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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브스夜] '그알' 이윤성 의문사…잃어버린 봄을 되찾으려 했던 80년대 청년들, 그들은 왜 죽어야 했나

[스브스夜] '그알' 이윤성 의문사…잃어버린 봄을 되찾으려 했던 80년대 청년들, 그들은 왜 죽어야 했나
1980년대 대학생들은 왜 죽어야만 했나.

13일 방송된 SBS '그것이 알고싶다'에서는 '서울의 봄과 프락치 전쟁 - 보안사령부와 205부대의 비밀'이라는 부제로 1980년대 이유를 알지 못하고 사랑하는 이들의 곁을 떠나게 된 대학생들의 이야기를 조명했다.

활달하고 긍정적인 성격에 친구들에게 인기가 많았던 대학생 이윤성 씨. 그런데 1983년 11월 초, 대학 2학년이었던 그가 갑자기 사라졌다. 그리고 또 얼마 후 더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졌다. 그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것.

11월 3일 시위 도중 경찰에 체포된 윤성 씨는 이틀 뒤 돌연 입대했다. 강제 징집이 된 것. 그리고 6개월 후 의가사제대가 결정되어 전역을 일주일 남긴 어느 날 부대 내에서 그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소식이 전해진 것이다.

군은 당시 GOP에서 근무하던 윤성 씨가 관물대에 북한의 전단을 소지하고 있다가 발각되어 조사를 받던 도중 자살을 했다고 밝혔다. 그리고 군은 아들의 죽음에 대해 의문을 갖는 가족들에게 "빨갱이 새끼"라며 어떤 말도 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윤성이는 수사 결과 발표 이후 하루 만에 화장 처리까지 되었다.

그런데 가족들은 윤성이가 사망한 곳이 그가 근무하던 곳이 아닌 '205 보안부대'라는 것에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사망 5일 전 갑자기 그곳으로 끌려간 윤성이는 대체 왜 무엇 때문에 그곳으로 끌려갔을까.

제작진은 윤성 씨 죽음에 관한 진실을 알기 위해 최초 목격자이자 당시 205 보안부대 위병으로 근무했던 인물을 어렵게 만났다. 그는 다른 부대에서 온 윤성이 심사실이라는 곳에서 생활과 숙식을 했던 것을 기억했다. 그리고 5월 4일 그가 보이지 않아 수색을 하자 허리띠와 군화 끈으로 목을 맨 채 사망한 윤성의 시신을 발견했다고 했다. 

그런데 그가 사망한 모습이 스스로 힘을 유지해 목을 매기는 어려운 모습이었다고 말해 눈길을 끌었다.

놀라운 건 자신이 심판대에 매달려봤을 때 발견 당시 사망 자세를 혼자 힘으로 유지하기는 어려워 보였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윤성 씨는 스스로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이 아닌 누군가에 의해 살해된 것은 아닐까? 그리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면 그 이유는 대체 무엇일까?

그런데 윤성 씨가 사망한 후 대학가에는 또 다른 소문이 돌았다. 윤성 씨처럼 강제 징집된 후 사망한 대학생이 윤성 씨뿐만이 아니라는 것. 윤성 씨와 비슷하게 사망한 이들은 다섯 명이 더 있었다.

그리고 의문사한 이들 중 여럿이 205 보안부대와 연관돼 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으나 이에 대한 진실은 아직도 발견되지 않고 있었다.

전두환의 군사 정권이었던 당시, 군사 정권을 반대하는 가장 큰 세력은 대학생들과 학원가였다. 그리고 정부는 이를 막기 위해 학생들을 군대로 끌고 갔다. 그리고 그렇게 끌려간 이들은 특수학적변동자로 분류되었다.

또한 당시 보안사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서는 객관적인 수사조차 불가한 시대였다.

그리고 제작진들은 취재 도중 당시 보안사령부의 심사 장교였던 한 제보자를 만났다. 그는 "인생을 살면서 부채감이 있었다. 당시에도 올바르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라며 뒤늦은 고백을 했다.

그는 자신이 소장하고 있던 특수학변자 심사 훈화 활용 자료를 공개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윤성 씨는 당시 A등급으로 분류되어 심사를 받았으며 순화, 활용 과정을 거쳤을 것이라 짐작했다.

