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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꼬무 찐리뷰] "귀신 씌었다" 살해된 재력가 물건 훔친 경찰의 변명…윤노파 살인사건 미스터리

꼬꼬무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역사 속 '그날'의 이야기를, '장트리오' 장현성-장성규-장도연이 들려주는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이하 '꼬꼬무'). 본방송을 놓친 분들을 위해, 혹은 방송을 봤지만 다시 그 내용을 곱씹고 싶은 분들을 위해 SBS연예뉴스가 한 방에 정리해 드립니다.

이번에 '당신'에게 들려주고 싶은 '그날'의 이야기는, 지난 20일 방송된 '살인의 계절-윤노파 살인사건' 편입니다. 이야기 친구로는 배우 홍은희, 방송인 김동현, 그룹 오마이걸 멤버 승희가 출연했습니다.(리뷰는 '꼬꼬무'의 특성에 맞게, 반말 모드로 진행됩니다.)

▲ 흉가에서 일어난 기괴한 살인사건

때는 1980년대, 서울 용산구에 오랫동안 방치된 적산가옥이 하나 있어. '적산가옥'은 적들이 지은 가옥이란 뜻으로,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일본 양식으로 지은 집을 말해. 목조건물인 이 집은 몇 년째 아무도 살지 않고 있는 폐가야. 동네 사람들은 아이들에게 "저 집에는 절대 가까이 가지 마라"고 말했대. 도대체 어떤 집이길래, 얼씬도 하지 말라고 말했을까? 보여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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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층부터 2층까지 건물 전체가 철망으로 덮여있어. 심지어 대문 위에도 날카로운 창살이 달려 있어. 외부인의 침입을 철저히 막은 거야. 오랫동안 방치된 창살집. 동네 사람들은 이 집을 흉가라고 불렀어. 몇 해 전, 이 집에서 아주 섬뜩한 일이 일어났거든. 그 일은 세상을 무려 세 번이나 놀라게 만들어.

1981년 8월 4일 밤, 용산경찰서. 베테랑 형사인 최 반장이 그날 당직을 서고 있었어. 그때 관할 파출소 순경에게 급히 와 달라는 전화를 받은 최 반장은 형사 둘을 데리고 현장으로 갔어. 도착한 곳은, 바로 아까 사진으로 본 그 창살집이야. 최 반장의 이야기를 들어볼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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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할 파출소로부터 전화가 왔는데, 보름 동안 소식이 없고 전화도 안 받으니 이상해서, 자꾸 친척되는 사람이 파출소에 와서 내용을 좀 알아봐 달라 해서. 파출소 직원이 문을 박차고 들어가 보니까, 마루에 피가 많이 엉겨있더라. 변사 사건 같으니까 좀 나와주십사 하는 그런 내용이었어요."
-최용섭, 당시 용산경찰서 형사계 4반장

최 반장이 가보니, 대문은 강제 개방돼서 활짝 열려있어. 그런데 좀 이상해. 파출소 경찰들이 집안으로 안 들어가고, 대문 밖에 서있어. 무슨 일이길래 다 나와있나, 의아해하며 최 반장이 집안으로 들어가. 그리고 평생 잊지 못할 광경을 목격하게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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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들어가 보니까 우선. 뭐라고 할까 아주… 과격하게 말하면 공포분위기이고 스산한… 왜냐하면 복도에 적색 카펫을 깔고 양쪽 방에 불교 양식, 탱화 같은 게 붙어있고. 등을 빨간색 미등으로 쫙 켜 놨기 때문에 아주 엄숙하면서도 무서운 분위기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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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10m 정도 되는 복도를 쭉 따라 들어가서 좌측으로 딱 구부러지니까 계단이 올려다 보이는데… 금방 육안으로 봐도 피가 엉겨 있었어요. 이미 마른 상태지만도 아주 심하게, 아주 굉장한 양의 출혈 흔적이 마루에 엉겨 있고 둘러보니까 핏물이 오른쪽 방문 쪽으로 걸쳐 있어요. 방으로 들어가 보니까 사체가 벌써 부패가 돼서, 분비물이 흘러나오고 피가 엉겨 있고 악취가 그냥 엄청나게 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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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얇은 이불 같은 게 덮여 있었어요. 덮여 있는데, 시체가 두 구가 보여요. 공의(의사)를 불러와라 사체 검시를 위해서. 근데 돌아보니까 아무도 따라 들어온 사람이 없어요. 나중에 안 얘기지만, 들어올 때부터 분위기에 압도돼서 무서워서 못 들어왔다 그런 얘기를 하는데…"
-최용섭, 당시 용산경찰서 형사계 4반장

직업이 경찰인 사람들도 못 들어갈 정도로, 무서운 공포 분위기였던 사건 현장. 이 집은 구조가 굉장히 특이했어. 방이 엄청 많았는데, 1층에만 무려 10개의 방이 있었어. 방들은 미닫이 문으로 아주 복잡하게 연결돼 있어. 이 집을 가본 사람들은 "마치 미로 같다"고 말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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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신이 발견된 곳은, 계단 옆 피아노방. 시체의 옷차림을 봐선 둘 다 여성이야. 머리엔 둔기에 맞은 흔적이 여러 군데 있어. 사정없이 내려친 거지. 심지어 목에는 나이론 끈으로 조른 흔적이 있어. 일종의 확인 사살을 한 거야. 아주 처참해.

