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열 씨, 우리 가게 내일이 마지막인데, 만나기 어렵겠지만 그냥 소식 전하고 싶어서요. 그동안 고마웠어요. 코로나 끝나면 언젠가 차라도 한잔해요."
옛 동네 단골 식당 사장님에게 메시지를 받았습니다. 올해에만 총 일곱 분의 사장님이 문을 닫는다고 이별의 메시지를 보내왔습니다. 올해 초, 집값 광풍을 피해 서울을 떠나기 전까지 저는 한 동네에서만 쭉 16년을 살았답니다. 지나온 시간만큼 여기저기 단골 가게도, 쌓인 추억도 많았지요. 동네가 조금 시끄럽고 언덕이 높아 불편한 대신 소박하고 정 많은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사는 동네였습니다. 단골 카페에서 한참 글을 쓰고 있으면 옆집 반찬 가게 이모님이 가져다준 김치로 사장님과 손님인 제가 같이 밥을 먹기도 했고요, 길 건너 붕어빵집 할아버지가 며칠 보이시지 않으면 근처 상인들이 돌아가며 안부를 여쭈러 가는, 그런 살가운 마음이 가득한 곳이었습니다.
그 정든 동네를 떠나오던 올해 봄, 몇몇 사장님들이 전화번호를 교환하자고들 하셨습니다. 멀리 가더라도 가끔 안부는 묻자고요. 저는 말했지요.
"에이 사장님 왜 그러세요, 안 멀어요. 전철로 한 시간이면 와요. 제가 자주 놀러 오면 되지!"
생각해보면 아무리 단골 가게여도 사장님 연락처를 평소에 저장해 두지는 않았습니다. 언제나 가게에 가면, 그 자리에 계시는 분들이라고 생각했으니까요. 대학 신입생 시절부터 서른여섯이 되도록, 그 자리에 계셨던 분들이 태반이기도 했고요. 그런데도 굳이 전화번호를 꾹꾹 눌러주셨던 아홉 명의 사장님들.
그분들 중 일곱 분이 오늘로 사라졌습니다.
세 가지 생각이 동시에 떠올랐습니다. 그나마 아홉 분의 전화번호라도 받아두길 잘했다는 생각, 전화번호를 모르는 수많은 사장님들은 무사하신지에 대한 근심, 그리고 가게에서 몇 번 보았던 그들의 초중학생 남짓한 자녀의 얼굴들. 그리고는 생각했습니다. 올해 2020년은 그 어린아이들의 삶에서 어떤 날들로 기억될까.
조금 다른 이야기입니다만, 상담을 하다 보면 유독 부정적인 말을 많이 하는 청년들이 있습니다.
"어차피 노력해도 피라미드 바닥을 못 벗어나잖아요."
"결국 운이랑 부모에 의해서 결정 나는 거 아니에요?"
"도전하고 노력하라는 말이 제일 위선적으로 들려요."
그들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다 보면 일부 공통점이 있습니다. 10대 초중반에 큰 트라우마를 겪은 경우가 꽤 많은데요. 열심히 살아오던 부모님이 한순간에 직장을 잃거나, 사업이 망해버린 경우가 그것입니다. 특히 1997년 IMF 사태, 2008년 이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집안이 휘청거렸던 시기, 11~15세가량이었던 경우가 대다수입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가치관이 한참 형성되는 시기에 그들은 느껴버린 거지요. "최선을 다해 노력하고 열심히 살아도 삶은 무너져 내릴 수 있다"라는 사실을요.
그런 시기를 지나 청년이 된 그들에게 세상은 노력하면 뭐든 이룰 수 있는 곳일 리 없겠지요. '뭐야, 그럼 내 부모님은 노력을 안 해서 그런 일을 겪으신 거야?'라는 반감부터 들 수밖에 없으니까요. 하나둘씩 사라진 사장님들과의 추억을 되짚어보며, 또 가끔 인사를 나누던 그들의 자녀들을 떠올리며 생각했습니다. '2020년, 지금 11~15세인 그 아이들이 청년이 될 때쯤... 그들은 세상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게 될까. 내가 그때까지 상담을 하고 있다면 나는 그들의 마음을 돌볼 수 있을까?'
이내 마음이 무거워졌습니다. 지금 일어나는 이 숱한 일들이, 코로나 때문이기도 하지만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는 우리 어른들의 탓이기도 한 것 같아서요. 이제 제 옛 동네에는 두 분의 사장님이 남아 계십니다. 그들은 끝까지 남아계실까요? 코로나가 끝나고 동네를 다시 찾았을 때 아무도 안 계실까 봐, 그래서 반가움 대신 떠난 빈자리만 보이진 않을까 걱정입니다. 우리가 더는 이별하지 않는 길은 어디에 있을까요. 도시를 잠시 멈추는 것이 정답일까요. 아니면 우리들 스스로가 자중하며 이 시간을 버텨내야 할까요.
이러나저러나 2020년이라는 터널은 너무도 길고 긴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인-잇 #인잇 #장재열 #러닝머신세대
# 본 글과 함께 읽어볼 '인-잇', 지금 만나보세요.
[인-잇] 사유리가 쏘아올린 '비혼 출산', 빛과 그림자