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많은 참석자 중 눈길이 간 사람은 필립 터너 뉴질랜드 대사입니다. 터너 대사는 지난 2019년 청와대에서 열린 주한 외교단 초청 행사에서 우리나라에선 처음으로 동성 배우자인 이케다 히로시와 동행해 대통령을 접견했습니다. 원래 우리나라는 외국 공관원의 동성 배우자를 법적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에 따라 가족 비자 발급도 거부해왔었는데, 당시 터너 대사에게 처음으로 동성 배우자에 대한 가족 비자를 발급해줬던 겁니다.
2013년부터 이미 동성 결혼을 합법화한 나라에서 살고 있는 터너 대사로선 당연한 일이었겠지만, 동성혼 논의는커녕 공적 영역에서 성소수자 등을 차별하지 말란 취지의 차별금지법조차 수년째 공전을 거듭하고 있는 우리나라에선 당시 꽤 화제였습니다. 그 터너 대사가 우리나라에 부임한지도 벌써 4년째, 그가 보는 한국 사회의 소수자 차별은 어떤 모습일까 묻고 싶었습니다. 흔쾌히 인터뷰를 수락한 터너 대사와 간담회 시작 전 20여 분간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 뉴질랜드에는 소수자에 대한 차별을 금지하는 평등법이 있다. 제정 당시 어느 분야에서 가장 반대가 심했나?
"포괄적 차별금지법은 뉴질랜드에서 1993년에 통과가 됐습니다. 한 개인에 대한 차별을 포괄적으로 금지하는 법안인데, 특히 13개 요소를 명시하고 그것에 대한 차별을 무조건 금지하는 법안이었습니다. 피부색, 종교, 인종, 성별, 그리고 성적 지향 등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 법 자체는 통과할 때 우리 사회에 큰 이견이 없었습니다. 각계의 토론이 몇 년씩 이어지긴 했지만 큰 저항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기본권을 존중하고 차별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모두가 빠르게 인지하고 동의하는 근본적 가치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이후에 뒤따른 LGBT 이슈, 특히 동성혼의 합법화 문제는 국회가 다뤄야 했던 훨씬 더 논쟁적이고 분열적인 이슈였습니다. 포괄적 차별금지법은 법률로서의 체계로서의 의미를 가질 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인식, 사람들의 행동, 인권 규범에 대한 사회적 수용도가 전체적으로 올라가게 만들었습니다."
- 우리나라의 경우 포괄적 차별금지법에 대해 일부 개신교 집단에서 격렬한 반대가 이어지고 있다. 뉴질랜드에선 이런 의견들이 어떻게 다뤄졌는지?
"뉴질랜드도 대부분의 사회와 마찬가지로 견해나 의견들이 굉장히 많은 사회입니다. 각자의 입장에 따라 논란거리가 될 수밖에 없는 이슈인 만큼 뉴질랜드에서도 여러 의견과 논쟁이 있었던 건 사실입니다. 포괄적 인권법(차별금지법)도 물론 큰 문제 없이 통과되긴 했지만 사전에 많은 토론과 논쟁의 과정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민주사회라면 당연히 통과해야 하는 절차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의 의견은 경청되어야 하고요. 민주 사회에서는 어떤 이슈든 간에 공론의 장에서 토론하고 논의해서 합의를 모아가야 합니다. 바로 그게 의회의 역할이겠죠. 여러 목소리들의 합의점을 찾아 해결책을 찾는 것입니다."
- 원칙적으로 맞는 얘기다. 하지만 우리 사회의 경우 포괄적 차별금지법이 처음 발의 됐던 17대 국회 때 부터 20대까지 번번이 통과가 저지되어 왔고 21대 국회에서도 답보 상태다. 뉴질랜드는 사회적 갈등을 어떻게 해결한 건가?
"뉴질랜드의 핵심 철학은 공론장을 활성화 시키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평화적이고 건설적인 방식으로 의견을 개진할 수 있는 메커니즘을 보장하는 데 가장 공을 들였습니다. 국민청원과 시위, 국회에서의 토론 같은 방식으로요. 그리고 그 과정에서 반드시 의견이 다른 서로 간 존중이 있도록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뉴질랜드라고 해서 완벽하다는 인상을 결코 주고 싶지 않습니다. 오늘날 뉴질랜드 역시 많은 문제에 직면해 있습니다. 특히 인종차별 문제가 여전한데 원주민인 마오리족 등에 대해 오랫동안 고질적으로 인종 차별 문제가 있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코로나 시국으로 인해 상황이 점점 더 악화되고 있고요. 여러 문제가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민주 사회는 열린 토론으로 인해 더 강력해집니다. 국회, 사법체계 등 우리가 이미 가지고 있는 메커니즘을 통해 반드시 평화적인 결론을 갖고 올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가 4년째 머물고 있는 한국에서 보고 느낀 가장 큰 차별에 대해 묻고 싶었습니다. 특히 이미 20년 전 차별금지법을 만들고 8년 전 동성혼을 합법화 시킨 나라에서 온 성소수자 대사로서 현재의 우리 사회를 보는 시각을 묻고 싶었습니다. "현재 한국 사회에서 가장 차별이 심한 분야는 어디인 것 같냐"라고 물었는데 현직 대사 신분이다 보니 역시 즉답을 피했습니다. "한국 사회가 많은 토론을 벌이며 사회적 변화를 겪고 있는 걸 지켜볼 수 있는 걸 굉장히 기쁘게 생각한다"는 지극히 외교적인 답변을 내놨습니다. 그래서 질문을 바꿔 이렇게 물어봤습니다.