계단에 있는 핏자국을 보는데, 다른 흔적이 또 보여. 계단 혈흔에 찍힌 슬리퍼 자국. 누군가 피가 고인 계단을 밟고 2층으로 올라갔다는 의미야. 2층도 살펴봐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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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라가 보니 2층도 방이 많아. 슬리퍼 자국은 복도 끝방으로 이어졌어. 방문을 여는데, 컴컴한 방 가운데 이불이 깔려있어. 그리고 그 이불 밑에 뭔가 보이는데 좀 작아. 어린 여자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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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에 발견했을 땐 1층에 있는 방에 사체 두 구만 발견해서 두 사람만 죽은 줄 알았는데요. 감식을 하면서 족적을 따라가 보니까 족적이 끝나는 방에 어린애가 죽어 있더라고요."
-최용섭 형사

범행 수법은 같았어. 머리를 둔기로 때리고, 전깃줄로 목을 졸랐어. 이 집에서 세 명의 여자가 잔혹하게 살해된 거야.

▲ 재력가 윤노파의 죽음

피해자들의 신원은 바로 밝혀졌어. 1층에서 발견된 시신은, 이 집의 주인 71세 윤 모씨야. 편의상 '윤노파'라고 부를게. 윤노파와 함께 발견된 시신은, 가정부로 일하는 19세 강 양. 그리고 2층에서 발견된 아이는 윤노파의 수양딸이었어. 나이는 불과 6살이야.

그런데 이 윤노파. 보통 사람이 아니야. 당시 사건을 보도한 기사가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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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운명점 못 친 천의 얼굴 가진 여걸"
"비명에 간 10억대 윤노파"
"'관운'에 신통한 점술…금광 여관 하며 치부"
"불우이웃돕기 정치에도 관여…불교계에선 대모 역할"

윤노파는 생전 신통한 점술가이자, 자산가였어. 사람들은 윤노파를 '윤보살'이라 불렀대. 어린 나이에 금강산에 올라 도를 깨우쳤다는 윤노파는 정재계에 용하기로 소문나서 집 앞에 고급 승용차가 줄을 섰대. 특히 윤노파가 '관운'을 잘 봤어. 선거에 당선될 수 있을지 궁금해하던, 이름만 대면 알만한 사람이 하루가 멀다 하고 윤노파를 찾아와. 윤노파는 아무나 만나주지도 않아. 윤노파가 오케이 한 사람만 이 집에 들어갈 수 있어. 윤노파는 남자는 만나주지 않아서, 점을 보기 위해선 부인이 대신 들어가야 했어. 복채도 어마어마해. 윤노파는 복채로 수백만 원, 많게는 천만 원 이상까지도 받았대. 그 당시 짜장면 한 그릇은 500원, 1969년 발행된 국민복권 1등 당첨금이 500만 원이었어. 그러니 복채가 집 한 채와 맞먹는 가격이지.

윤노파는 이렇게 번 돈으로 사업을 했어. 금광사업, 숙박업, 운수업까지, 손 대는 것마다 대박이야. 그렇게 쌓은 재산이 그 당시 돈으로 10억 원이 넘었대. 지금으로 치면 수백억 원대야. 돈을 잘 벌기만 하는 것도 아니야. 쓰는 것도 시원시원해. 불교계 발전을 위해 거액을 내놓기도 하고, 불우이웃돕기나 장학사업에도 앞장섰어. 당대의 여걸이자, 인정 많은 할머니. 그게 윤노파에 대한 당시 평가였어. 그런데 그 신통한 능력으로도 윤노파는 자신의 운명은 헤아리지 못했어.

