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 '당신'에게 들려주고 싶은 '그날'의 이야기는, 지난 20일 방송된 '가을의 전설, 최동원' 편입니다. 이야기 친구로는 배드민턴 선수 이용대, 배우 신소율, 개그맨 김진수가 출연했습니다.(리뷰는 '꼬꼬무'의 특성에 맞게, 반말 모드로 진행됩니다.)
▲ 17이닝 노히트 노런, 슈퍼루키의 등장
때는 1975년 가을, 동대문에 위치한 서울운동장. 함성이 엄청나고 2만 6천 석이 관중으로 꽉 차있어. 경기장 밖에는 못 들어간 사람들이 바글바글해. 사람들은 '전국 우수 고교 초청 야구대회'를 보기 위해 경기장으로 모였어. 프로야구가 아직 없던 시절, 모든 종목을 통틀어 관중이 제일 많이 몰리던 스포츠가 바로 고교야구였어.
"제가 어릴 적 우상은 고교아구 선수들이었죠. 당시 고교야구 선수 인기가 지금의 이정후, 추신수, 류현진을 능가했어요. 1970년대 대한민국 스포츠는 고교야구로 시작해서 고교야구로 끝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봅니다."
-박동희 야구 전문기자, '스포츠 춘추' 대표
요즘으로 치면 아이돌 급의 인기야. 이날 여기 서울운동장에 모인 관중들은 한 선수만 바라보고 있었어. 바로 경남고등학교 2학년 투수야. 관중들이 왜 이 투수에게 주목하느냐, 전날 경기에서 9회까지 혼자 던지고, 무안타 무실점으로 승리한 '노히트 노런' 기록을 세웠거든. 이건 프로 투수도 평생에 한 번 할까 말까한 엄청난 기록인데, 이걸 그 경남고 투수가 해낸 거야.
근데 '노히트 노런'을 한 다음날, 그 선수가 또 경기에 나왔어. 전날 그렇게 던지고 이틀 연속 등판한 거야. 요즘엔 상상도 못 할 일이지. 이 날 경기 결과는, 2대 0 '완봉승'이야. 게다가 8회까지 노히트 노런이었대. 전날 경기부터 계산하면, 무려 '17이닝 노히트 노런'이야. 이건 한국 야구 역사상 전무후무한 일이야.
근데 여기서 끝이 아니야. 다음날 결승전에 그 투수가 또 나왔어. 무려 3일 연속 선발 등판이야. 이 경기의 결과는? 3대 2로 또 이겼어. 이번에도 그 투수는 9회까지 완투했어. 정리해보면, 3일 연속 등판에 '노히트 노런' 한 번, '완봉승' 한 번, '완투승' 한 번이야. 말도 안 되는 기록이지.
이후 이 선수에 대한 엄청난 수식어들이 쏟아졌어. '무쇠팔', '강철 어깨', '삼진 제조기', '경남고 폭주 기관차' 등등. 이쯤 되면 이 선수가 누군지 알겠지? 그래 맞아. 대한민국 레전드 투수, 최동원이야.
"신 같은 존재죠. 투수로서는 최고였으니까."
-한문연 前롯데자이언츠 포수
"한국 최고의 투수였으니까. 어릴 때부터 최고 선수고 던지면 이기고 우승하는 투수."
- 강병철. 前롯데자이언츠 감독.
"제가 어렸을 때 사실 동원이 형을 보면서 이렇게 야구선수 해야겠구나, 저한테 롤모델이었습니다. 모든 면이 저보다 한 수 위였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선동열. 前해태 타이거즈 투수
"최동원은 그라운드 안에서 슈퍼스타였습니다만 그라운드 밖에서도 슈퍼스타였어요. 지금 많은 젊은 야구팬들이 최동원의 이름 석 자만 알고 그의 기록만 알지, 그가 어떤 사람인지 잘 기억하지 못하거든요. 한국 프로야구 40년사에 유일하게 레전드라고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은 전 최동원 밖에 없다고 단언합니다."
-박동희 야구 전문기자
▲ 레전드의 탄생
이런 레전드는 능력이 타고난 걸까, 만들어진 걸까. 이건 최동원 선수의 어머니가 그리신 거야.
