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 그때, 카드값이 연체됐었다. 인생 처음 있는 일이었다. 200만 원 정도였다. 인생을 휘청이게 할 만큼 큰돈은 아니었는데 갚을 방법이 없었다. 이미 신용대출은 받을 대로 받은 상태였고, 주변에 돈을 빌려줄 만한 사람은 없었다. 성인이 될 때까지 가정폭력을 일삼던 '알코올중독' 엄마를 피해 도망 나온 이후 그녀는 동생까지 건사해야 하는 사실상 가장이었고 그녀 주변에 어깨를 내어주는 어른은 없었다.
돌이켜보면 불행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계속 이어졌다. 뉴스로만 보던 전세사기가 내 일이 됐고, 다행히 보증보험을 들어놨지만 전세금을 돌려받기까진 한참이 걸렸다. 그사이 잘 다니던 직장에서도 해고 통보를 받았다. 연체된 카드값 200만 원은 불행의 연장선상이었고, 채팅남의 카카오톡 아이디로 연락을 한 건 더 큰 불행의 시작이었다.
채팅남은 카카오톡 대화를 시작하자마자 '내일 집 앞으로 가겠다'고 했다. 거기서라도 멈췄어야 했다. 하지만 '하라는 대로만 하면 큰돈을 벌 수 있다'는 그의 말은 곤궁했던 그녀의 마음에 쉽게 스며들었다.

"지금 생각하면 당연히 바보 같은 생각인데, 그땐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요. 더 물어보지도 않고 다음 날 만나러 나갔어요."
혼자가 아니었다. 채팅남은 또 다른 남성과 함께 차를 타고 집 앞에 와있었다. 차에 올라탔다. 채팅남은 말했다. "이제 휴대폰 깡을 할 거야"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하자 '몰라도 된다'고 했다. 도착한 곳은 휴대폰 대리점이었다. 그곳에서 한 대, 조금 떨어진 또 다른 대리점에 가서 또 한 대. 그렇게 몇 시간 만에 휴대폰 두 대를 개통했다.
휴대폰 두 대는 그들의 손에 넘어갔다. "대표님을 만나러 가자" 그렇게 또 어디론가 향했다. 덩치가 크고 문신을 한 남성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빨아먹을 거 다 빨아먹고 담그려고 했는데(해치려고 했는데), 네가 마음에 드니 직원으로 쓰겠다"고 했다. 그의 차량 안에는 여러 종류의 흉기가 든 가방도 있었다.
그제서야 조금 정신이 들었다. 하지만 소용이 없었다. 모든 신상정보가 그들에게 넘어간 뒤였다. 말이 잘 통한다고 생각했던 동갑의 '채팅남'은 어느새 폭언과 협박을 하는 "조폭"과 같은 모습이었다. 휴대폰 깡 다음은 가전 내구제 대출이었다. 가전 판매점에 가서 직접 구독 계약한 냉장고만 5대. 전화로도 십수 대의 가전을 구독 계약했다. 가전제품 구독은 당장 목돈을 내지 않고 매달 얼마씩 납부하며 제품을 빌려 쓰는 형식인데, 그렇게 구독 계약한 가전제품만 20여 대였다. '요리에 관심이 많아서 냉장고가 여러 대 필요하다고 말하라'고 지시를 받았고, 그 지시대로 이야기했더니 아무런 문제 없이 계약이 됐다.
휴대폰처럼 가전제품도 모두 남성들이 가져갔다. 내구제 대출은 물건을 넘기면 그 대가로 돈을 받는 것이 핵심인데, 그들은 돈도 주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신용카드를 빼앗아 가서 자기들 마음대로 썼다. 빚은 점점 더 쌓여갔다. 공과금, 휴대폰 비용을 낼 돈마저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결국 그들에게 부탁을 해야 했다. 내 카드를 훔쳐가고, 나에게 사기 범죄를 강요하는 이들에게 '돈을 빌려달라'고 읍소를 해야 하는 말도 안 되는 상황이 이어졌다.
29세 정재연 씨의 삶을 뒤흔든 '두 달'
2억 원으로 불어난 부채만큼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큰 자책이 그녀의 마음에 남았다. 29살, 어리다고만 할 수 없는 나이에 대기업에서 계약직으로 일하며 사회생활 경험도 있는데, 왜 그런 황당한 사기에 쉽게 당했을까. 매일 밤 스스로에게 묻는 질문이다.

"왜 이렇게 멍청했지 라는 생각이 매일 같이 들어요. 잠도 잘 못 자거든요. 수면제를 먹어야만 잠을 잘 수 있어요, 너무 괴로워요."
마음의 상처만 남은 게 아니다. 그녀의 몸에도 상처가 남았다. 모집책의 대표라고 불리던, 덩치가 크고 문신을 했던 남성은 그녀의 몸에 문신을 새겼다. '문신 기술을 배웠는데 연습해 볼 도화지가 필요하다'는 이유였다. 그의 오피스텔에 강제로 끌려갔고 5시간 동안 문신 작업이 진행됐다. 그녀의 오른쪽 어깨부터 가슴 위쪽까지, 큰 뱀이 그려져 있다. '너무 아프니 멈춰달라, 제발 그만해달라'고 울면서 매달린 덕에 '꽃'이 그려지는 건 막을 수 있었다. 그는 그녀의 몸에 '꽃뱀'이라는 낙인을 새기려 했다.
그녀는 빨리 3년이 지나길 바라고 있다. 지난 2월 회생이 개시됐고 그녀는 앞으로 3년간 200만 원씩 변제를 해야 한다. (빚은 회생 심사를 거쳐 약 2억 원에서 1억 원으로 줄었다고 했다.) 변제금과 생활비를 벌기 위해 그녀는 "돈은 많이 벌 수 있지만 본인이 원하지는 않는 일"을 하고 있다. 인터뷰를 진행하는 1시간 남짓한 시간 동안 그녀는 담담하게 말을 이어갔다. 그 담담함은 '체념'에 가까웠다. 힘없는 목소리 곳곳에 묻어있는 체념들이 기자의 마음을 파고들 때마다 나도 모르게 깊은 한숨이 내쉬어졌다.
그들에게 돌을 던지는 것만이 능사일까
기사가 나간 후 많은 대중들은 이들을 비판했다. '피해자가 아니라 공범인데 뭐가 불쌍하냐' 혹은 '돈 쉽게 벌려다 저렇게 됐다'는 식이었다. 틀린 말은 없다. 다 맞는 말이다. 이들은 가전 구독을 매개로 한 불법 대출 사기의 공범 혐의를 받고 있다. 또, 쉽게 돈을 벌 수 있다는 유혹에 넘어가 이 범죄에 가담하게 됐고, 합법적이고 정상적인 일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돌을 던지기 전에 이들이 처해있던 상황을 한번 살펴봐 주면 좋겠다. 하필 그때 200만 원이라는 카드값이 연체되지 않았다면, 아니 연체되었더라도 그 돈을 대신 갚아주거나 빌려줄 누군가가 있었다면, 그도 아니라면 '불법사금융예방대출' 등 제도권에서도 신용불량자 등에게 소액 대출을 해주는 제도가 있다는 사실을 누군가 알려주기라도 했다면, 재연 씨는 이런 범죄에 휘말리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청년 공범들은 경찰 수사와 법원의 판단에 따라 처벌을 받게 될 수도 있다. 다만 이들을 처벌한다고 또 다른 청년 공범들이 생겨나지 말라는 법은 없다. 또 다른 재연 씨는 지금도 어딘가에서 범죄의 덫에 걸려들고 있을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