경찰은 대대적으로 수사본부를 꾸리고 수사에 돌입했어. 먼저 범행이 일어난 시기를 알아봤어. 시신 상태를 봤을 때 사망한 지는 오래됐어. 이때만 해도 과학수사가 그렇게 발달하지 않은 때라, 정확히는 알 수가 없어. 대신 이것에 주목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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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관에 쌓인 신문이야. 가장 밑에 깔린 신문이 7월 23일 자야. 그때부터 신문을 못 읽었다는 뜻이니, 그럼 범행일은 7월 22일일 가능성이 높아. 또, 가정부 강양은 매일 사야 할 물건을 메모해 뒀는데, 마지막 메모 역시 7월 22일이었어. 이를 토대로 경찰은 7월 22일에 범행이 일어났다고 추정했어. 시신이 발견되기 13일 전이야. 그럼 범행 시각도 특정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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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방에 TV가 켜져 있었어요. TV가 켜 있고 선풍기가 계속 돌아가고 있었는데요. 그런 걸로 봐서는 그 당시만 해도 TV가 주간엔 없고 야간에만 방송을 할 때니까. 그럼 대개 12시경이면 끝나잖아요. 근데 TV가 켜 있다고 하면 TV 방영 시간에 피살된 것이 아닌가 이렇게 해서, 피살자는 7월 22일 6시부터 12시 사이에 피살된 것이 아닌가…"
-최용섭, 형사

범행 날짜와 시간까지 얼추 나왔어. 이제 용의자를 추려야 해. 우선 한 날 한 시에 여자 세명을 잔혹하게 살해했으니, 여자보단 힘이 센 남자일 가능성이 크겠지. 혼자보단 두 명 이상일 가능성도 있고. 그리고 사건 현장엔 금품들이 그대로 남아 있었어. 금품을 노린 강도 살인보다 원한에 의한 범죄일 가능성이 높아. 경찰은 면식범일 거라 생각했어. 쇠창살이 둘러싼 집은 아무나 못 들어오는데, 외부인이 침입한 흔적도 없었어. 안에서 누가 문을 열어줬다는 거지. 그럼 범인은 윤노파와 아는 사이라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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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판단할 만한 또 다른 이유가 있어. 시신이 머리를 가격 당한 흔적, 직경 3cm의 함몰흔적이 여러 개 발견됐어. 흉기는 망치야. 피 묻은 망치가, 시신이 있던 피아노방에서 발견됐어. 조사해 보니, 이 망치는 이 집에 있던 망치였어. 그리고 피해자들의 목을 조른 나이론 끈은, 이 집 뒤뜰에 있던 빨래줄이야. 또 현장에서 발견된 피 묻은 장갑도 가정부 방에 있던 걸로 밝혀졌어. 범인은 이 집에 있는 물건들로 범행을 저질렀어. 처음부터 살인을 목적으로 그 집을 들어갔다면 뭔가 챙겨갔겠지. 우발적으로 발생한 범행, 집안의 물건들로 살인을 저질렀을 가능성이 커.

이 집 내부는 굉장히 복잡해서 불을 켜지 않으면 대낮에도 컴컴한 집이야. 그런데 집안 곳곳에 있는 물건들을 찾아서 범행했다? 집안에 뭐가 있는지 잘 아는 사람, 범인은 이 집에 아주 익숙한 사람일 거라 생각했어. 이 사건을 오래 분석한 범죄심리 전문가의 이야기를 들어볼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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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이하다는 거죠. 소위, 살인 작업을 두 번에 걸쳐서 했다는 거죠. 끈이라든가 줄을 가지고 와서 목을 감아서 '확인 사살을 했다'라고 볼 수 있는 거죠. 그 사람들 중에서 한 명이라도 살아남는다면 자신의 정체가 드러날 수 있다라고 하는 두려움. 거기다가 이불까지 덮어놓을 필요는 없단 말이에요. 심리적 원인에 의해서 그런 행동을 하는데, 첫 번째는 원래 알던 사람이기 때문이에요. 우리가 통상 가족 간에 발생되는 사건 같은 경우는, 부모를 살해하거나 이런 경우에는 덮어놔요. 보기 싫다는 거지, 보기가 두렵다는 거죠. 또 하나는 예컨대, 본인의 행동에 대한 어떤 그 공포심. 시신이 '자기를 바라보고 있다'라고 하는 두려움, 이런 거 때문에 덮어놔요. 그래서 경찰이 초기 단계에서 수사를 하면서 이건 면식범임에 틀림이 없다…"
-오윤성, 범죄심리학자

현장은 범인이 누군지 가리키고 있어. 피해자와 가깝고, 이 집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라고.

▲ 돈 때문에 저지른 우발적 살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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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은 세 명의 용의자를 추렸어. 먼저 윤노파의 운전기사 이 씨. 45세 남자로, 윤노파를 마지막으로 본 사람이야. 일당 만원씩 받으며 윤노파가 외출할 때 차를 운전했는데, 범행 추정 당일 저녁 8시에 퇴근했어. 그 후 윤노파는 살해된 채 발견됐어.

두 번째 용의자, 범행 현장을 처음 발견하고 신고한 조카며느리 고 씨야. 윤노파는 평생 결혼을 하지 않았어. 다른 형제들은 모두 세상을 떠난 상태야. 만약 윤노파가 사망한다면 거액의 재산이 조카들에게 상속돼. 고 씨의 남편도 상속자야.