순화는 전두환 일대기 읽고 독후감을 읽는 등 학생들의 의식 개조를 노린 과정이었다. 그리고 이후 활용에서는 신임도 측정 과정이 있었다. 대학생들의 의문사와 이는 관련이 있는 것 아닐까?

당시 세상을 떠난 한 학생의 친구인 제보자는 자신에게 1983년은 삶에 있어 가장 처참한 시기였다고 기억했다. 강제 징집된 자신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황망하게 세상을 떠난 아버지, 그리고 친구 또한 어느 날 세상을 떠나버리고 말았던 것. 또한 그는 당시 받은 고문으로 후유증까지 남아있었다.

대공분실에서 이뤄진 구타과 가혹 행위. 그리고 군은 학생들에게 또 다른 희생자를 찾았다. 학생들은 살기 위해 또 다른 친구의 이름을 이야기할 수밖에 없었고, 살기 위해 그들이 시키는 대로 그들이 원하는 말을 해주어야 했다.

그렇게 되면 태극기와 대통령 사진 앞에서 충성 서약을 하게 만들고 대학으로 돌아가 또 다른 공작을 종용했던 것. 학교로 돌아간 대학생들은 프락치 요원으로 활용되었다. 그리고 이는 보안실의 비밀 사업 중 하나였다.

공작에 이용되어 자기가 살기 위해 친구들을 배신했던 학생들, 당시 이들이 이를 거부하기는 힘들었다. 그리고 대신 평생 죄책감을 안고 살아가야 했다. 그런데 이들이 대공분실에서 겪은 참혹했던 일들은 어떠한 기록에도 남아 있지 않았다.

제작진은 취재 중 윤성 씨가 사망하기 한 달 전 학교 주변에서 친구들을 만난 사실을 확인했다. 이에 가족들에게 그가 휴가를 나온 적이 없는지 물었지만 그런 사실은 없었다. 그리고 친구들은 당시 윤성 씨가 양복 차림의 수상한 이와 함께였다고 말해 의아함을 자아냈다.

그런데 비슷한 시기 프락치 활동을 강요받았던 한영현 학생은 결국 휴가를 마친 1주일 뒤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이에 전문가는 "자기혐오에 빠지게 만드는 전략이다. 자신의 입을 통해 나가는 일들의 파장이 크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말하지 않는 방법은 죽는 것밖에 없기에 그런 선택을 하게 되는 것이다"라고 안타까워했다.

녹화 사업의 책임자에 대한 조사를 했던 의문사 진상 규명 위원회, 그러나 진실을 밝혀내지 못했다. 녹화 사업의 관계자 중 최고 책임자는 이미 사망했고 관련자들도 몇 남지 않은 상황에서 제작진은 최경조와 서의남을 찾아가 당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었다. 그러나 이들은 모르쇠로 일관할 뿐이었다.

이에 전문가는 "젊은이들의 카키색 청춘이 얼마나 욕심 많은 전두환의 졸개들에 의해서 얼마나 어처구니없게 망가져 갔는가"라며 통탄했다. 민주화를 꿈꾸던 학생들은 그저 봄이 오길 바랐을 뿐이다.

당시 보안사에서 등록 번호를 매겨 관리한 것으로 보이는 이들은 2,921명. 그리고 이 중 피해 사실이 확인된 것은 4분의 1 가량에 불가했다.

살아남은 죄책감을 갖고 지금 살아가는 이들은 "가해자를 벌할 수 없다는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원하는 것은 가해자를 밝혀달라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방송 말미에는 한희철 학생이 마지막으로 남긴 편지가 공개됐다. 그는 사망하기 전 전두환에게 "이 땅에 민주주의와 경제 정의를 이루어 주십시오. 인간의 책임입니다"라는 편지를 남겼던 것이다. 그저 국민이 주인인 나라를 꿈꾸었던 학생은 그렇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역사를 모르는 사람은 그것을 반복하기 마련이다. 우리는 또다시 그런 역사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잃어버린 봄을 되찾기 위해 나선 80년대의 청년들, 그들을 영원히 기억해야 할 것이다. 

(SBS연예뉴스 김효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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