이게 뭔지, 직접 설명을 들어볼게.
"동원이 할아버지가 굉장히 운동에 관심이 많으셨어요. '그물은 내가 자갈치 시장에 가서 천막을 사와서, 내가 그건 책임을 지마' 하셨죠. 그 다음에 할머니는 공을 던지고 던지다가 천막이 찢어지면 그 뒤에 재봉틀로 박아서 '수선하는 건 내가 할게' 하셨고요. 아버지는 그 천막에 스트라이크 존을 하얀 페인트를 칠해서 표시하고. 그때 집에선 온수가 안 나와서, 항상 연탄불에 뜨거운 물을 덥혀서 목욕탕에 갖다 놓으면 샤워하고 그랬어요. 그건 항상 내가 담당하고…"
-최동원 어머니 김정자 씨
집 한 편에 최동원 전용 훈련장을 만들고 온가족이 뒷바라지한 거야. 제일 열성적인 사람은 아버지였대. 매일 밤마다 아들 잠자리까지 손수 봐 주셨대. 특히 어깨가 닿는 부분에 혹시라도 이불솜이 뭉쳐있진 않을까, 밤마다 아들 잠자리를 확인하신 거야. 게다가 아들의 어깨 보험까지 들었어. 우리나라 최초로 신체 보험에 가입한 선수래. "투수는 어깨가 생명이다, 그러니 매 순간 소중히 여겨야 한다" 아들에게 자긍심을 심어주고 싶었던 거야.
이런 아버지의 마음이 아들 입장에선 부담스러울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런데 전혀 아니었어. 최동원 선수는 아버지 말이라면 무조건 따랐어.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어.
"아버님께서는 사실 그렇게 완전한 몸을 가지고 계시지 못했어요. 6.25때 총상을 입어서… 젊음을 다 바쳐서 제 뒷바라지를 해주셨는데, 그 노력을 보람되기 하기 위해서 사실 제가 더 이를 악 물고 절제된 생활 속에서 야구를 했다고 생각해요. 더 열심히 안 할 수가 없었죠."
-1995년 최동원 인터뷰 中
아버지가 한국전쟁에서 총상으로 한쪽 다리를 절단하고 의족으로 생활하셨대. 그런데도 하루도 빼놓지 않고 아들 훈련을 챙겼어. 그리고 밤이 되면 통증이 심해서 끙끙 앓으셨대. 그럼 아들이 아버지 다리를 주물렀어. 그러고 나면, 아버지는 또 아들 어깨를 주무르시고. 최동원이 고교 최고의 투수가 된 건, 이런 아버지의 사랑이 바탕이 됐어.
최동원은 1977년 대학교에 입학하자마자 국가대표에 발탁됐고, 태극마크를 달자 마자 바로 슈퍼월드컵 세계야구대회를 제패했어. 한국 야구사상 첫 세계대회 우승이야. 그의 강철 어깨는 세계무대에서도 통했어.
최동원의 공은 구속이 엄청 빨랐어. 또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 같은 '폭포수 커브'가 일품이었지.
"사실 70년대에는 스피드 건이라는 것이 국내에는 없었습니다. 세계선수권대회 할 때 그 때 동원이가 (구속이) 150~152km/h 정도 나왔습니다. 우리가 그 당시에 동원이 커브를 표현하기를, '쟤는 오란씨다'라고 했습니다. '하늘에서 별을 따다, 하늘에서 달을 따다' 하는 CF송이 있지 않습니까. 그것처럼 하늘에서 떨어진다고…"
-김시진, 前삼성라이온즈 투수
하지만 최동원이 최고의 투수인 이유는 따로 있어. 최동원의 가장 큰 무기는 '강심장'이야. 그는 공을 던졌는데 홈런을 맞았다면, 다음에 그 타자가 다시 타석에 들어오면 아까 홈런 맞은 공을 똑같이 던졌어. 또 칠 수 있으면 쳐보라며. 이런 일도 있었대. 당시 경기가 과열되면 상대편 응원석에서 물병, 돌멩이, 술병 같은 게 날아왔어. 그럼 외야수들은 무섭기도 위험하기도 하잖아? 그때 최동원은 외야수들을 내야로 불러 들였어. 거기까지 공이 안 날아가게 하겠다며. 실력이면 실력, 배짱이면 배짱, 모든 게 특급 에이스였어.