세 번째 용의자, 얼마 전까지 가정부로 일했던 박 씨야. 34세 여성인데, 박 씨는 단순한 가정부가 아니라, 윤노파의 수양딸이었어. 오랫동안 집안일을 해 왔는데, 6개월 전에 갑자기 일을 그만두고 집을 나갔대. 박 씨의 어린 딸이 병에 걸렸는데 윤노파가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았대. 결국 딸이 사망했고, 감정의 골이 깊어졌다고 해.

그럼 윤노파를 살해한 범인은 누구일까? 사건발생 2주 후 경찰은 수사결과를 발표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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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인은 조카며느리 고 씨였어. 경찰은 고 씨의 자백과 여러가지 정황 증거를 통해, 고 씨가 윤노파를 죽인 범인이라 발표했어.

"어머니보고 아파트 사달라고 했더니 아파트 못 사주겠대요."
"어머님만 죽이고 저도 죽으려 했는데. 나도 모르게 그렇게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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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진 속 두 사람. 왼쪽이 고 씨고 오른쪽이 생전 윤노파야. 두 사람이 처음 만난 건 22여 년 전이야. 평생 결혼하지 않았던 윤노파에게는 친아들처럼 여기는 조카가 있었는데, 그 조카와 결혼한 사람이 고 씨야. 의사아버지를 둔 고 씨는, 서울대를 졸업한 엘리트 여성이야. 학벌 좋지, 미모 출중하지, 고 씨가 마음에 쏙 든 윤노파는 조카를 소개시켜 줬어. 그다음부터 속전속결, 두 사람은 만난 지 6일 만에 결혼했어. 그렇게 고 씨는 윤노파를 '어머니'라 부르며 22년간 모셨어. 그런데 지금은 살인범으로 지목된 거지.

경찰은 고 씨를 불러 그날의 행적을 추궁했어. 그런데 자꾸 진술을 바꿔. 무려 12번이나 번복했어. 다른 용의자들의 알리바이는 확인됐는데, 고 씨만 말이 안 맞아. 수상하지. 그래서 경찰은 고 씨를 연행해서 집중 조사하기 시작해. 그러자 의심스러운 정황들이 하나둘씩 드러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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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여인의 입장에서는 바로 그 윤노파를 굉장히 떠받들 수밖에 없는 그런 상황이었죠. 그래서 윤노파의 사진을 집에다 걸어놨다는 거죠. 근데 사건이 발생되고 난 뒤에 시신이 발견되기도 전에 그 사진을 떼어놨다는 거예요…. 또 핵심적인 게 뭐냐면, 매달 25일이 되면 윤노파가 현금을 봉투에 넣어서 7만 원 정도를 줬다는 거죠. 그럼 7월 25일에 갔었어야죠. 자기가 돈을 받는데, 전화도 하고. 그러면 찾아갔었어야 되는데 안 갔다는 거. 이것도 굉장히 경찰의 입장에서 보면 수상하게 보는 그런 점 중에 하나였습니다."
-오윤석, 범죄심리학자

10년 넘에 걸어둔 사진을 떼어놓고, 돈을 받는 날에 찾아가지도 않았어. 의심스러운 점은 하나 더 있어. 윤노파의 집에 진입하기 위해 대문을 강제 개방했었을 때, 고 씨가 길바닥에 털썩 주저앉더니 "아이고 이를 어째 어머니가 돌아가셨네"하며 길에서 대성통곡했대. 들어가서 시신을 확인하기 전인데 말야. 경찰은 단정했어. 범인은 고씨라고.

그렇게 고 씨를 추궁하자, 고 씨는 자기가 범인이라고 자백했어. 고 씨가 진술한 그날 밤의 상황은 이래.

7월 22일, 저녁 8시 반. 고 씨는 윤노파의 집을 찾아가. 윤노파와 가정부 강 양, 수양딸 수경이는 안방에서 TV를 보고 있었어. 눈치를 살피던 고 씨는 윤노파에게 전에 사주기로 했던 아파트 언제 사줄 거냐 물었어. 윤노파의 반응은 차가웠어. "너희한테는 10원 한 장도 못 준다"는 윤노파의 말에 실망한 고씨는 감정이 격해졌어. 서러움이 북받친 고씨가 안방을 뛰쳐나가. 그리고 범행이 이뤄졌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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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뼈를 굵은 뼈가 되도록 키워놓으면 하나 도와주는 놈 없고, 뜯어가는 놈만 있다고 화를 내어 야속하고 서글픔이 북받쳐 차라리 죽이고 나도 죽으면 애들이나 유산을 받아 잘 살게 해 주겠다고. 범행을 결심하게 된 것입니다."
-경찰 발표 내용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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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평 무허가 슬레이트 건물. 고 씨는 여기에 살았어. 결혼 전에 윤노파가 "결혼하면, 미국 유학도 보내주마", "내 재산도 너희 부부한테 물려줄게" 했지만,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어. 무려 22년 동안 몸종 노릇을 하다시피 했는데, 남은 건 이 무허가 슬레이트집 한 채뿐이었다는 거야. 그 와중에 윤노파가 전재산을 불교계에 바치려고 한다는 이야기까지 들렸어. 고 씨는 윤노파에 대한 배신감, 원망에 범행을 저질렀다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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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눈이 뒤집혔나 봐요. 죽고 싶어요. 죽여주세요 제발…"

