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기치 않게 쏟아진 눈과 함께 그날의 비극은 시작됐습니다.
부모님 힘들다며 스스로 용돈을 벌어 쓰던 기특한 딸 소윤이. 학교에서는 성실했고 친구들과도 사이가 좋았습니다. 그런 소윤이가 발견된 곳은 한 공사장의 차디찬 바닥.
소윤이는 시멘트 포대에 덮인 채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됐습니다. 그런데 함께 사라진 건 소윤이의 숨소리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사라져버린 소윤이의 두 손목.
평범한 여고생이던 소윤이에게 누가 이렇게 끔찍한 일을 저지른 걸까요?
■ 18살 소윤이의 안타까운 죽음…그런데 손목이 사라졌다
2001년 3월 8일. 궂은 날씨에도 아르바이트를 갔던 큰딸 소윤이를 기다리던 엄마는 그만 깜빡 잠이 들었습니다. 갑자기 울린 전화벨 소리 때문에 잠에서 깬 시간은 밤 11시쯤. 소윤이가 일하던 가게 근처를 지나던 외숙모의 전화였습니다. 퇴근 시간이 한참 지났는데도 가게에 불이 켜져 있었고 가방도 그대로 놓여 있는 것이 이상했습니다.
엄마는 새벽 3시가 넘는 시간까지 소윤이를 찾아 헤맸습니다. 그날따라 하필 수리를 맡겼던 소윤이의 휴대전화. 밤새 마음을 졸이며 소윤이의 행방을 찾아 수소문하던 가족들. 하지만 들려온 건 소윤이가 숨졌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소윤이의 시신은 아르바이트를 하던 가게와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공사장에서 발견됐습니다.
[시신 최초 목격자 : "연장 가지러 밑으로 내려가는데 내려가서 이제 보니까 위에 신문지가 덮여 있더라고요. 발로 차보니까 뭐 안 움직이고 오른쪽인지 왼쪽인지 몰라도 발이 한쪽이 나와 있더라고요. 그래서 바로 신고를 해 가지고.."]
사망 원인은 경부압박 질식사. 즉, 목 졸림으로 인한 사망이었습니다. 그런데 범인이 소윤이를 살해한 이유를 알 수가 없었습니다. 당시 소윤이가 가지고 있던 현금이 그대로 남아 있었고 옷매무새를 흐트러뜨린 흔적도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고병길 / 당시 영동경찰서 수사과장: "신체에 특별한 폭행 흔적은 없었고요. 정액반응 음성이 나왔고 외관상으로 성폭행 흔적은 없는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모든 것이 그대로인 소윤이의 시신에서 사라진 것 바로 소윤이의 두 손목이었습니다. 현장에서는 손목을 훼손한 범행 도구로 추정되는 피묻은 곡괭이가 발견됐습니다. 하지만 핏자국은 거의 남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 "우리 소윤이가 대체 얼마나 뭘 잘못했기에…" 어머니의 한맺힌 절규
[유성호 / 서울대학교 법의학교실 교수 : "이거는 사후 사망한 후에 발생한 손상이라고 판단합니다."]
살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살해한 뒤에 손목을 잘라낸 정황. 여고생을 살해하고 손목까지 자른 엽기적인 사건에 사람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습니다.
[윤옥분 / 소윤이의 어머니 : "그 생각하면 하도 놀라서 말도 못하고 진짜 벌벌 이러다가 애들하고.. 아무래도 소윤이가 시멘트 포대로 덮어져 있는데 손이 없다고 그러더라고 손이 없다고.. 그런데 소윤이가 얼마나 잘못했는지 몰라도 손을 왜 자르느냐고."]
사건 당일 소윤이는 학교를 마치고 평소처럼 아르바이트를 하는 가게로 향했습니다. 같은 건물의 식당 아주머니도 그날 소윤이를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아주머니가 소윤이를 목격한 건 드라마가 시작하기 직전인 8시 20분. 그리고 8시 35분쯤 사장이 가게에 전화를 걸었지만 소윤이는 받지 않았습니다.
15분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걸까요? 소윤이의 행적을 찾기 위한 경찰 수사가 시작됐지만 주변에는 CCTV 하나 없었고 목격자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다음 날 아침 뜻밖의 장소에서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영동 한복판을 가로지르는 하천에서 소윤이의 사라진 손목이 발견된 겁니다.
신고자는 냉각장치에 쓸 물을 뜨려고 하천에 도착한 순간 물속에 가지런히 놓인 손목을 발견했다고 말했습니다.
[이배근 / 당시 사건 담당 형사 : "던지듯이 뿌린 것이 아니고 일부러 나란히 내려놓아야만 놓을 수 있는 그런 모습으로 가지런하게 손바닥이 하늘을 향해서 이런 형태로 이제 물에 잠겨 있었던 거죠."]
당시 하천은 일부 얼어 있었고 물의 흐름은 잔잔했습니다. 즉 손목이 떠내려온 것이 아니라 범인이 두고 갔을 가능성이 큰 상황.