- 성전환 수술을 했다가 불명예 전역 당하고 정부와 소송 끝에 목숨을 끊은 고 변희수 하사 사건을 아는가. 뉴질랜드였어도 발생할 수 있는 일이었을까.
"직접적인 코멘트를 드리는 대신 뉴질랜드 얘길 해보겠습니다. 뉴질랜드에서도 역시 군대 내 LGBT, 트랜스젠더에 대한 차별과 희롱이 문제가 됐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에 대해서도 또 많은 사회적 토론과 논쟁들이 있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뉴질랜드에서 최초로 오픈된 트랜스젠더 군인이 나왔습니다. 변 하사처럼 남성에서 여성으로 성전환하신 분인데 그 커밍아웃이 2010년이었습니다. 현재 그 분은 공군 하사로 여전히 복무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 역시 2010년 당시에는 이걸 어떻게 다뤄야 할지 몰랐습니다. 군 차원에서 어떤 포괄적인 정책이나 가이드라인이 있지도 않았고요. 그래서 그를 위해 뉴질랜드 방위군, 뉴질랜드 군대 차원에서 우리가 접근을 새롭게 하자, 라는 사회적 논의 끝에 성소수자와 관련된 군내 지침과 가이드라인을 만들어 냈습니다. 단순히 성소수자, LGBT, 트랜스젠더를 포괄하는 것 뿐 아니라 전체적인 군내 소수자 다양성을 보장하도록 하는 성격의 지침 말입니다."
- 그 이후에 어떤 변화가 있었나? 군이 약화된다는 비판은 없었나?
"가이드라인이 다행히 잘 작동해서 뉴질랜드 군대는 2014년 헤이그 국제기구로부터 전세계 군대 중 가장 LGBT 포용적인 군대라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2019년에도 뉴질랜드 군대가 소수자 인권상을 받은 적이 있고요. 오늘 날에도 뉴질랜드에는 현직에서 훌륭히 복무 중인 많은 LGBT 군인들과 경찰이 계십니다. 현직에 계시면서도 성소수자 프라이드 축제도 적극적으로 참여할 정도로 함께 살아가는 게 당연한 일이 되었습니다. 다양성을 수용하는 것은 분명 더 강력한 사회, 강력한 국력의 기반이 됩니다. 사회의 각 구성원이 자신의 정체성으로 인해 하지 않아도 될 고민을 하는 대신 각자의 자리에서 자신의 일, 군사 전략, 업무에만 모든 집중력을 쏟으면 되기 때문입니다."
짧은 인터뷰 시간동안 터너 대사가 차별금지법의 중요성 만큼이나 강조한 것은 민주 사회가 가진 힘이었습니다. 열린 공간에서 치열한 토론이 펼쳐지는 과정에서 잘못된 정보와 가짜 뉴스같은 쭉정이는 걸러지고, 논의 가치가 있는 엑기스만 남는다는 믿음입니다. 그 장을 열어주는 게 국회가 해야 할 역할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우리 국회는 지금껏 이 이슈 만큼은 일관되게 외면해왔습니다. ‘소수자’에 대한 법안이다 보니 표가 안 된단 건데 20대 국회 땐 기껏 발의했던 법안을 일부 지역 주민 반대로 자진 철회하는 촌극까지 있었습니다. 지난 해엔 차별금지법을 동성애반대처벌법이라고 주장하는 기자회견을 무려 국회의원이 개최한 적이 있었습니다. 목사가 성경 말씀을 설교했다가 벌금을 물거나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인터넷에 떠도는 전형적인 가짜 뉴스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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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 사이 시민 사회에선 이런 주장들에 대해 사실관계를 바로잡는 여러 보도와 공론화 과정이 있었습니다. 그 결과, 현재 추진되고 있는 포괄적 차별금지법에 동성애 반대 설교나 거리 선교를 금지하고 처벌하는 내용이 없다는 건 이제 어느 정도 보편 상식이 되었습니다. 법안이 금지하는 차별은 고용과 교육, 행정서비스를 이용할 때, 그리고 재화나 용역을 공급하고 이용할 때로 한정된다는 점 역시 어느 정도 상식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남은 엑기스를 가지고 10명 중 8명 이상이 차별금지법 제정에 찬성한다는 국가인권위 설문조사 결과(2020년)가 나왔고, 또 차별금지법 제정을 위한 입법청원이 소관 상임위 회부를 위한 요건인 10만을 코앞에 둔 8만 5천 명을 넘어서고 있습니다. 물론 여전히 반대의 목소리도 강력합니다. 이들의 의견도 공론 과정에서 경청되어야 할 겁니다. 17대부터 20대까지 이 갈등을 줄기차게 외면해온 국회가 이번엔 이 사안에 대한 민주적, 제도적 해결에 얼마나 제 역할을 할지 지켜볼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