고 씨의 집에서는 결정적인 증거도 발견됐어. 장롱 안의 베개를 뜯어봤더니 이런 윤노파의 패물들이 나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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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씨가 자백했고, 증거도 나왔어. 경찰은 고 씨를 강도 살인 혐의로 바로 구속했어. 며칠 후, 전 국민의 관심 속에 현장 검증도 진행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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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틀 후 고 씨는 검찰에 송치됐고, 검사 앞에서도 순순히 범행을 인정했어. 이제 남은 건 재판뿐이야. 사실 판결은 정해진 거나 다름없어. 어머니 같은 사람을, 6살 아이까지 잔혹하게 살해했으니. 이건 사형을 피하기 힘들어.

그런데 이 사건 때문에 세상이 세 번 놀랄 거라 했잖아?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일이 일어나.

▲ 뒤집은 자백

1981년 9월 28일, 고 씨의 1차 공판일. 법정엔 방청객으로 가득 찼어. 포승줄에 묶인 고 씨가 등장하는데, 고 씨가 제대로 허리도 못 펴고 구부정한 모습이야. 그리고 판사 앞에서 놀라운 말을 해.

"판사님, 저는 억울합니다. 저는 그날 어머니댁에 가지도 않았어요. 전 아무도 죽이지 않았어요."

고 씨가 본인의 진술을 180도 뒤집었어. 자백도 하고 현장검증도 했는데, 이제 와서 범인이 아니라는 거야. 고 씨 변호사는 이렇게 말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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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만일 경찰에서 진술하고 자백한 대로 재연(현장검증)을 하지 않고 딴소리를 하게 되면 다시 끌려와서 아주 그냥 너 죽을 줄 알아라. 그동안엔 전기고문까진 하지 않고 물고문, 폭력으로 했지만, 이젠 마지막 단계가 하나 있다. 그것은 전기고문이다. 전기고문하면 넌 가버린다. 이렇게까지 협박을 당했다는 거예요."
-김형준, 고 씨 변호사

경찰의 고문으로 인한 허위 자백이었다는 거야. 고 씨가 연행됐을 때, 경찰이 고 씨를 이상한 곳으로 데려갔대. 시내에 있는 한 호텔이었는데, 그곳에서 강도 높은 조사를 받았어.

"고 피고인은 당초 경찰은 며칠씩 잠을 재우지 않고 끌고 다니다가 나중에는 옷을 벗기고 물을 끼얹으며 발로 차고 때리는 등 고문하면서 우발적으로 범행했다고 자백하면 '4-6개월이면 나올 수 있다'라는 말을 해 이를 믿고 각본대로 인정했다고 했다. 검찰에서의 2회 진술 이후에 범행을 부인하자 형사들이 구치소로 찾아와 높은 분이 정책적으로 다루라고 했으므로 '다시 데려다 전기고문할 수 있다'고 위협했으며 현장검증 전에는 기자들이 물으면 '속이 후련하다'라고만 대답하라고 윽박질러 겁에 질려 아무 말도 못 했다고 진술했다."
-1차 공판 내용을 담은 기사 中

각종 고문과 강압 수사를 주장한 고 씨. 그래서 허리와 다리를 크게 다쳤다고 했어. 며칠씩 잠도 안 재웠고, 참다못해 결국 거짓 자백을 했다는 거야. 법정은 난리가 났어. 고문받은 게 사실이라면, 자백이고 뭐고 인정을 못 받아.

고 씨의 취조를 담당했던 하 형사가 증인석에 나와 "고문은 말도 안 된다"고 펄쩍 뛰었어. 용산경찰서장도 바로 반박 성명을 발표했어. "피고인이 법정에서 주장한 내용은 실로 터무니없다. 수사 과정에서 고문은 절대 없었다"라고.

누구의 말이 진실일까? 아직 몰라. 그런데 사실로 드러난 것도 있어. 경찰은 고 씨를 임의동행 형식으로 데려가서, 여러 곳을 옮겨 다녔어. 경찰서 지하실, 파출소, 호텔까지. 영장도 없이 13일을 붙잡아 둔 거야. '잠을 재우지 않고 고 씨에게 진술을 강요했느냐'는 판사의 질문에 하 형사는 "고 씨는 참선을 자주 해서 며칠 잠을 안 자도 괜찮다고 했다"라고 황당한 대답을 했어. 결국 밤샘조사를 시인한 셈이야.