그러던 어느날 최동원이 게임을 마치고 경기장을 나서는데, 메이저리그 스카우트 담당이 그를 불렀어. 토론토 블루제이스 스카우트들이었어. 맞아, 지금 류현진의 소속팀. 그 당시에 최동원을 영입하고 싶다고 적극적으로 러브콜을 보냈어. 그런데 최동원은 못 갔어. 바로 정치적인 이유 때문이었어.
한국 프로야구는 1982년에 출범했어. 그 3년 전인 1979년 전두환은 12.12 쿠테타로 군부를 장악하고, 1980년에 광주 민주화운동을 총, 칼로 진압했어. 그리고 그 해에 대통령 자리에 올랐으니, 권력은 잡았지만 민심은 최악이었지.
그래서 전두환 정권은 '3S 정책'을 펼쳤어. Screen(스크린), Sex(성), Sports(스포츠)로 국민들의 관심을 돌리고자 한 거야.
운동 경기만큼 사람들을 열광시키는 게 없지. 86아시안 게임, 88서울 올림픽 유치에 뛰어들었고, 82년에 프로야구도 출범시켰어. 그렇게 당시 6개 프로야구 구단이 만들어진 거야. 이럴 때 필요한 건 스타 플레이어였고, 당연히 최동원이 순순히 메이저리그에 가게 놔두지 않았던 거야. 결국 최동원은 고향 부산이 연고지인 롯데자이언츠에 입단했어.
최동원은 모두의 예상대로 롯데자이언츠의 간판 투수가 됐어. 그리고 대망의 1984년, 최동원 선수가 "타임머신을 타고 돌아가고 싶다"고 했던 바로 그 해야. 이제는 절대 재현될 수 없는 그런 일들이 그 해 야구장에서 벌어졌어.
▲ Back to 1984
최동원은 1984년 정규리그 100경기 중 무려 52경기에 등판했어. 혼자서 절반 이상의 경기를 책임진 거야.
'싫다, 아니다' 라고 말하지 않는 선수였어요. 최동원에게는 선발, 중간, 마무리라는 그런 개념이 없었어요. '내가 나와서 이길 수 있다' 하면 무조건 나왔어요. 역대 우리나라에서 투수 중에 유일하게 연투를 할 수 있었던 건, 그 선수 밖에 없지 않았나 싶어요."
- 강병철. 前롯데자이언츠 감독.
롯데자이언츠는 그 해 한국시리즈에 올랐어. 상대는 삼성라이온즈. 근데 객관적인 전력상 롯데에 비해 삼성이 한참 위 였어. 한국시리즈는 7전 4선승제로 진행되는데, 롯데는 이 중에 1승이라도 하는 게 목표였을 정도였대.
롯데가 믿을 수 있는 유일한 카드는 최동원 뿐이었어. 롯데의 계획은, 최동원이 1차전을 던지고 이틀 쉬고 3차전을 던지는데, 만약 그 때까지 1승이라도 거둬 5차전까지 간다면, 거기서 또 최동원이 던지는 거. 7차전까지 가는 건 생각조차도 안했대.
한 투수가 1, 3, 5, 7차전 다 나가는 건 말이 안되는 이야기지. 그런데 최동원은 이 계획을 듣고 피하지 않았어.
"알겠습니다. 한 번 해봅시다. 해야죠. 나 혼자만의 영광이 아니기 때문에, 그래도 고생해서 그 자리까지 갔는데. 거기에 톱이라는 자리 욕심 안 나겠습니까? 매일 매일 오는 기회가 아니기 때문에. 온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죠."
-최동원
드디어 한국시리즈가 시작됐어. 예정대로 1차전 선발로 최동원이 마운드에 올랐어. 결과는 4대 0으로 롯데가 이겼어. 최동원은 한국시리즈 최초로 완봉승을 기록했어. 바로 다음날 2차전, 최동원이 안 나오는 경기. 결과는 롯데가 졌어. 시리즈 전적 1대1이 됐어.
