 '미세중력'에 있습니다. 바이오 의약품의 주성분인 단백질을 지상에서 만들 때는 중력으로 인한 침전, 대류 현상을 피할 수 없습니다. 분자들이 바닥에 가라앉고 서로 엉겨 붙기도 해서, 결정이 울퉁불퉁하고 크기도 들쑥날쑥합니다. 불순물이 끼어들기도 쉽습니다. 반면 우주 공간의 미세중력 상태에서 침전, 대류 현상 없이 천천히 자라난 결정은 크기가 균일하며 순도가 높습니다. 순도 높은 단백질 결정은 매우 복잡한 단백질의 구조에 대한 이해를 돕고, 효과적인 신약을 개발하는 데 결정적인 도움을 줍니다. 고농도면서 점도는 낮은 단백질로의 변화, 즉 키트루다 제형 변화도 바로 여기서 시작된 것입니다.

지상 제조 단백질 결정(좌)-우주 제조 단백질 결정(우) (출처=다국적 제약사 머크)
▲ 지상 제조 단백질 결정(좌) - 우주 제조 단백질 결정(우) (출처=다국적 제약사 머크)

또 다른 글로벌 제약사 일라이 릴리는 우주에서 만든, 더 크고 구조가 규칙적인 인슐린의 '씨앗 결정'을 지구로 가져왔습니다. 과학자들은 이 씨앗 결정과 똑같은 구조를 가진 새로운 결정을 지상에서 복제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 결정은 향후 혈당 조절 효과가 더 오래 지속되고, 보관은 더 쉬운 차세대 인슐린을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할 걸로 기대되고 있습니다.

우주에서는 이 같은 다양한 단백질 결정화 실험과 함께, 줄기세포 증식 실험, 인공 망막 개발 등 다양한 시도가 계속되고 있고, 국내 기업들도 속속 뛰어들고 있습니다. 우주 의약 전문 기업을 표방하는 스페이스린텍은 지난해 ISS에서의 단백질 결정화 실험에 이어, 누리호에 탑재된 큐브 위성에 항암제를 실어 보내는 실험을 진행했습니다. 우주정거장처럼 안정되고 관리 가능한 환경이 아닌, 위성에서 단백질 결정을 자동으로 키우는 세계 첫 시도라고 회사 측은 설명합니다. 궤도를 도는 위성 안에서 약품을 생산할 수 있을지, 그 가능성을 타진하려는 의도로 읽힙니다. 제약회사로 시작한 보령은 민간 우주정거장을 건설 중인 엑시옴 스페이스에 투자해, 우주에 신약 개발 기지를 만들려는 계획을 진행 중입니다. 미래 바이오 의약품 제조 및 생산 주도권을 잡기 위한 경쟁이 국내에서도 이미 시작된 겁니다.

우주인 조니 킴과 스페이스린텍의 실험 모듈 (출처=NASA)
▲ 우주인 조니 킴과 스페이스린텍의 실험 모듈 (출처=NASA)

이번에는 우주 의학, 우주 제약에 대해서만 다뤘지만, 지구 저궤도는 여러 영역에서 다양한 층위의 가능성을 품은 공간입니다. 지난 2024년 세계경제포럼(WEF)과 맥킨지(McKinsey)가 함께 펴낸 <우주: 세계 경제 성장을 위한 1조 8천억 달러의 기회>라는 보고서에는 우주 경제가 2035년까지 1조 8천억 달러 규모로 성장할 것이란 전망치가 나옵니다. 2035년까지 발사 비용이 감소하고 일정이 단축되면, 궤도상 제조 시장이 연간 10억~20억 달러 규모로 성장할 것이라는 예측도 함께 제시됩니다. 2035년 이후에는 건강, 보건의료, 제조업, 식품 및 음료 분야 전반에 걸쳐 수십억 달러 규모로 성장할 거란 전망도 있습니다.

스페이스린텍 윤학순 대표는 "우주로 올라가면 중력으로부터 자유로워지듯이, 우주 공간으로 확장돼 가면서 중력에 갇혀 있었던 생각들이 자유로워지고, 장치도 새롭게 개발되고 있다"고 말합니다. 지구 저궤도가 우리를 정말 자유롭게 할지, 우리 삶을 어떻게 바꿀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 변화는 이미 시작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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