이 재판은 진범을 밝히는 것 말고도, 판단할 게 하나 더 있어. 목적을 위해, 잘못한 수단을 사용해도 되는가에 대한 거야. 관행처럼 행해지던 경찰의 수사 방식이 심판대에 서게 된 거야. '윤노파 피살사건'이, 수사 2개월 만에 '고 씨 고문사건'으로 바뀐 거지.

▲ 조작된 증거, 절도범이 된 경찰

경찰과 검찰은 좌불안석이야. 그런데, 엎친데 덮친 격으로 또 다른 일이 터져. 이 사건의 물증, 고 씨 집에서 발견된 윤노파의 패물. 그게 알고 보니까, 고 씨가 훔친 게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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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도 살인범일 수 있으니까 재물 강취해 간 것이 있나 확인해 보라고 해서, 캐비닛이든 장롱을 뒤져보기 위해서 수색을 하려고 들어갔습니다. 들어갈 때 조카며느리, 신고한 고 씨가 제일 가까운 친척이고 서울에 살기 때문에 고 씨를 입회시켰죠. 일견 보기에 값어치 나가는 게 몇 개 나왔는데, 이것을 그냥 놔둔 상태에서는 (분실될 수 있으니) 현장은 이미 공개됐기 때문에 '이것을 당신이 가지고 있으시오'라고…"
-최용섭 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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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을 당신이 잘 보관하시오' 해서 자기 백에다 넣고 있다가 어디 보관할 데도 마땅치 않고 해서 베갯속을 뜯어 그 속에 감춰놓은 것뿐이지 자기가 때려죽여도 패물을 가져다가 거기다 놓은 건 아니라는 거죠."
-김형준, 고 씨 변호사

고 씨가 윤노파의 패물을 훔친 게 아니라, 경찰이 '잘 보관하라'고 해서 집안 깊숙이 숨겨둔 거라는 거야. 그런데 이게 졸지에 고 씨의 절도 증거가 됐어. 더 충격적인 건, 사실 경찰도 알고 있었다는 거야. 고 씨가 패물을 훔친 게 아니라고 윗선에 보고도 했대. 그런데 돌아온 답은 이거였어.

"현장을 수색했던 경찰관 최용섭에게 사실 여부를 확인하였더니 다른 것은 잘 모르겠으나 그중 시계를 피고인에게 보관시킨 것은 틀림없다고 하여, 피고인의 진술이 사리에 합당한 것으로 생각되어 사실대로 조서를 작성하려고 하였으나, 상부에서 피고인이 살인한 것만은 틀림없으니 패물을 살인 직후 강취하여 간 것으로 하더라도 크게 무리하지 않을 것이니 그렇게 진술을 받으라고 하였다."
-1심 판결문 中

패물을 훔치지 않았다는 걸 알면서도, 조서를 조작한 거야. 최반장은 결국 증인석에 섰고, 양심에 따라 사실대로 이야기했어. 최반장의 입장에선 쉬운 일이 아니었어. 경찰이 곤란해지는 일이니까.

경찰은 완전히 사면초가야. 고 씨는 자백을 뒤집었고, 유일한 증거는 조작된 걸로 밝혀졌어. 이제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결정적 증거를 찾아야 해. 경찰은 증거를 찾기 위해 난지도 쓰레기장까지 뒤져. 하루에 40만 원이나 하는 중장비도 동원했어. 하지만 아무런 성과가 없었어. 그런데 그때, 이 상황을 반전시킬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와. 발신지는 시내에 있는 한 은행이었는데, 어떤 남자가 윤노파의 예금을 찾으러 왔다는 전화였어. 은행에 와서 이걸 내밀더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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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명으로 되어 있는 세 장의 예금증서야. 확인해 보니, 이 예금증서는 사망한 윤노파의 것이었어. 누군가가, 윤노파 집에서 이걸 빼돌린 거지.

"경찰은 그 당시에 정말 눈이 반짝 뜨인 거죠. 만약 이 예금증서를 현금화하려고 했던 주체가, 고 씨나 고 씨의 가족이라든가, 이런 것들이 만약에 밝혀진다면, 사건이 해결돼 버리는 거죠."
-오윤성, 범죄심리학자

하지만, 다른 경우의 수도 있어. 예금증서를 빼돌린 사람이 고 씨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라면, 범인은 고 씨가 정말 아니라는 거야. 그럼 고 씨의 무죄를 입증하게 돼. 경찰은 기대감과 불안감을 동시에 안고, 은행에 들이닥쳤어. 그리고 이 예금증서를 들고 있는 60대 남자의 신병을 확보해.