이번엔 부산에서 열린 3차전. 최동원이 다시 선발 등판했어. 경기 결과는 3대 2로 롯데가 이겼어. 9회까지 또 완투를 했어. 1차전 완봉승에 이틀 쉬고 나와서 3차전 완투승. 이날 최동원은 삼진을 12개 잡았어. 시리즈 전적 2대 1로, 롯데가 앞서 나갔어. 다음날 4차전, 최동원은 안 나왔고 7대 0으로 삼성이 완승을 거뒀어. 시리즈 전적 2대 2. 승부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어.
5차전 롯데 선발은 최동원. 그런데 3대 2로 롯데가 졌어. 최동원은 9회까지 던지고 완투패를 당했어. 최동원도 사람인데, 3경기를 완투했으니 얼마나 지쳤겠어. 이제 시리즈 전적 2대 3, 롯데는 벼랑 끝에 몰렸어.
다음날 6차전, 경기장 한 쪽에 이미 시상대가 준비돼 있어. 6차전에서 삼성이 이기면 우승이니까. 롯데는 7차전에 나가려면 무조건 이날 이겨야 해. 롯데 임호균 투수가 마운드에 올랐어. 근데 공 제구력이 너무 좋아. 롯데 타자들도 안타를 계속 뽑아내며 예상 밖의 선전을 펼쳤어. 그런데 갑자기 임호균 선수의 표정이 좋지 않아. 손가락 끝에 살점이 파이는 부상으로 더 이상 공을 던질 수 없는 상황이 된 거야. 감독은 그동안 쉬었던 투수들을 준비시켰어. 그런데 투수코치가 와서 이런 말을 전했어.
"감독님, 동원이가 하겠다는데요?"
결국 최동원은 6차전 구원투수로 5회 마운드에 올랐어. 결과는 6대 1로 롯데의 승리. "또 등판은 무리 아니였나"는 질문에 최동원은 이렇게 답했어.
"무리지만 그래도 팀이 이길 수 있다고 하면, 올해 마지막 시합이지 않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최대한 힘이 있는데 까지는 열심히 해서 저희가 노력한 만큼 성과를 얻기 위해서는 무리라는 걸 알죠. 알지만 나갈 수 있으면 나가서 끝까지 이겨야죠"
시리즈 전적 3대 3이 됐고, 마지막 7차전. 롯데 감독은 여러 명의 투수를 돌려쓰는 벌떼작전을 준비했어. 그런데 최동원이 또 나가겠다고 자진했어. 결국, 7차전 선발투수로 최동원이 결정됐어. 한국시리즈 5번째 출전, 3일 연속 등판이야. 이게 가능한 걸까.
그런데 7차전이 열리는 날 아침, 서울 하늘에 폭우가 쏟아졌어. 롯데팀 숙소에서는 환호가 터져 나왔어. 하루를 쉴 수 있으니까. 경기는 다음날로 연기됐고, 덕분에 최동원은 하루를 쉬고 마운드에 오를 수 있었어.
다음날, 운명의 7차전. 롯데의 우승은 최동원의 어깨에 달려있어. 그런데 첫번째 공부터 흔들려. 확실히 무리야. 결국 2회부터 점수를 내주기 시작했고, 6회엔 홈런까지 맞았어. 진짜 한계에 다다른 거야. 강심장 최동원의 표정이 일그러지기 시작해. 부모님은 이 모습을 애타게 지켜보고 있었어.
"숨이 옳게 안 쉬어지는 거예요. 공 하나하나 던지고 하는데 너무 무리해서, 다른 사람들 눈에는 안 보이는데 나한테는 입이 좀 삐뚤어지더라고 너무 피로해서. 우리 애를 좀 바꿔줬으면, 동원이를 좀 내려줬으면 하는, 더 큰 위기에 닿기 전에. 자꾸 저렇게 되면 동원이가 실망할까 봐. 더 힘들어할까 봐…"
-최동원 어머니 김정자 씨
감독은 이미 경기 초반부터 계속 "동원아, 이제 고마해라. 할 만큼 했다"고 말했대. 그런데 최동원은 "한 회만 더 해보겠습니다"라며 마운드에서 내려올 생각을 안 했어. 그런 최동원을 보는 동료들도 안타까운 마음을 감추지 못했어. 그 마음이 표현된 걸까. 7회초, 롯데의 공격이 시작되자 타자들이 신들린 듯이 방망이를 휘두르기 시작해. 점수를 3대 4 턱밑까지 추격했어.
