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백상예술대상 시상식을 그 어느 때보다 열심히 봤습니다. 대중의 관심은 주로 TV나 영화 부문에 쏠렸지만, 저는 연극 부문 시상을 손꼽아 기다렸습니다. TV나 영화만큼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지는 못하지만, 백상예술대상은 연극 부문도 시상합니다. 제가 관심을 가졌던 부문은 연극 중에서도 여자연기상 부문이었습니다.
올해 백상예술대상 연극 여자 연기상 부문에선 의미 있는 기록이 하나 나왔습니다. 배우 박지영 씨가 농인 배우 사상 처음으로 연기상 후보에 오른 것이죠. 박지영 씨는 레드카펫 행사에서, 그리고 수상자 발표 직전 카메라에 잡힐 때마다 '사랑합니다(I Love You)'를 손동작으로 표현했습니다.
▲ 2022.05.09 8뉴스 리포트
저는 이 장면을 보면서 올해 아카데미상 시상식에서 봤던 수어를 떠올렸습니다.
윤여정 배우가 시상했던 남우조연상 부문, 처음엔 윤여정 씨가 수상자를 수어로 '호명'했다고 잘못 알려졌었지요. 하지만 사실은 수상자 이름이 아니라, 이 '사랑합니다'를 표현하려던 것이었습니다. 이 동작은 알파벳 I와 L, Y를 나타내는 미국 수어를 합쳐 'I Love You'를 뜻하게 된 것인데, 페이스북이나 왓츠앱 같은 SNS에 이모지로 등록되었을 정도로 많이 쓰입니다. 트로이 코쳐 출연작인 영화 '코다' 포스터에도 나옵니다.
'코다'는 농인 가족 중에 유일한 청인인 소녀 루비의 성장기를 따뜻하게 그려냅니다. 트로이 코쳐 뿐 아니라 말리 매틀린('작은 신의 아이들'에서 1986년 농인 배우 사상 처음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했습니다), 대니얼 듀란트 등 농인 배우들이 농인 캐릭터를 모두 소화했습니다. 대본의 40퍼센트 정도가 수어로 채워졌습니다. 트로이 코쳐가 수어로 한 수상 소감에 참석자들은 두 팔을 반짝반짝 흔드는 수어로 고요한 '박수'를 보냈습니다. '코다'는 작품상과 각색상도 받으면서 3관왕에 올랐습니다. 올해 아카데미상 시상식에서는 '코다' 출연진이 여러 차례 보여준 '사랑합니다' 수어와 객석의 고요하지만 반짝거리던 박수갈채를 잊을 수가 없을 겁니다.
(농인은 청각장애인 중에 수어를 제1언어로 사용하며 농문화를 향유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청각장애인이 모두 수어를 사용하는 건 아닙니다. 청각장애인 중에서도 청각 보조장치를 활용하거나 입술을 읽고, 발성 훈련을 통해 음성언어로 소통할 수 있는 사람은 구화인으로 부릅니다. 농인의 상대어는 '청인'입니다. 청인은 음성언어를 제 1언어로 사용하는 비장애인을 뜻하는 말입니다. 장애 여부를 중심에 놓지 않고 사용 언어에 따라 나눈 '농인-청인' 구분을 요즘 점점 많이 쓰는 추세입니다.)
한국에도 농인 극단과 농인 배우들이 있습니다. 전통 있는 농인 극단과 배우들이 활발하게 활동 중인 미국에 비하면 한국 현실은 아직 열악한 게 사실입니다. 한국에선 농인 캐릭터도 청인 배우에게 맡기고 (마치 배우가 모르던 외국어를 배워서 모국어인 것처럼 연기하게 하는 것과 같습니다), 공연에서 청각장애인 관객을 고려한 자막이나 수어 통역이 지원되는 경우는 극히 적었습니다. 하지만 최근 몇 년 사이 국·공립 단체 중심으로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하는 공연이 늘고 있고, 장애인 예술가들의 활동이 많이 활발해졌습니다.
특히 국립극단은 올해 장애를 테마로 한 공연을 시리즈로 선보여왔습니다. 그중 하나인 '이것은 어쩌면 실패담, 원래 제목은 인투디언노운 (미지의 세계로, 엘사 아님)'은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농인과 청인이 공연을 함께 만들어가는 과정을 그려낸 '다큐멘터리' 연극입니다. 이 공연에 출연한 박지영 씨가 바로 농인 최초 연기상 후보에 오른 겁니다.