그 60대 남자의 취조를 맡은 하 형사가 예금증서를 누구한테 받았냐고 물었어. 그는 공사대금을 받을 게 있어서 대신 받은 거 대답했어. 그래서 이 남자에게 예금증서를 줬다는 사람도 연행해 왔어. 그런 식으로 예금증서가 흘러온 과정을 꼬리에 꼬리를 물어 조사했어. 그러던 와중에, 서울 지검으로 한 남자가 윤노파 사건 담당 검사를 만나고 싶다고 찾아왔어. 그는 그 예금증서를 자기가 처음으로 받았다고 했고, 그걸 자기한테 준 사람이 누군지 밝혀. 그 사람 때문에 세상은 다시 한번 발칵 뒤집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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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노파 예금증서, 경관이 훔쳤다"
"사건을 맡아 목록작성 중 빼내 사채업자에게 현금교환 부탁"
"문제의 예금증서 세 장은 윤노파 사건의 초동수사를 했으며 예금통장 등에 대한 목록작성 책임을 맡았던 용산경찰서 수사과 하 형사가 훔쳐내 유출시켰다는 사실을 밝혀내고 하 형사를 절도와 직무 유기 혐의로 구속영장을 신청키로 했다. 이로써 윤노파의 예금증서는 윤노파 살해범과는 관련이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당시 사건 내용을 담은 기사 中

하 형사는 사건 담당 경찰이야. 현장 검증 때도 고 씨 바로 옆에 있던 사람이야. 예금증서 나타났다고 신고가 들어왔을 때, 하 형사도 출동했어. 그리고 연행 후에 취조도 하 형사가 했어. 다 연기였던 거야. 도둑질한 사람한테, 도둑을 잡으라고 한 거야. 하 형사는 왜 피해자 물건에 손을 댄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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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말 하면 안 믿을지 모르겠지만 귀신이 씌었습니다"

하 형사는 구속됐고, 이 일로 경찰서장을 비롯한 네 명의 간부가 직위해제 됐어. 고양이한테 생선을 맡겼다고, 경찰을 향한 국민들의 분노와 조롱이 쏟아졌어. 경찰 역사상 가장 치욕스러운 일이 벌어진 거야.

▲ 고 씨의 무죄 판결

이듬해 1월, 마침내 고 씨의 1심 선고일이야. 법정 안에는 방청인과 기자들이 가득해. 고 씨는 구부정한 자세로 재판장에 들어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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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사가 판결문을 읽어 내려가. 중간쯤 낭독했을 때, 고 씨가 갑자기 흐느끼기 시작해. 판사가 이런 판결을 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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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7일 영장이 발부되기까지 부당하게 신체가 장기 구금됐다…형사소송법 제325조 후단에 의거, 무죄의 선고를 한 것이다."

재판부는 고 씨의 자백이 강압에 의한 거라고 인정했어. 사실 고 씨의 진술은 현장 상황과 일치하지 않은 게 많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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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씨는 오른손에 면장갑을 끼고 살인을 저질렀다고 진술했어. 근데 이 사진은 소파 커버에 찍힌 피 묻은 면장갑 자국이야. 분석 결과, 왼손으로 밝혀졌어.

이상한 점은 또 있어. 고 씨는 윤노파와 가정부를 쓰러뜨린 후 다리를 잡고 피아노방으로 끌고 갔다고 했어. 그럼 다리를 잡고 끌고 들어갔으니, 머리의 방향은 방의 입구 쪽에 있어야 자연스럽지. 그런데 현장은 정반대야. 시신의 머리는 방 안쪽을 향하고 있었어. 그 밖에도, 진술과 현장이 맞지 않은 게 한 두 개가 아니야.

이럴 때 적용되는 형사소송법 원칙이 하나 있어. "의심스러운 것은 피고인에게 유리하게"라고. 확고한 증거가 없다면 유죄를 선고해서는 안 된다는 거야. 고 씨에게 무죄판결이 내려진 이유야.

▲ 전화위복

하루아침에 경찰에서 절도범이 된 하 형사. 업무상 횡령죄로 1년 6개월의 실형을 받게 됐어. 그 후,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나. 한 중학생이 경찰서에 와서, 돼지저금통을 건네며 "이거 하 형사 가족들을 위해 써주세요"라고 했어. 여기서 끝이 아니야. 금반지를 내놓은 가정주부, 익명의 돈봉투를 건넨 남자까지, 하 형사 가족을 위한 도움의 손길들이 이어져.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죄는 밉지만 사람은 미워하지 말자는 말이 있잖아? 하 형사의 아내와 어린 두 아들을 위해 모인 성금이 무려 191만 원이었대. 요즘은 무슨 일이 벌어지면 연좌제처럼 가족들까지 다 그런 사람 취급을 받는데, 그때는 좀 달랐어. 사람들의 도움으로 길거리에 나앉을 뻔한 하 형사의 가족들은 전셋방이라도 하나 얻어 살 수가 있었어.