그리고 7회말, 다시 최동원이 마운드에 올랐는데, 그 때부터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져. 지칠대로 지쳐서 공이 좋지 않았던 최동원이 재기량을 되찾았어. 그 상황에서 공이 다시 빨라지기 시작하고 '폭포수 커브'가 돌아왔어. 피칭이 완전히 달라진 거야. 그렇게 최동원은 7회말을 무실점으로 막았어. 야구는 끝날 때까진 끝난 게 아니야.
8회초 롯데의 공격 시작됐어. 1아웃 1, 3루 상황, 타석에 유두열 선수가 섰고 거기서 3점 홈런을 쳤어. 점수는 6대 4로 역전됐고 순식간에 흐름이 바뀌었어. 이제 막기만 잘 하면 돼.
드디어 운명의 9회 말. 마운드 위엔 여전히 최동원이 서있어. 2아웃 주자는 3루. 아웃 카운트 하나만 잡으면 롯데는 한국시리즈 우승이지. 모든 시선이 최동원을 향해 있어. 최동원은 힘차게 와인드업 해서 이를 악 물고 마지막 공을 뿌렸어. 마지막 타자는 헛스윙 삼진. 롯데자이언츠는 그렇게 1984년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했어.
우승이 확정된 후 동료들과 포옹하며 기뻐하는 최동원에게 기자가 다가가 물었어.
"최동원 투수, 지금 제일 하고 싶은 게 뭐예요?"
"자고 싶어요."
1984년 가을의 전설. 마운드 위에서 모든 걸 쏟아낸 27살의 최동원은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어. 한국 시리즈 7경기 중에 5경기에 나와서 4번을 완투하고 혼자서 4승을 했던 투수. 이건 영원히 깨질 수 없는 대기록이야. 이후에도 최동원은 특급 에이스답게 매년 두자리 승수를 올리며 최고의 선수로 명성을 떨쳤어. 최고의 자리에 오른 최동원, 그의 다음 행보는 무엇이었을까.
▲ 선수협의회 회장 최동원
롯데가 우승하고 4년이 지난 1988년 9월. 88올림픽 개막을 앞두고 온 나라가 축제 분위기였던 그날, 최동원은 여기저기 전화를 돌리고 있었어. 그것도 아주 은밀하게. 그리고 서둘러 대전의 한 호텔로 향했어. 강심장 최동원이 잔뜩 긴장한 표정이야. 잠시 후 버스가 속속 호텔에 도착했고, 우르르 사람들이 내렸어. 전부 프로야구 선수들이야. 다 합해서 140명이 넘어. 그날 그들은 왜 거기에 모였던 걸까. 바로, '선수협의회' 때문이었어.
비밀 모임의 정체는, 프로야구 선수협의회 창립 총회였어. 일본이나 미국 프로야구에는 선수 노조가 있는데, 당시 한국 프로야구에는 선수들의 복지를 위해 힘써줄 수 있는 그 어떤 단체도 없었어. 그래서 최동원은 선수협의회를 만들었고 회장에 이름을 올렸어.
"몇몇 선수들은 스타 소리 들으면서 연봉도 아주 높게 책정되고 계약금도 많이 받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몇몇 선수 빼고 뒤에 프로야구 유니폼을 입고 있는 선수들이 사실은 많습니다. 야구라는 건 단체 운동입니다. 더그아웃에 있고 2군에 있는 선수들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에 제가 제 자리를 지키고 있었고 제 이름 석자를 얻었습니다. 그러면 그 선수들의 연봉이 어떻게 되느냐, 말도 못합니다."