사라졌던 손목이 발견되면서 용의자들도 추려지기 시작했습니다.
■ 얼음물 아래서 발견된 손목…그렇게 용의자가 좁혀지는 듯 했지만
먼저 용의선상에 오른 사람은 동네의 한 사진작가였습니다. 예술적인 사진을 찍으려고 한 것이 아니냐는 의문이 제기됐지만 범죄 혐의점은 없는 것으로 조사됐습니다.
문제는 손목이 물에 잠겨 있었던 탓에 범인의 혈흔과 유전자 그 어느 것도 발견되지 않았다는 겁니다.
사건을 풀 열쇠가 될 것 같았던 손목에서 실마리를 찾지 못하면서 경찰은 다시 현장에 초점을 맞췄습니다.
범행 도구가 곡괭이라는 점과 시신이 발견된 장소가 공사장인 만큼 공사장 근로자들도 용의선 상에 올랐습니다. 가장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된 사람은 공사장 근로자 이 모 씨. 소윤이의 시신을 가장 먼저 발견한 사람이었습니다.
시신을 덮고 있던 시멘트 포대 위에서는 이 씨의 것으로 추정되는 볼펜도 발견됐습니다. 이 씨의 손등에서는 사람 손톱에 의해 생긴 것으로 추정되는 굴곡진 모양의 상처가 발견됐는데 이 씨는 처음에 벽돌 때문에 생긴 상처라고 진술했다가 아내와 다투다 생긴 것이라고 말을 바꾸기도 했습니다.
소윤이 목에서 발견된 발자국과 이 씨의 슬리퍼 모양까지 비슷한 것으로 조사되면서 그렇게 사건은 이 씨의 범행으로 결론이 나는 듯했습니다.
하지만 경찰은 이 씨를 범인이라고 결론짓지 못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취재진은 전문가들과 함께 사건을 다시 분석해봤습니다.
우선 취재진이 만났던 이 씨의 행동을 전문가들에게 보여줬습니다.
무언가 숨기려고 할 때 보이는 양상이지만 범인으로 단정 지을 수는 없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했습니다.
[박지선 / 숙명여대 사회심리학과 교수 : "용의자로 지목돼 7번이 넘는 반복적인 조사를 받았고요. 어떤 상황의 특수성 때문에 이 분이 어떤 굉장히 움츠러드는 식의 행동을 보일 가능성이 충분히 존재하기 때문에.."]
이 씨 손등 상처에도 모호한 점이 있었습니다. 상처가 생긴 날짜를 정확히 추정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목에 남은 신발 자국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황민구 / 법영상분석연구소장 : "지금 이 물결무늬 한 패턴만 가지고 어떤 신발이라고 추정하기에는 문제가 있을 것 같습니다."]
■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 수사…"계획적인 범죄" vs "우발적인 범행"
어쩌면 초기 수사에서 놓친 증거들이 있는 건 아닐까. 당시 소윤이 주머니에서는 사용하지 않은 생리대가 발견됐습니다. 일하던 가게에서 나와 화장실에 가던 중 변을 당했을 가능성이 있는 겁니다.
하지만 화장실에서 공사장으로 가는 길목에는 소윤이 외숙모의 식당이 있었습니다. 도와줄 사람이 있기 때문에 비명을 지르지 않을 이유가 없었던 겁니다.
[표창원 / 범죄심리학자 : "가장 실현 가능한 시나리오는 어쨌든 본인이 자발적으로 그 공사현장 입구까지는 갔을 가능성이 높다."]
만약 공사장까지 안심하고 따라갔다면 범인은 소윤이와 가까운 사람일 수 있습니다.
게다가 소윤이는 손으로 목이 졸려 살해당했습니다. 범인이 사전에 미리 준비해온 살인도구가 없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한 번이 아닌 여러 번의 시도에 걸쳐 잘린 소윤이의 손목. 치밀한 계획 끝에 일어난 살인이 아닌 미숙한 범인의 우발적인 살해가 아니었을까요.
당시 경찰 수사의 초점은 유력한 용의자 이 씨에게 맞춰져 있었습니다. 이 씨가 범인이라는 증거를 찾다가 정작 소윤이의 주변 사람들은 철저히 조사하지 못했던 겁니다.
소윤이가 마지막으로 함께한 사람들은 사실 같은 학교 친구들이었습니다.
소윤이가 살해당하던 날의 행적들. 수업을 마친 소윤이는 친구들과 함께 길을 걸었습니다.
은행에서 돈 3만 원을 인출한 뒤 노점에서 붕어빵을 사 친구들과 나눠 먹었고 노래방에도 들렀습니다. 아르바이트를 하는 가게에 도착했을 때는 친구 장 양과 함께였습니다.
이후 가게에 들린 것은 후배 김 군 친구 장 양과 후배 김 군은 얼마 지난 뒤 집으로 향했고 가게에는 소윤이는 혼자 남았습니다.
그리고 저녁 7시 반쯤 학교 친구 황 군이 가게로 전화를 걸었습니다.