그리고 하 형사 사건은 생각지 못한 변화를 불러와. 일선 경찰들의 열악한 현실이 알려진 거야. 당시 형사의 봉급은, 초봉이 12만 4천 원이었어. 20년 근무해도, 23만 5백 원 밖에 안 됐어. 결국 국회에서 형사들의 처우를 현실화하기로 했어. 하루에 2500원이었던 수사비는 4배 인상됐고, 수사용 승용차, 미니 버스도 지급됐어. 전화위복이었지. 경찰 모두에게 치욕을 안긴 사건이, 경찰들의 처우를 개선시킨 거지.

이런 변화가 일어나는 중에도, 고 씨의 재판은 계속 됐어. 2심, 3심까지 모두 무죄가 나왔어. 대한민국 법원의 판결은, 이 사건 전과 후로 나뉜다고 해. 예전에는 자백만 있으면 무조건 유죄로 인정이 됐어. 그래서 나온 말이 '자백은 증거의 왕이다'야. 그런데 이 윤노파 사건을 계기로, 이런 수사 행태에 제동이 걸려. 확실히 증거가 있어야만 유죄가 인정되는 분위기로 바뀐 거지. 물론, 이 판결 후에도 고문 자체가 완전히 사라지진 않았어. 하지만 이 판결이 없었다면, 그런 행태가 조금 더 오래가지 않았을까.

고 씨는 2심 무죄 판결 후 보석으로 풀려나. 구치소 앞은 취재 기자들로 난리야. 천신만고 끝에 집에 온 고 씨는 만감이 교차해. 15평 슬레이트집이 이렇게 그리웠을 줄이야. 고 씨는 303일 만에 집으로 돌아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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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울하기만 한 303일간의 옥살이. 내 몸은 모진 고문으로 만신창이가 된 나머지 이곳저곳 쑤시지 않는 곳이 없다. 남편마저 아내가 세 사람이나 살해한 흉악범이란 손가락질과 함께 권고사직 당했다는 소문을 듣고는 까무라칠 뻔했다.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곳이라 여겼는데 나는 이제 집으로 돌아와 남편과 아이들의 간호를 받게 됐다. 더없이 편안한 이곳에서 나는 지금 이렇게 호소해 본다. 하느님 다시는 저와 같은 억울한 사람이 있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그리고 억지 고문에 희생되는 사람도 있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고 씨의 수기 中

▲ 윤노파 살인사건의 진범은?

그럼 윤노파 일가를 살해한 진범은 누구일까. 초반부터 범인을 단정지은 탓에 다른 증거는 다 사라지고 말았어. 유일하게 남은 건 폐가가 된 윤노파의 집이야. 그런데 이마저도 원일 모를 화재로 다 타버렸대. 현장 증거는 이제 영원히 없어진 거야. 하지만, 그 이후에도 진범을 쫓는 사람이 있었어. 바로 최용섭 형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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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나름대로 지금 신념은, 뭔가 있다 증거가 있다, 하는 신념이 있어요. 제 손에는 안 갖고 있지만 제가 가지고 있는 몇 가지 자료와 또 제보자의 자료, 그다음에 범인과 나중에 만났을 때. 우리가 얻는 증거는 분명히 있다고 봅니다."
-최용섭 형사

고 씨가 풀려난 후에도 최반장은 홀로 진범을 찾아다녔어. 그런데 이게 운명인 건지 우연인 건지, 이 사건의 공소시효 만료가 1996년이었거든. 최반장의 정년퇴임도 1996년이었어. 포기하지 않고 진범을 찾아다니던 최반장은 96년도에 정년퇴임을 했어. 그리고 윤노파를 살해한 진범은 지금까지도 밝혀지지 않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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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씨와 최반장, 그리고 하 형사까지. 세 사람은 많은 걸 잃었지. 하지만 제일 큰 피해자는, 범인의 정체도, 죽음의 이유도 알 수 없게 된 윤노파, 가정부 강 양, 그리고 어린 수양딸이야. 이들이 이 비극의 가장 큰 피해자가 아닐까.

이 사건은 경찰 역사에서 가장 치욕스러운 사건으로 꼽혀. 하지만 그 후에 많은 것이 바뀌었어. 현재의 우리나라는 세계 최고 수준의 치안을 자랑하는 나라야. 살인사건 검거율이 2020년 기준 97.2%, 거의 다 잡힌다고 봐야 하는 거야. 우리 경찰들은 과오와 실패를 딛고, 끝없이 노력 중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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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이야기를 들은 '오늘' 당신의 생각은?

(SBS연예뉴스 강선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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