-최동원
당시 비주전과 2군 선수들은 연봉이 턱없이 낮은 건 물론이고, 장비 지원도 안 해줬대. 그러다 다치기라도 하면 바로 방출이야. 선수협의회는 선수들의 연봉 하한선을 올리고, 최소한의 생계를 위해 연금제도 만들려 했어. 선수협의회 회장 최동원은 "'나'가 아니라 '우리'라는 개념에서 시작한 것"이라 강조했어.
선수회가 결성된 직후, 구단들 반응은 어땠을까. 이런 대답을 내놨어.
"선수회 대의원 총회에 참가한 선수와는 재계약 하지 않는다"
"회비를 납부한 선수와도 재계약 하지 않는다"
"선수회와 관련해 타 구단에서 재계약하지 않은 선수를 받아들인 구단과는 경기를 갖지 않는다"
예상보다 거부감이 엄청났어. 하지만 최동원은 물러서지 않았어. 예정대로 대의원 총회를 강행했지만, 선수들이 오지 않았어. 구단들은 없던 훈련 일정을 갑자기 잡고, 선수들에게 각서까지 받았어. 선수들이 그걸 버틸 수 있었을까. 결국 선수회는 해체되고 말았어.
최동원의 심정은 어땠을까?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사실 선수들이 힘이 없지 않습니까? 또 처자식 거느리고 있다 보면 강한 외압이 들어오면 자연히 약해지는 게 이해는 합니다. 그러나 조금 아쉬웠던 건, 그때 좋은 체제를 마련해줬다면, 지금 후배들은 조금 더 나은 조건 속에서 아마 좋은 선수 생활을 하지 않을까. 제가 선배로서 그렇게 못해준 것이, 조금 더 강하게 밀어붙이더라도 했었어야 하는데 못 한 것을, 후배들 보기에 사실 미안해하는 감은 가지고 있습니다."
-최동원
그리고 한달이 지난 어느날 새벽, 최동원 집으로 기자의 전화가 걸려왔어. 삼성으로 트레이드 되는 게 맞냐고 묻는 전화였어. 최동원은 처음 듣는 소리에 깜짝 놀라 롯데 구단으로 달려갔어. 구단 관계자는 "최동원 선수 그동안 고생했습니다. 삼성하고도 얘기 끝냈습니다"라며 트레이드가 맞다고 했어. 당시 최동원은 삼성 김시진과 맞트레이드 됐어. 사실상 방출인 거야. 구단 측은 '팀 분위기 쇄신 차원'의 트레이드라 밝혔지만, 아무도 믿지 않았어. 다들 보복성 트레이드라고 생각했어.
최동원은 결국 자신의 뿌리라고 생각했던 고향팀을 떠났어. 이제 롯데의 최동원이 아니라 삼성의 최동원이야. 최동원은 유니폼은 달라졌지만 다시 마운드에 서서 씩씩하게 공을 던졌어. 하지만 더 이상 예전의 강철 어깨는 아니었어. 강속구는 힘을 잃었고 폭포수 커브는 예리함이 사라졌어. 아무리 강철 어깨라도 완투를 밥 먹듯이 했으니, 어깨가 닳을 대로 다 닳은 거야. 그렇게 1990년 가을, 최동원은 조용히 마운드를 내려왔어. 그 때 나이는 32세. 은퇴식 하나 없는 초라한 마지막이었어.
"그게 제일 안타까워요. 요즘 프로야구 선수들은 1년 뛴 팀에서도 은퇴식을 해줘요. 몇 년이 지나도 선수가 원하면 은퇴식을 해주는데, 대투수 최동원은 은퇴식이 없었어요."
-박동희 야구 전문기자
▲ 별을 쫓았던, 야구 그 자체였던 사람
최동원이 운동장에 다시 나타난 건 15년이 지난 2005년이야. 이번엔 한화이글스 유니폼을 입고 후배들을 가르치기 시작했어. 레전드 투수답게 특급 에이스를 키웠어. 바로, '괴물투수' 류현진.
사실 류현진은 팔꿈치 수술 후유증으로 입단 초기에는 부진했대. 그런데 류현진의 진가를 알아보고 개막전 선발로 추천한 사람이 바로 최동원 코치래.