첫 번째 통화는 약 3분간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한 시간 뒤에 또 걸려온 황 군의 전화. 그런데 황 군과의 통화목록에서 이상한 점이 발견됩니다.
단 19초 동안 이어진 통화를 마지막으로 소윤이가 사라진 겁니다.
짧은 시간 동안 무슨 말이 오갔을까요?
■ "19초 동안의 마지막 통화"…소윤이는 누구의 전화를 받고 나갔을까
친구 황 군은 당시 소윤이에게 좋아한다는 마음을 표현하던 친구였습니다. "왜 나한테 전화하지 말라고 했냐?" "누구를 좋아하냐"는 등 사랑한다는 말과 질투심을 담은 메일을 무려 29차례 보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경찰의 추가 조사가 시작되자 황 군은 영동을 떠나버렸습니다. 소윤이와 마지막 통화를 나눴던 황 군을 추적한 취재진은 직접 만날 수는 없었지만 어렵게 연락이 닿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소윤이와 통화했다는 사실조차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황 군 / 소윤이와 마지막 통화한 친구 : "(그 사건이 일어나는 날 오후나 저녁쯤에 혹시 전화 통화나 만나시거나 이런 기억은 없으세요?) 없어요. 전 그날 버스 타고 집에 갔는데요 뭐. 아니 지금 와서 괜히 다시 말 그대로 좋은 기억도 아닌데 그동안 다시 생각하기도 싫고 저는 지금 말한 게 다예요. 더 이상."]
기대했던 황 군에게서 이렇게 끊겨버린 사건의 열쇠.
두 번째는 소윤이가 일하던 가게에 찾아왔던 후배 김 군입니다. 김 군은 당시 소윤이의 손목이 발견된 날부터 계속 학교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대체 왜 그랬을까? 취재진은 김 군이 마지막으로 머물렀다는 동네를 찾았습니다.
하지만 김 군의 주민등록은 이상하게도 말소된 상태였습니다. 김 군을 더는 찾을 길이 없었습니다.
소윤이의 죽음에 대한 실마리를 알 것 같은 마지막 인물은 소윤이의 어릴 적 친구인 박 군.
박 군은 소윤이의 시신이 발견된 날 그리고 하루 뒤 손목이 발견된 날에도 학교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사건을 맡았던 형사는 박 군이 보낸 문자메시지를 보고 그를 예사롭지 않게 생각했습니다.
사건이 발생하고 1년 뒤 형사가 소윤이의 친구들에게 '너라면 왜 범인이 손목을 잘랐을 거라고 생각하냐'라는 문자를 보냈는데 박 군만 발신번호를 감춘 채 답장을 보내왔기 때문입니다.
또 박 군이 인터넷 동창 커뮤니티에 쓴 글에도 "손가락을 자르거나"라는 등 사건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소윤이 사건과 관계없는 일이라며 선을 그었습니다.
[박 군 / 소윤이의 어릴 적 친구 : "솔직히 저는 지금 기억은 없는데 제가 만약에 썼다면 약간 좀 감성팔이 기질로 써놨겠죠? 자꾸 이쪽 일이랑 지금 연관이 되고 있다는 게 이게 지금 마음이 불편해요 나는 죄를 안 지었는데 자꾸 방향이.."]
박군은 취재진에게 불쾌함을 표시했고 이후 더 이상 통화할 수 없었습니다.
■ 하나같이 말하길 꺼려 한 소윤이의 친구들…그날의 진실은 누가 알고 있을까
전문가들은 친구들과 소윤이의 당시 관계에 대해 좀 더 알아볼 필요가 있다고 조언합니다.
[박지선 / 숙명여대 사회심리학과 교수 : "왜 하필 손목이어야 했을까. 피해자가 여고생이라는 점을 감안해서 봤을 때 어떤 핸드폰의 문자메시지라든지 인터넷에 올리는 글. 그러니까 피해자의 손으로 할 수 있었던 활동으로부터 어떤 애정이나 이성관계에 있어서 거절을 당한 그로 인해서 굉장히 모욕감을 느낀 사람은 없는지. 이런 측면도 살펴봐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수많은 수사 기록 가운데 소윤이의 친구들에 대한 내용은 거의 없습니다. 수사 초기에 너무 일찍 공사장 근로자 이 씨를 용의자로 특정하면서 주변 인물을 수사하거나 충분한 단서를 확보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살아 있었다면 올해로 서른셋. 그렇게 사라진 18살 소녀는 17년째 꽃다운 18살에 멈춰 있습니다.
하지만 사건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살인죄 공소시효 폐지법, 이른바 '태완이법'이 통과되면서 소윤이를 살해한 범인도 사건종결 없이 추적이 가능해진 겁니다.
범인은 기억해야 할 겁니다.
당신의 양심을 옭아매고 있을 이 사건이 법적인 공소시효까지 없어진 지금 이제 평생 당신의 뒤를 따라다닐 거란 걸 말입니다.
(구성: 장아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