박지영 씨는 상을 받지는 못했습니다. (이 부문 수상자는 '홍평국전'의 황순미 씨였습니다). 하지만 연출가 김미란 씨가 이 연극으로 백상예술대상 젊은연극상을 받으면서 주목받았습니다. '이것은 어쩌면 실패담'일지도 모르지만, 서로 다른 언어를 쓰는 사람들이 상대방이 속한 세계, 미지의 세계를 알아가는 과정이기도 했습니다. 박지영 씨는 이 연극 코멘터리 영상 ( ▶ 관련 영상 보러가기) 에서 '이 연극이 박지영 개인의 이야기를 많이 담고 있다'며, '보는 분들이 박지영의 세계로 여행 오신 것처럼 여기시면 된다'고 했습니다.
이 연극을 만드는 과정에는 수어 통역사가 항상 함께 했습니다. 한국수어를 쓰는 사람과 한국어(음성언어)를 쓰는 사람들을 연결해주는 역할이죠. 농인 배우의 활동이 어려운 이유로, 추가 인력과 예산 부담을 감수하기 어렵다는 점을 들기도 합니다. 그래서 수어 통역사를 두고 농인 배우를 기용하는 게 예외적이고 추가적인 부담이 아니라 당연히 필요한 일로 여기는 분위기가 될 때까지, 국·공립 단체가 더더욱 선도적으로 이런 시도를 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박지영 씨는 농인 예술단체 핸드스피크 소속 배우입니다. 핸드스피크는 코로나 초기 세종문화회관에서 했던 수어연극 '사라지는 사람들'을 취재하며 알게 된 단체인데요, 올해 다시 무대에 오른 '사라지는 사람들'은 농인과 청인 배우들이 함께 하는 공연이었습니다. 핸드스피크는 배우와 댄서, 연출가 등 다양한 활동을 하는 농인 예술가 20여 명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핸드스피크는 수어랩, 수어 뮤직비디오 등 다양한 수어 콘텐츠도 내놓고 있는데요, 뮤지컬 '영웅'의 수어커버 영상( ▶ 관련 영상 보러가기)으로 화제가 되었습니다. 이 영상을 연출한 핸드스피크 소속 김지연 씨는 뮤지컬 '영웅'을 보면서 대사를 하나도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이 공연에서 크게 감동을 받았고 공연의 주요 대목인 '누가 죄인인가'를 수어로 커버해 많은 사람들에게 자신이 느낀 감동을 전하고 싶었다고 합니다. 박지영 씨는 이 영상에서 안중근 의사 역을 연기해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많은 농인 예술가들은 다른 사람들이 쉽게 즐기는 공연들을 제대로 볼 수 없는 고충을 토로합니다. 자막이나 수어 통역이 제공되는 공연은 극히 드뭅니다. 그래서 김지연 씨는 뮤지컬을 보러 갈 때 혹시 대본을 미리 볼 수 있을지 문의하기도 했는데, 그건 저작권 문제로 안된다고 합니다. 또 박지영 씨는 얼마 전 국립정동극장에서 공연된 연극 '가족이라는 이름의 부족'이, 수어를 사용하는 농인 캐릭터를 청인 배우에게 맡겼을 뿐 아니라, 정작 수어를 사용하는 농인 관객은 이 연극을 볼 길이 없다며 문제를 제기하기도 했습니다. 당초 청각장애인 관객을 위한 자막 제공은 어렵다고 밝혔던 제작사 측은, 이 사실이 알려지며 비판 여론이 조성되자 비로소 자막 서비스를 도입했습니다.)
백상예술대상 시상식 이후 쏟아진 기사들 중에 시상식에 후보로 처음 참석한 농인 배우를 주목한 기사는 없었습니다. 박지영 씨가 수상을 했다면 물론 달랐겠지요. 저는 수상 여부와 관련 없이 올해 백상예술대상 시상식 연극 부문에서 의미 있는 기록이 나왔다고 생각해 SBS 8뉴스에 박지영 씨 이야기를 보도했습니다. 박지영 씨가 첫 후보 지명으로 새로운 장을 열었고 다른 농인 배우들도 활동하고 있으니, 한국의 시상식에서도 수어 수상소감과 반짝거리는 수어 박수를 보게 될 날이 머지않아 올 것이라고 기대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