이후에 최동원 코치는 한화의 2군 감독이 되어 후배들을 가르쳤어. 하지만 오래하지 못했어. 훈련 중에 사라지기도 하고, 선수들 이름도 자꾸 까먹고 멍한 모습을 보였대. 알고 보니, 최동원은 대장암 수술까지 받고 항암 치료 중이었던 거야.
최동원을 아는 사람들은 승부사답게 암과 싸워 이겨낼 거라고 믿었어. 그리고 최동원은 3년 만에 유니폼을 입고 다시 경기장에 나타났어. 2011년 7월 22일. 경남고와 군산상고의 레전드 매치 현장이었어.
수척한 모습의 최동원. 사실 그날 병세가 꽤 심각해서 경기장에 나가는 걸 병원에서도 말렸대. 그런데 최동원이 고집을 부렸대. 야구 유니폼이 입고 싶어서.
그리고 두 달 후, 병상에 누운 최동원은 눈이 막 감기는데도 안간힘을 쓰면서 자꾸만 뭔가를 보려 했어. 프로야구 경기가 중계되고 있는 TV야. 옆에 있던 어머니가 아들 손에 야구공을 가만히 쥐어주셨어.
"눈을 뜨려고 용을 쓰는데 잘 안되더라고요. 그래서 내가 부산에서 가지고 간 공을 손에 쥐어줬더니 있는 힘을 다해 그 공을 꼭 잡더라고. 임종할 때가 다 됐다고 선생님이 그러더라고요. 그래서 내가 머리도 만지고, 볼도 만지면서.. 동원아, 너 때문에 엄마는 너무 행복했다. 너로 인해서 엄마가 너무 행복한 시간을 많이 가졌다, 고맙다. 내 아들로 태어나줘서 너무 고맙다고.."
-최동원 어머니 김정자 씨
"한마디로 생각하면, 자기 자신을 챙기지 않고 모든 게 다 팀, 또 전체… 바보 같은 놈이라 표현하고 싶어요."
-김시진, 前삼성라이온즈 투수
무쇠팔 최동원은 그렇게 손에 야구공을 꼭 쥔 채로, 2011년 9월 14일 가을에 우리 곁을 떠났어. 그의 나이 53세.
최동원은 세상을 떠나기 두 달 전 쯤에, 평소에 친하게 지내던 기자를 만나 인터뷰를 했어.
"박기자, 내가 선수 시절에 그라운드에서 뭘 쫓아다녔는지 압니까?"
"글쎄요. 공 아닙니까?"
"내가 쫓아다녔던 건 공이 아니에요. 나도 그런 줄 알았어요. 하지만 나이가 들다 보니, 우리가 쫓은 건 하얀 야구공이 아니라 별이었단 생각을 해요. 별은 하늘에만 떠 있다고 별이 아니에요. 누군가에게 길을 밝혀주고 꿈이 되어줘야 그게 진짜 별이에요. 그래서 생각한 건데, 이제 야구계를 위해 나도 뭔가를 하려고 해요. 이젠 그냥 최동원, 이 최동원 이란 이름 석 자가 빛나는 별이 아니라. 젊었을 때 나처럼 별을 쫓는 사람들에게 길을 밝혀주는 그런 별이 되고 싶어요."
최동원이 그렇게 만들고 싶어했던 선수회는 2001년 후배 선수들에 의해 다시 만들어졌어. 덕분에 선수 보호 가이드라인이 생기고 처우도 많이 개선됐어.
야구는 '희생 번트', '희생 플라이' 같이 '희생'이란 단어가 있는 유일한 스포츠야. 팀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며 점수를 내는 게 야구지. 최동원은 야구 그 자체였어. 언제나 망설임 없이 자신을 희생하며 공을 던졌어. 야구에 최동원이 있듯, 우리가 사는 다른 분야에도 최동원 같은 존재가 있을 거야.
오늘도 묵묵히 길을 걷고 있는, 세상의 모든 최동원을 위하여.
'그날' 이야기를 들은 '오늘' 당신의 생각은?
강선애 기자
(SBS연예뉴스 강선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